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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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8

마음으로 고생을 하는 거야

 

박 지 수

 

어느 날부터인가 새벽마다 일어나는 게 몹시 힘들어졌다. 기분 좋게 바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끙끙대며 겨우 일어나는 날이 지금까지 한달 보름이나 계속 되고 있다. 낮에도 어딘가가 아팠다. 허리, , , 다리, , 옆구리, 혹은 속이 아프고, 입안이 부르트고 헐기도 해서 온몸이 돌아가며 아팠다. 전신이 개운하지 않고 아프니 자연 기분이나 컨디션도 떨어져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비실비실 거리는 자신이 스스로 기분 나쁘고 점점 더 우울해 졌다. 어디 큰 병이라도 난 걸까? 몇 년 전 의료보험에서 생애 전환기 검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새삼 생각이 난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생애 전환기 검사는 20, 40, 60. 그런 나이에 받는 검사인 모양이다. 그 나이가 인생과 건강의 전환기가 된다는 건가? 건강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 단계 떨어지는 시기라 이렇게 온몸이 아픈 걸까?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반 건강 상태가 너무 오래 가니 정말 종합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는 가 싶었다. 이렇게 아픈 데는 뭔가 아픈 이유가 있을 텐데 싶어서 여러 가지를 찾아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첫째, 지난달 중순에 조카가 당분간 같이 지내고 싶다며 온 것이다. 둘이 사는 집에 한 녀석이 온 것이다. 거의 둘만 살아서 어릴 때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 외는 다른 사람과 긴 시간을 같이 살아 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런데 조카가 온다는 것이다. 조카는 재작년에 3주간 여기서 같이 지낸 적이 있어 내 기록을 깼었다. 그때 단식을 시켜달라고 해서 본단식 5일을 준비하고, 이런 저런 단식에 대한 지식들, 지도한 경험들과 스스로 겪은 체험들을 들려주며 3주간을 감식, 단식, 복식으로 보내고 갔다. 그 체험이 조카의 인생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고 향상시켰던 것 같다.

해서 다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단식하여 맑은 머리로 공부도 할 겸 앞으로 삶을 추스르기 위해 온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더 길게 본단식을 3주간 해 보고 싶다고 졸라댄다. 주어진 시간이 한 달인데 3주 단식이라니 그것은 무리한 욕심이라고 단호히 나무랐다. 단식에는 본단식만 있는 게 아니다. 예비단식(감식)과 회복식(복식)까지 다 포함시켜야 한다. 굶는 것만 계산에 넣어서는 안 되며 예비단식과 회복식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단식을 안 하는 게 낫다. 그래서 한달 안에 다 하고 싶어 하는 조카를 나무랐다.

단식을 욕심으로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식은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는 의식이다. 그런데 욕심으로 단식을 해서 될 일인가.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본단식만 단식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면서 정 그렇다면 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인가를 물었다. 길어야 45일 정도란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 젊고 건강상 별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이니까 2주 본단식 기간을 정하고 감식에 들어갔다.

그렇게 조카가 와서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생활리듬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본단식이야 효소단식이므로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식과 복식 때는 여러 가지 설명하고 관심을 갖고 만들어줘야 하는 음식들이 많았다. 명색이 단식지도인데 저 애가 원하는 목적대로 맑고 건강한 몸과 마음이 되려면 본인도, 나도 지키고 견디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물론 우리집 주변에는 불량식품, 가공식품들을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유혹도 별로 없는 편이라 다행이지만 그 만큼 직접 챙겨 줘야할 것이 많았다. 감식이나 복식을 할 때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지만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아무 음식이나 먹일 수도 없고 가능하면 자연식, 생채식, 유기농으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카가 혼자 조용히 원하는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해졌다. 어쨌든 우리 부부 둘만 사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두 번째, 작년에 역사 때문에 중단했던 요가교실을 다시 연 탓이다. 수업은 월, , 3일 동안 하루에 두 차례이고, 3시간이 걸린다.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고, 오고 가는 시간까지 보태면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하루에 6-7시간은 된다. 끝나고 돌아와 이런 저런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10시가 넘어버린다. 그러니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예전보다 30분 이상 늦어지고 일은 더 많아졌다.

요가수업을 새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이 하느라 여기 저기 몸이 쑤시고 아프다. 보통 상식으로는 요가를 한다고 몸이 더 아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일년 이상이나 쉬다가 갑자기 요가를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살이 날 수밖에. 회원들처럼 이틀에 한번 한 시간 정도 즐기면서 한다면 몸과 마음이 행복하고 가벼워지겠지. 하지만 앞에 선 사람이라 동작들을 몸의 한계를 조금씩 벗어나 더 크고 강하게 해서 보여줘야 한다. 게다가 계속 설명을 해야 하니 더 많은 에너지가 빠져 나간다. 새벽에 일어나 아픈 곳을 잘 생각해 보면 대부분 어제 수업시간에 무리한 동작이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몸의 불편은 요가동작들이 몸에 붙어 편안해 질 때 까지, 가르치는 일에도 이력이 날 때까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알아보니 많은 요가강사들이 이런 저런 인대나 근육에 문제가 생기는 직업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동작들을 완벽하게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기 몸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남편일로 여러 가지 새로 신경 써야 할 일도 생겼다. 그리고 1주일 동안 남편이 터전에 가 있는 바람에 그 몫까지 해내면서 남편을 위해 12장 근행을 하루에 몇 차례 올리며 기원을 했다.

약 한 달 반 동안 이렇게 새로운 일들이 겹쳐서 벌어졌다. 그러니 피로가 쌓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어느 하루도 개운하질 않으니 스스로도 내 몸이 왜 이러지?’ 싶었다. 까닭을 알 수 없고 스스로 납득이 안 되니 슬슬 짜증이 난다.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하게 컨디션이 떨어진다. 몸 아픈 것에 마음이 매이며 빼앗기게 되었다. 피로하긴 해도 마음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일 아닌가? 그 정도로 이렇게 힘겨워하다니싶어 속상하다. 이 정도 일로 이렇게 비실거리는 게 싫고, ‘좋은 기운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건강을 줘야 하는 요가선생이라는 사람이 이게 뭐야!’ 싶으니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아프고 힘이 없는 이유는 단지 생활의 변화나,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곳으로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미리 앞서서 다가올 일을 걱정하고, 마음으로 피곤해하고, 조카를 보살펴야 하는 상황을 힘겹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조카가 와서 좋고 고마운 점도 많다. 우선 조금 더 긴장하여 부지런히 살게 되었다. 그리고 조카가 오후 퇴찬과 신전청소를 해 주니 밤늦게 돌아와도 곧바로 쉴 수 있게 되었다. 또 남편이 터전귀참하여 집을 비운 사이에 대신 기사노릇도 해 줬고, 커다란 집에 같이 있어주니 든든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기간 동안에 가야할 데는 왜 그리 많고, 해야 할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봇물이 터진 것처럼 갑자기 많은 돌발적인 일들이 생겼다. 그리고 계획된 일들과 상황도 자꾸만 변하여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쳐가는 자신을 느꼈다.

지금 있는 곳, 지금 해야 할 일, 지금 만나는 사람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어느 순간 해치워야 할 많은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벌써 마음이 먼저 지쳐 버리고 만다. 자신의 힘이 100이라면 그 힘을 단지 생각만으로 절반을 넘게 써 버린다. 그러니 무슨 힘이 있겠는가. 언제나 비실비실 힘없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거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금 여기에서 닥친 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근행 올릴 때는 근행에 집중하고, 요가를 할 때는 요가에 집중하고,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 집중하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것을! 어찌 그리 생각이 많고 마음 빼앗기는 일이 많은 지.

지도말씀에서도 마침 나를 보고 하신 말씀인 듯 이렇게 일러놓으셨다.

자아 자아, 여러 가지 사정, 갖가지 사정,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한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깊은 뜻이 있으므로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 앞서부터 이에 대해 알려 두었다. 원래 여러 사정에 대해 말했으나 하나이다. 거기에 조금 틀리는 것이 있다. 걷다 보면 여러 가지 길이 있다. (1893. 4. 13)

자아 자아, 또 또 여러 가지 사정, 앞서의 사정을 각각 충분히 감안하여. 오늘이라면 오늘, 내일이라면 내일. 걱정할 것은 없다. 걱정해서는 안 된다.

(1893. 4. 13)

고생은 마음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거야. 즐거움, 마음을 바꾸면 고생은 없겠지. 즐거운 놀이라 한다. 즐거운 놀이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는 즐거운 놀이라 할 수 없겠지. 마음에 억울함이 있어서는 즐거운 삶은 어림없다.

(1895. 5. 31)

그러다가 어느 날 조카가 TV 프로그램 중 무릎팍도사코너에서 발레리나 강수진 이야기가 나온 게 아주 감동적이라며 보여주었다. 조금은 관심 있던 인물이라 열심히 보았다. 거기에 나온 이야기 중에 다음 이야기에서 반짝이는 영감이랄까, 어떤 깨달음으로 마음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그렇지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 어딘가가 아프지 않으면 전날 연습이 부족했구나하고 반성한다.” 그 말에 전율이 일면서 소름이 돋았다. 노력에 앞서는 재능이 없다고 하더니 항상 부상상태일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개운한 것이 아주 이상한 일로, 아픈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기는 그 말투가 충격적이었다. ‘, 젊은 사람도 아픈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는 것이 놀라왔다. ‘아하! 그렇구나. 나도 요가강사니까 당연히 더 큰 동작으로, 조금 내 몸에 무리가 되어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니 아플 수밖에 없구나. 게다가 요가라는 게 안 쓰는 근육, 굳은 근육을 쓰게 하는 것이니 그 근육들이 풀어져 건강해 질 때까지는 아픈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은 나날이 열심히 살고 있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반증이구나.’싶으니 마음이 밝아졌다. ‘아픈 것이 당연한 거구나!!!.’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가벼운 마음이 되었고 환해지니 몸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날 때 힘들고 아파서 아야!’하다가도 어제 열심히 살았구나싶어 기분이 좋아진다. 몸의 아픔을 조금은 무시할 수 있고 가볍게 느끼게 되었다. 몸에 끌려가지 않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받아들이는 수용 자세에 대해서 얼마 전에 고성교회 2대 교회장님께 들은 말씀이 생각난다. “나이 들면 -마음이 충분히 닦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연히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고 팔 다리, 무릎, 허리도 아프기 마련이다. 살아오면서 나날이 닦고 닦아서 신님이 원하시는 맑은 마음이 되지 못한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마음을 충분히 맑히고 티끌을 터는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고 살아왔으면서 건강한 몸을 원한다는 건 다 욕심이고 무리한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아픈 게 당연하다.”

물론 사람 몸은 기계가 아니다. 사용한 기간만큼 낡아지는 기계는 분명 아니다. 그래서 나이 들기 때문에 여기저기 낡아 아플 수밖에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신님께서도 신앙의 목표를 늙지 않고 앓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임을 친필을 통해 미리 알려 주셨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의 성인 정도가 아직은 늙지 않고 앓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진기한 수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프거나 늙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을 젊은 사람처럼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아픈데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아픔이나 늙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더 이상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죽음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그 때 인상깊게 들어서인지 새삼 다시 생각이 난다. 그래, 받아들임이란 이런 거지.

결국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고 좁은 마음으로 인해 고생하거나 몸이 고달파진다는 것을 다음의 여러 지도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길 갠 날도 있는가 하면 흐린 날도 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어떤 날도 있다. 이것을 분간하여 마음을 크게 가져 다스리면 다스려진다.

(1895. 1. 14)

자아 자아, 묻는 사정 묻는 사정, 몸이 시원찮다, 아무래도 몸이 시원찮아서 사정 묻는다. 묻기 때문에 잠깐 깨우치마. 이제 이것 이렇게 되는가 저렇게 되는가 하고 걱정한다. 나날이 마음에 걸린다 걸린다. 또 하나의 사정 조금 마음에 걸린다.-중략- 잘 분간해 들어라. 이 길은 어떤 리에서 생겼는가. 시작의 리만 마음에 새기면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것은 없는 거야. 진실만 마음에 간직한다면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또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데는 안 되는 리가 있다. 마음으로 걱정해서는 이 길이라 할 수 없는 거야. -중략- 시작했던 길. 조금 밀고 나가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나날이 걱정해서 걱정해서 마음이 편할 틈이 없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몸도 편치 않다. (1897. 12. 23)

세상을 보고 단노하는 마음을 정하라. 단노하는 마음이 정해지면 걱정할 것이 없다. 걱정하면 걱정하는 리가 돌아온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큰마음을 가지고 리를 다스려라.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지도말 해 주마. (1888. 6)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걱정할 필요 없다. 걱정하면 한이 없다. 넓은 마음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1902. 8. 10)

친필에서도

각자의 몸은 차물임을 모르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3-137)

각자 제 몸 생각은 쓸데없어 신이 각각 분간할 거야 (5-4)

각자의 마음은 몸을 통해 무슨 일이든 명백히 모두 나타 낼 테야 (12-171)

이런 여러 말씀을 바탕으로 교의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도 간추려 정리해 놓았다.

걱정을 하면 한이 없다. 어떠한 것도 되어가는 대로 하겠다는 큰 마음으로 사정을 다스리도록. 아무리 걱정을 해 봐도 인간 마음으로 생각한 그대로 어떻게 될 것인가고 걱정을 하겠지만, 신상은 차물로서 어버이신님의 의도대로 어떤 모습도 보여 주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고, 또 할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하라고는 안하니, 되어지는 대로 천연자연인 어버이신의 수호에 의탁하여 되어가는 모습을 기뻐하도록 하라. 마음이 용솟음치면 몸도 용솟음치게 된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최근에 좁은 인간 마음으로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신 모양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주시며 더 큰 마음이 되라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신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일깨워 주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