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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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7

손자 이름 짓기

박 지 수

 

장조카가 집안의 장손인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제사 때 만났는데 삼촌, 숙모! 우리 아기 이름 잘 부탁드립니다!”한다. 이름이라. 십수 년 전에 시동생이 아이를 낳았을 때 우연히 이름을 지어준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여러 번 이름 때문인지 착하고 공부도 잘한다는 평판을 들었다. “삼촌과 숙모가 이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났던데요. 좀 지어 주세요!”하는 아부 섞인 말에 흐뭇한 마음으로 허락을 하고 보니 참 부담스러웠다. 허락할 때는 큰 고민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좋아 보이는 이름을 신님께 몇 가지 올리고 사흘 기원한 뒤 뽑아서 주면 되지!’하는 심산이었다. 헌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게 아이었다. 이름이라면 그 아이와 평생을 함께 갈 건데 그렇게 쉽게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땐 단번에 적당한 이름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영이 맑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지난 역사 이후 책을 정리하면서 몇 권 있던 작명 책도 다 버린 탓에 책장에는 작명 책이 없었다. 해서 서점에 가서 작명 책을 샀다.

오랜만에 작명 책을 뒤적여 보니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10여 년 전에도 작명을 잠깐 공부한 게 있지만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책을 보니 우선 아이 사주를 알아서 풀어내야 되고, 부모 사주도 풀어야 하니 그것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게다가 획수에 따른 음양, 발음에 따른 음양이니, 한글 오행, 자원 오행이니, 원형리격이니, 용신이니 하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불용문자(이름에 쓰면 안 되는 글자)로 정해진 글자는 왜 이리 많은지!

이거 큰일 났다싶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를 어쩐다. 음양오행부터 사주까지 다시 공부해야 하는 데 그럴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앞이 캄캄하다. ‘그냥 못한다고 할 걸. 괜히 지어준다고 해놓고 이거 영 체면이 아니게 생겼네. 그냥 자기들이 짓지 뭘 우리더러 지어달라고 해서 이 고생이냐?’하는 때늦은 후회가 막심하고 기가 막힌다. 엄두가 안 나 책을 밀쳐놓았다가 부담감으로 다시 들추기를 반복하며 며칠을 지냈다.

그래도 되어오는 게 신의 이치라고 했는데.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니 이 기회에 한마디라도 신님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겠지. 잘된 일이지 뭐. 그리고 이참에 작명도 새롭게 공부하게 되었으니 일석삼조 아닌가. 해 보지 뭐! 공부해서 남 주나? 교조님도 <요시에>라든가 <이꾸에> 같은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했다. 듣자하니 다른 교회장님들도 이름을 더러 지어 주시는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 생각하며 내 장점이라 할 [좋은 쪽으로 생각 바꾸기]를 했다.

먼저 부르기 좋고 뜻도 멋진 이름들을 생각나는 대로 잔뜩 적어 놓았다. 손자라니까 중성에 가까운 남자이름으로.

그 다음은 당연히 열심히 작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십여 년 오랫동안 찔끔 찔끔 사주와 오행, 그리고 풍수같은 동양철학분야를 넘겨보고, 훔쳐봐 온 까닭에 작심하고 공부를 하니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우선 아기가 탄생할 때까지 약간 시간이 있으니 사주, 오행을 좀 더 보충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아이가 탄생하자 먼저 사주를 뽑아 세우고 부족한 오행이 뭔지, 너무 많은 오행은 뭔지, 그리고 이 아이의 성격은 어떤지를 파악했다. 또 이길에서 말하는 인연풀이 팔갑도 아는 만큼 짚어보았다. 조금은 윤곽이 잡히기는 한데 앞서 지어놓은 이름을 대입해 보니 영 아니었다. 듣기 좋고 멋진 이름은 오행으로 보면 어울리질 않고, 이상한 이름들만 만들어졌다. ‘이런 이름을 누가 짓겠노? 나라도 안 하겠다.’ 싶은 이름들이었다. 부족한 오행을 보해주는 것도 필수지만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뜻 또한 필수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명에서 고려해야 사항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자· 한글의 발음 오행, 한자· 한글의 획수에 따른 음양, 한글· 한자의 뜻, 사주에 맞춘 오행으로 보완하거나 빼주거나 하는 사법, 보법(용신활용), 부모의 사주와 맞춰서 서로 어울리는 오행, 원형리격이라는 오래된 방법으로 이름 석자의 획수를 이리 저리 더하여 운세를 보고 짓는 법, 불용문자는 쓰지 말아야 하고, 아이가 첫째인지, 아닌지를 고려해서 넣어야 할 글자들, 아이 성씨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것에도 맞춰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 지에 따른 선택까지.

도대체 이런 저런 조건을 다 맞춘 적당한 이름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도 그 아이와 맞질 않으면 좋은 이름이 아니고 오히려 흉한 이름이 되기도 하니 편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 달 이상 이름으로 씨름을 했다. 힘들어서 밀쳐 두다가도 다시 생각한 이름을 맞춰보면 또 아니고.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맞질 않고, 이게 걸리고 저게 걸리고. ‘아이고. 작명가도 그냥 해 먹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어려우니.’ 또 기껏 지어놓아도 조카가 좋아할 지도 의문이다. 위 조건을 다 맞춘 이름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르고 듣기에도 그럴싸할 이름은 더욱 희박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유명한 작명가가 지었다 해도 범인이 보기에 그게 그거인 것처럼 보이는 구나.’ 싶으니 작명가의 심정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편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물어 듣기도 하고 자문도 구하다보니 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그래도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보고 그 다음에 신님의 뜻을 여쭙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손쉽게 아무 이름이나 좋아 보이는 것을 지어놓고 그 중에서 신님께서 하나 골라 주세요!”하고 여쭙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이름을 어떻게 신님 앞에 여쭐 것인가. 더러 영이 맑은 분들은 이름을 그냥 쉽게 짓는 모양인데 그렇게 영이 맑으면 무슨 걱정. 그냥 떠오르는 이름을 지어도 좋을 테니까. 문제는 지금 당장 이름을 지어야 하는 나는 그렇게 맑지 않다는 게다. 해서 열심히 공부라도 해서 찾아보고 거기서 나온 이름을 가지고 어버이신님께 여쭈어 보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작명이라는 분야 역시 오랜 세월 인류가 살아오면서 축적해온 지혜의 산물이지 않는가. 어버이신님께서 주신 지혜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경험과 지식을 모아서 쌓아온 지적 총합물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미신이나 삿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명뿐만이 아니다. 사주나, 음양오행, 풍수같은 분야도 나름대로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수많은 사상과 철학과 경험이 농축되어 있다.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흔히 이길의 가르침을 말할 때 열중에 아홉 가지는 옛 성현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었고, 마지막 한점을 이번에 교조님을 통해서 가르친다.’고 표현을 한다. 즉 이길의 가르침은 앞서서 존재한 아홉 가지와 함께 할 때 열로서 온전하게 드러난다는 말이 아닐까. 아주 중요한 한 가지 포인트만 쥔 채 나머지 아홉을 버려도 좋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때 동양사상과 철학도 그 아홉 가지 속에 속하는 분야가 아닐까.

물론 이것들은 통계에 따른 것이라 100% 믿을 수 없고 해석에 따른 다양한 결론을 유추할 수 있어 간혹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주(四柱)보다는 관상(觀象), 관상(觀象)보다는 심상(心象)’이라고 했다. 또한 교조님께서는 세상에서는 택일을 말하지만 365일 모두 다 좋은 날이라고 하셨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인 나날이 쓰는 마음씨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인류가 남긴 지적 유산을 나름대로 활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해서, 둘이 낑낑대며 한 달 이상을 헤매고 공부를 한 다음 간신히 몇 개 이름을 정했다. 그동안 이름 대상으로 올랐던 것만 50여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으니 중요하게 생각되는 몇 가지를 만족시키는 이름으로 5개를 정했다. 이젠 더 이상 시간도 없고, 노력하기도 지쳐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5가지를 정하고 열심히 사흘간 기원을 드려 마음을 맑힌 다음 신님께 정해 주십사했다.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정해 주셨다. 둘 다 좋다고 아기 부모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들이 한 개로 정했다. 다시 그 이름을 어버이신님께 고하고 이 아이가 이길의 가르침을 신앙하여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원드렸다.

나름대로 노력한 결과로 조카도 기쁘게 잘 받아들이는 거 같아서 뿌듯했다.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이름이 이상한데 좀 더 좋은 이름 없어요?’ 했더라면 난감했을 텐데. ‘휴우~ 다행이다!’

전화로 간단하게 말할 내용이 아니고, 만나서 이모저모를 전할 시간도 없어 긴 편지를 이메일로 보냈다. 아이 사주에 대해서, 그리고 이 아이를 기를 때 부모로서 마음가짐과 조심해야 할 것과 권장해야 할 것, 아이의 행복을 위해 해 줘야 할 부모의 노력과 역할에 대한 긴 내용을 이메일로 보냈다. 신앙하지 않는 조카 내외가 거부 반응 보이지 않게 이길의 가르침을 일러주며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침내 조카의 고맙다는 간단한 인사말로 작명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며칠 뒤 큰댁에 가니 손자 이름이 어느 쪽지에 쓰여 있었다. 그걸 보니 다시 감회가 새롭다. 작명공부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애썼던 장면들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할머니 되려고 공들이는 사이 봄이 저 만치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