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171년 포교소장연성회 감화

 

즐겁게 고생의 리를 쌓자 1

김 규 수(성원교회 교회장)

 

반갑습니다. 포교소장 연성회에 부덕한 제가 이 자리에 서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전도하라하면 자신 있고, 하루 종일 길을 걸어라 해도 할 수 있는데 감화하라 하면 제게는 제일 괴롭고 힘든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전생부터 부족 불만과 험담을 많이 쌓아왔기 때문에 신님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말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제일 괴로운 것이 감화인데 지명을 받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 교조님께서 구상하고 계시는 온 세상 인류들의 즐거운 삶 프로젝트에 포교소장 여러분께서 선봉장으로 임명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포교소장님은 일선 용재로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길을 개척해 가고 있습니다. 지도말씀을 보면 나설 때는 이쪽 저쪽 뒤로도 돌아보겠지. 그러나 전쟁터에 나갔다면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1894.1.22)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액운과의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그것이 포교소장이 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포교소장의 길이란 액운이 살아남느냐 여러분이 살아남느냐 이런 마음으로 포교에 힘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포교소장의 길을 또 어디에 비유하느냐. 컴컴한 엄동설한에 친필을 양식으로 해서 혼자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포교소장이 가는 길입니다. 아무 도움도 없고, 아무격려도 없고 모두가 냉대하는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이 포교소장의 길입니다. 그 길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인연 자각이라는 틀을 깨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인연이 무엇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내 인연이 얼마다, 내 인연의 무게가 얼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박수) 첫째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30년 신앙해도 이런 관상밖에 안됩니다. 이런 관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버이신님의 수호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도 포교를 하시면 모든 인간 생각을 버리고 누구의 잘못도 생각하지 말고, 묵묵히 내 인연을 자각해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길을 가면서 많은 마디와 사정 속에서 걸어 왔습니다. 지금 현재도 그 사정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인연이 무거워서 남보다 3배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같은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깊이 자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이 있는데서 출발하지만 저는 가정이 없는 인연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이룩해야겠다, 신자를 만들어야 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원만한 가정,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작정하고 인연끊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왔지만 고통과 번민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연을 끊는 길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의 길입니다. 하지만 터널이 길어야 빛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짧은 터널은 순간에 지나가서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양 사방 막힌 긴 터널을 지나가면 언제 밝은 빛을 볼 수 있나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탄과 모든 어려움을 뚫고 액운을 헤치고 악인연을 끊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남을 볼 여가가 없습니다. 남의 잘못을 생각할 여가가 없습니다.

이 길은 남을 보아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교조님의 50년 모본 틀을 벗어나면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 50년 모본 틀 속에서 헤쳐 나가는 것만이 즐거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지도말씀에서는 모든 즐거움은 여기에 모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50년 모본의 길이 우리가 살아가는 즐거움의 세계입니다. 내 가정에 자녀나 남편이 혹은 아내가 병들어 누워 있다면 어디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즐거움이 없죠. 그 즐거움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연을 끊고 남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남을 구제해야 만이 내 인연이 끊어지고 내가 살아납니다. 남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납니다.

저는 포교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방문, 노방강연, 도보전도. 포교는 정해진 방법이 없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가 없습니다. 자기가 인연을 자각해서 나는 가정방문을 해야겠다, 나는 노방전도를 해야겠다, 아니면 길이라도 걸어야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 말에 흔들리고 저 말에 흔들리다 보면 세월만 흘러가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포교전도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이라도 구애받지 말고 신님 앞에 작정을 해서 열심히 신앙하면 됩니다. 신앙은 신념입니다. 얼마나 믿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길을 오래 간다 못 간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내가 재산이 많아서 잘 살아왔다, 내 가정은 행복하다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제게 가장 힘든 부분은 가정이 없는 인연, 특히 아내가 없는 인연입니다. 저는 건강한 부인을 맞이했지만 내 인연에 의해서 결혼 3년부터 계속해서 아내가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신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마누라가 없는 가정, 토대가 없는 가정은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아내를 살리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이길을 걸어왔습니다.

집사람이 지금 대학입학을 눈 앞에 둔 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그 아이를 지우면 됩니다. 의사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용재가 되어가지고 그래서 되겠느냐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검정을 가기로 했습니다. 임신 육개월 몸으로 결핵약을 싸들고 터전으로 갔습니다. 감기약이나 담배도 아니고 그 독한 결핵약을 6개월이나 복용했으니 뱃속에 아이는 기형아가 틀림없었습니다. 어버이신님께서도 꿈으로 불구라는 알려주셨습니다. 집사람도 뱃속에 아이가 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터전에서 어버이신님 앞에 엎드리니 인연이라면 불구라도 받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불구라도 받자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에 순산 허락을 받았습니다. 순산허락을 받자 그 때부터 아이가 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금 그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인데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원서를 명지대에 넣었는데 1차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국 법대도 1차 합격했고 경남사범대학, 부산대 무역과도 1차 합격되었습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더 이상 안 되도 감사하다 생각합니다.(박수) 학원 한 군데도 안 보냈고, 오로지 신님 일밖에 몰랐는데도 건강하게 커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신님의 길, 구제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연자각은 그렇지만 자녀는 아직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어버이신님의 품속으로 와서 신님이 바라시는 길로 갈 때 인연이 납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길은 정말로 감사한 길입니다. 3년 전 집사람이 의료공단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암 검진을 받았습니다. 지금 집사람은 폐가 하나는 없고 하나도 1/3만 살아있습니다. 3년 전에 내시경 찍어보니까 위에 종양이 3개나 있었습니다. 오래된 종양은 위암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간경화가 간암이 되듯이. 하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신님의 수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어버이신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여름에 다시 검진을 받았는데 위의 종양 하나는 작아졌는데 다시 위와 식도가 만나는 곳에 혹이 하나 생겼답니다. 전문의가 처음에 이것은 100% 식도암이라고 합디다.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한두 번 검사해도 보통 결과가 다 나옵니다. 그런데 5번이나 조직검사를 해도 그때마다 이 혹이 세포조직을 바꿉니다. 의사는 식도암, 위암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섯 번을 세포조직검사를 해도 도저히 모르겠다는 겁니다. “의사생활 하는 동안 이런 것은 처음입니다. 앞으로는 내게 오지 마세요. 다른데 가세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런 것은 처음입니다. 모르겠습니다.” 했습니다.(박수) 그 판명을 121일 받았습니다. 저는 지난 3년 동안 다리를 뻗고 자지 못했는데 , 이 암이 식도암도 위암도 아니고 드디어 암에서 벗어났구나!’ 싶었습니다. 이날 드디어 발을 뻗고 잤습니다. 그리고 집사람 몸무게가 35킬로 36킬로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는 일은 보면 제가 놀랍니다. 애들 셋 뒷바라지, 제 뒷바라지, 마디 나와 검정 간 산하를 위한 기원까지. 그래서 그 몸으로 그렇게 실천하니 당신은 암이 한개 두개가 아니라 5개가 되어도 이겨낸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고 전국을 다니지만 토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토대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지 집사람이라는 그 토대가 있기 때문에 그 토대를 딛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남편이 이렇다 자식이 이렇다하는데 어떤 어려움과 마디가 오더라도 토대가 튼튼하게 받쳐주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것이 교조님, 어버이신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서울 100회 도보작정을 했습니다. 지금 66회째 했지만 도보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만나는 사람이 모두 다 새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리 아파서 잘 걷지를 못할 때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전도를 할 게 아니라 어버이신님을 굳게 믿고 10번만 엎어질 각오로 걷는다면 지팡이, 막대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박수) 천리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대물차물의 리입니다. 이것을 가슴깊이 새긴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버이신님은 반드시 함께 걸어주십니다. 어떤 어려움, 괴로움, 단명이라도 명을 이어주십니다. 이 길은 신기한 길입니다. 교조님께서 50년 동안 먼저 걸으신 후 자 너희들 따라오너라.”고 하신 것처럼 이길은 행동하는,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말로써 되는 것 아닙니다. 남이 알아주는 것 필요 없습니다.

서울서 걸어 오다보면 수많은 감시카메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조님의 감시카메라는 24시간 나를 비춰보고 있다는 겁니다.(박수) 내가 이 즐거움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는 데 누가 두렵겠습니까?(박수) 서울 길을 한 60번 걷고 나니까 이제는 어떤 곳에 가더라도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서울 광화문에서 하거나 마산에서 하거나 어느 곳이든 전도하는 것이 같습니다. 서울, 대전, 김천 어느 곳 없이 다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자유자재의 길이 이런 것이구나!’ 싶습니다.(박수) 아직도 자유자재의 단계는 못 들어갔습니다만. ‘아 이런 것이구나!’싶습니다.

이번에도 서울에서 4일 만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4일 만에 들어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수원에서 신탄진까지 하루 만에 걸어왔는데 300리 넘습니다. 근데 몸은 그렇게 가벼울 수 없습니다. 거기서 한 시간 반만 더 가면 대전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근데 신탄진에는 한일병원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항상 자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서 쉰다는 게 잠들었습니다. 힘들어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걷는 것도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천리왕명 깃발을 꽂고 박자를 치고 오는 데마다 천리왕님을 외칩니다. 정말 즐겁게 옵니다. 수원을 지나오는 중간에 공무원연수원이 있습니다. 마침 7시경인데 퇴근하는 공무원이

좀 봅시다. 이 소리가 가끔 나는데 이게 뭡니까?”하고 불러 세웠습니다.

천리교에서 쓰는 박자목인데 쉽게 말하면 불교의 목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소리가 참 듣기 좋은데. 근데 어디로 갑니까?”

저는 서울에서 마산까지 천리를 갑니다.”

아 그래요? 안내서가 있으면 주세요.”

먼 길 다니다 보니 전도지는 구겨져서 안 되겠기에 안 가지고 다닙니다.”

그러면 핸드폰 있습니까?”

해서 서로 핸드폰번호를 입력시켰습니다. (계속)

(지난 1711029일 교단에서 실시한 포교소장 연성회에서 김규수 성원교회장님께서 하신 감화내용입니다. 교육원장님과 성원회장님의 허락을 얻어 2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