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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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5

 

먹구름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박 지 수

 

입교 172년 새해 시작하고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보성에서 연락이 왔다. 보성은 내게 생각만으로 가슴 아픈 곳이라 가슴이 쿵쾅거린다.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 이제 우리와 연관된 아무것도 없는데싶었지만. 거기에 계신 안선생님한테서 온 전화였다. 안선생님은 우리와 약 20여년 인연을 이어 온 분이다. 그런 정 때문에 보성에 못 가게 되었을 때 가장 크게 배신감을 표현하셨다. 그리고는 찾아갔을 때도 얼굴조차 보지 않으시겠다며 피하셨다. 절연을 선언하신 상태로 2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던 분이 먼저 전화로 연락을 주셨다. ‘지금 고성에 와 있다며 저산 우리 집으로 오신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오셨다. 2년 만에 뵙는 얼굴인데 많이 상하셨다. 반가이 맞아들여 인사를 나누고 들어보니 보성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쫒겨 난 상태라 하신다.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여기에 실을 필요는 없다. 오래 묵혀 야산으로 변한 땅을5년이나 피땀 흘리며 일군 옥토를 내 주고 빈 몸으로 나왔다고 했다. 병들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빈 몸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기구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씁쓸했다. 공동체를 이루어 이 세상에 맑은 물 한줄기를 흘려보내려 했던 높은 이상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우선, 우리가 그곳에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탓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지키지 못한 약속과 책임감을 느끼며 죄송스러웠다.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될 줄 미리 아시고 신님이 우리를 결국 그 곳에 못 가게 하셨구나하는 마음이었다. 어느 쪽인지 아직은 그 답을 모른다. 우리 처지에서는 미리 아시고 신님이 못 가게 하셨을 거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반면에 2년 동안 절교 상태로 있던 안선생님과 화해를 하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그곳에서 나왔을 때 가 볼 곳도 많았을 텐데 우리를 제일 먼저 찾아와 주신 것이 고마웠다. 안선생님 역시 우리처럼 그 동안 마음이 편치 않으셨고, 예전과 같은 좋은 관계를 다시 이어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이렇게 마음에 박힌 대못 하나를 빼고 나니 홀가분했다. 연초부터 이렇게 화해로 시작하다니 참으로 고마운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고 있구나 싶었다.

 

내가 평소에 소망하는 일 중에 한 가지는 존경하는 분들을 때때로 직접 찾아뵙고 좋은 말씀도 듣는 것이다. 그 소망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닌데 마음이나 시간을 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올해는 어떤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 뵈어야 할 곳에는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꼭 가 보려고 마음을 정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천안에 계시는 김복관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우리와 20년 가까이 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분이다. 선생님은 단식을 지도해주셨고 보성 나그네마을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이셨다. 젊은 날 함석헌선생님과 씨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나름대로 실천해 오셨던 분이시다. 이제 선생님은 90이 다 되어가는 고령으로 연만하셔서 언제 출직하실지 모르는 상황이다. 해서 2월 월차제를 지낸 후 찾아뵙게 되었다. 선생님 역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전해 오셨는데 이제야 찾아뵈올 수 있어서 기뻤고 감사했다.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한 말씀이라도 더 들어야 나중에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은 보성 사태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동체의 높은 이상을 실현할 만큼 인격적으로나 영성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아주 간결하게 결론내리셨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보성에 가든, 안 가든 결국 이렇게 해체되고, 실패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이런 사태를 미리 아신 신님이 앞서서 우리를 못 가게 하신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언제나 앞서서 수호하시는 어버이신님, 교조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공동체 해체가 우리 책임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부담도 털 수 있어서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나의 정신세계에 한 바탕을 이루게 해준 고향같은 대전을 들렀다. 대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퀘이커 모임도 경험하고 여러 선생님들도 뵈었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살던 전북 진안의 산골에 들렀다.

14년 전에 그 곳을 울며 떠나왔다. 언젠가는 꼭 다시 오리라고 다짐했었지만 쉽게 올 수가 없었다. 거리도 멀지만 남편이 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떠난 지 14년 만에 두근거리는 가슴, 설레이는 마음으로 꿈에도 잊지 못하는 그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워질수록 설레임과 혹시 파괴되었으면 어쩌나하는 우려가 번갈아 마음을 채웠다. 그 때 생겼던 임도로 인해 많이 파괴되지는 않았을까. 우리집은 있기나 할까? 아랫동네 할아버지가 놓아 키우던 반 야생이 된 흑염소들은 잘 있을까? 우리가 목욕하던 선녀탕 계곡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사리를 따던 숲은? 장수로 가던 서울재는? 온갖 상념들이 기대로 부푼 가슴을 더 들뜨게 만들었다. 들뜬 목소리로 이런 저런 추억을 이야기하는 나를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가만히 보았다.

그곳을 떠난 지 서너 해가 지난 뒤 남편은 다른 분들과 그곳에 잠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때 거기는 이제 없어. 당신이 가면 많이 괴로울 거야. 그러니 갈 생각하지 마. 잊어!”했다. 남편은 그 때 정이 떨어졌는지 너무나 가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모른 체했다. 그래도 그곳에 가 보고 싶었고 너무나 그리웠다. 해서내가 운전을 배우면 꼭 혼자라도 제일 먼저 가 볼 거야.’하며 마음먹고 있었다.

가는 길에 있던 작은 면소재지나, 풍경은 그다지 변함이 없어 마음이 놓였다. 우체국도 떡집도, 처음 그곳을 보러갔을 때 밥을 사 먹었던 허름한 식당도 그대로 있어서 반가웠다. 거기에 사는 분들이랑 무슨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반가워서 말이 점점 많아졌다.

드디어 고중대 우리 동네로 올라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흙길은 마른 풀이 무성하고 험했다. 그 때 났던 임도는 오히려 더 많이 묵어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대로 있구나. 아무도 살지 않구나. 파괴되지 않았다!!’임도를 따라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많이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파괴되었더라도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자!’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오래 묵은 산길은 험해 차를 두고 걸어 올라가면서 기뻤다.‘이렇게 묵은 걸 보니 아무 일 없겠다. 정말 다행이야! 우리가 여기에 이사올 때도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못 올라와 산길을 다니는 차로 바꿔서 올라왔었지.’이런 저런 추억을 이야기를 나누며 소풍이라도 가는 듯 즐겁게 산길을 걸었다.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추억을 되살리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 저 모퉁이를 돌면 동네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주저앉을 만큼 놀랐다. 처참한 모습을 보니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우리가 살던 고중대 마을은 팔공산이라는 1150m되는 산의 중턱 650m지점에 있었다. 마을이라 해도 우리가 이사 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살지 않은 빈 동네였지만 산중턱에 넓게 자리잡은 마을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동네 앞산 절반이 잘려 나가버린 모습이었다. 그 앞산은 동네를 숨겨주는 산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동네를 찾을 수 없게 했다. 우리도 처음에 거길 찾아갔다가 그 산 때문에 두 번이나 허탕쳤던 적이 있었다. 걸어서 30분 걸리는 아랫마을까지 내려와 묻고 물어서 다시 찾았던 땅이었다. 고중대를 보호하고 숨겨주던 문지기인 앞산이 뚝 잘려 나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양 옆 산도 뒷산도 다 잘려 버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도로가 650고지되는 동네부터 산꼭대기 가까이까지 온 산을 빙빙 돌려서 사과깍듯이(그렇다. 사과깍듯이!!) 깍아서 포장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평생 거기 사셨다가 우리가 이사 가기 직전에 아랫동네로 내려가신 상투할아버지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이 귀에 쟁쟁거린다.“고중대는 말이야. 산 속에 숨겨진 명당이야. 세상의 중심이고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이지. 그리고 뒷산인 팔공산은 개고기 먹은 부정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성한 산이야. 그런 명당이고 명산이라 독충과 독사가 없고 산나물과 약초는 많아.”하시며 자랑하시곤 했다. 우린 상투할아버지를 따라 가끔 산에 들어 약초와 산나물을 배우곤 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믿음 때문인지 봄이면 새로 난 산나물에 맑은 술, 밥을 해서 지게에 지고는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셨다.

고중대는 그렇게 숨겨진 동네지만 일단 들어서면 사방에서 산들이 포근히 품어주는 넓고 안온한 터였다. 앞으로는 첩첩산이 양쪽으로 사열하듯 늘어서 있고 저 아래 맑은 저수지가 보였다. 그 너머 아득히 먼 곳에 높은 산이 보이는 전망이 확 트인 보기 드물게 좋은 땅이었다. 그 첩첩산 너머로 저녁 해가 지던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던 일이 아직도 어제 일인 듯하다.

그런 곳이 이젠 숨겨주던 문지기산도 잘려나가고 안아주던 너른 품 같던 양쪽 옆산과 뒷산도 다 잘려 나가버렸다. 더 이상 숨겨진 곳이 아니라 난달처럼 어디 몸 숨길 곳조차 없는 허허벌판, 난바다 같아져 버렸다. 동네에 서니 매서운 바람만이 세차게 불었다. 계곡가에서 발견한 새까만 염소똥이 반가왔는데 어디에도 염소는 보이지 않았다. 동네는 괴괴하여 인적 끓긴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집은 집터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도 바로 떠날 수 없어서 집터라고 여겨지는 곳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 멈추질 않았다. 누가, 이렇게 난도질해 놓았단 말인가? 대상도 모르는 사람에게 마구 분노가 치밀었다.‘이렇게 산을 죽여 놓고 당신들 제명대로 살 줄 알아? 잘 먹고 편히 살 수 있을 줄 알아?’하는 저주도 막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 산을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이 책임회피였을까? 지율스님처럼 100일 단식으로 지켜낼 용기도, 어느 분처럼 몇 백년 된 나무를 살리려고 나무위에서 시위를 할 용기도 없지 않았던가. 결국 목숨 걸고 산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 버린 것이라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용기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분들의 아픔만큼은 절절히 느껴진다. 집터 조금 옆에는 우리 집에서 뜯어낸 것 같은 삭은 나무기둥들이 쌓여있었다.‘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른 풀들만 서걱대고 있네. 뼈다귀처럼 삭은 나무들이 저렇게 버려져 있고! 저것들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삭아서 없어 질 테지!’참으로 무상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린 조릿대를 세 포기 캐 왔다. 고중대의 정표로 뭐라도 가지고 오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실감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조릿대를 손에 들고 있으니 그나마 그 곳과 연결되어 있는 듯해서 조금 진정이 되었다. 단풍나무 마른 잎 새도 몇 장 따 넣었다. 지나는 길목에 정들었던 나무며 억새풀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되돌아내려 왔다.

아랫동네로 내려와 보니 상투 할아버지네는 허물어진 지붕에 찢어진 비닐조각이 나부끼는 을씨년스런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셨구나. 저 산이 저토록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데 울화가 터져서 살 수나 있었을까. 나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듯이 고통스러운데. 평생을 저 산에 기대어 살아온 할아버지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남편은 내 맘을 알아챘는지 혹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지 나지막한 소리로 그 때 여길 떠난 게 신님의 수호였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신님이 다른 곳에다 데려가신 것이었어! 지금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데 아마 여기 살았다면 우리 둘 다 큰 병났을 거야! 생각할수록 신님이 미리 수호해 주신 것 같아. 정말 감사한 일이지!”혼잣말처럼 했다.

 

고중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다음날도 집에 가만히 있었다. 아침에 명상을 하는데 고중대가 다시 떠오르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중에는 통곡으로 변해서 엉엉 울었다. 무엇이 이토록 그곳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제행무상이라고. 이 세상 무엇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그곳이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변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도 왜 이렇게나 가슴 저미도록 아픈지.

고사리를 따러 다니던 숲이며 산죽을 베러 갔던 험한 골짜기, 오미자와 으름과 다래를 따던 계곡 위 언덕배기, 버려진 묵은 땅에 심은 듯이 나 있던 두릅 밭, 태풍에 쓰러져 잘 마른 커다란 나무 땔감 한그루를 둘이서 앞뒤로 둘러메고 기분좋게 노래하며 오던 산길, 아침이면 맑은 계곡물을 떠다 산신령님께 올리던 계곡가 바위, 걷기명상하기 좋은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던 아름다운 숲, 처음 보는 신기한 꽃들과 나무와 이야기하며 걷던 많은 산길들, 더덕이 수없이 자라던 야생상태에 가까웠던 구릉, 여름에 무슨 폭도처럼 시커멓게 몰려왔다 급히 북쪽으로 달려가는 먹구름을 누워서 신기해하며 보던 커다란 바위, 때때로 거기 앉아 명상에 들기도 하고, 동구 밖과 저녁노을을 바라보던 명상바위, 새벽이면 고사리를 따러 가는 우리와 먹이를 찾는 멧돼지가 숨바꼭질 하듯 번갈아 드나들었던 절골, 절골 가는 중간에 있던 숨어 흐르던 계곡, 그 계곡에 향기로운 은종꽃을 떨어뜨려 별천지를 만들어 주던 때죽나무숲, 메마른 겨울 숲에서 온갖 빛깔과 현란한 색으로 물들이던 봄 숲, 한 곳 한 곳 이름을 붙이고, 추억이 담긴 사랑했던 수많은 숲과 산길들.

그 모든 게 떠오르고 또 사라지고. 어제는 생각이 안 났던 수많은 숲과 골짜기가 한 곳, 한 곳씩 떠오를 때마다 통곡이 흘러 나왔다.“이제는 다 사라졌어. 이제는 없어. 어떻게 해.” 깊은 슬픔이 가시질 않아서 여러 날을 많이 힘겨워했다. 온 몸과 마음이 비실비실 어딘지도 모르게 시름시름 아팠다.

 

깊은 슬픔의 바다에 빠져있다 보니 슬픔의 밑바닥까지 닿았는지 일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나아졌다. 깊은 슬픔과 회한에서 조금씩 벗어나자 어버이신님의 너무나 자애로운 수호가 차츰차츰 드러나 보였다. 12장 근행을 올리며 문득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이로다.”하신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꽂혔다.‘지금 이 고통은 흐린 마음에서 오는 걸까? 흐린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집착이며,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 흐린 마음으로는 수호를 수호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거야. 신님은 맑게 갠 날과 같은 마음으로, 즐거움만으로 가득해야지 하셨는데.’

이렇게 한 순간 마음이 바뀌기 시작하니 마치 먹구름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마음에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렇다. 이이 말대로 그 때 그곳을 떠난 것이 수호였던 것이다.‘어버이신님께서는 우리가 그 고통 속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건져내 주셨구나! 보성에서도, 고중대에서도. 그런데도 나는 그 속에 빠져 죽겠노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거야. 떼를 쓰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거야!’그것을 깨달으니 무슨 영화를 보듯이저 죽을 줄도 모르고 억지를 쓰는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보였다. 얼마나 기막힌 장면인가? 죽을 길로 향해 뛰어들겠다고, 보내달라고 악을 쓰는 꼴이라니!

신님께서는 자비 가득한 어버이 마음으로 한없이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사랑하는 얘야!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그 곳은 사실은 고통의 수렁이란다. 앞을 보지 못하니 그렇게 떼를 쓰지. 보여 줄 수 있다면 정말 보여주고 싶구나. 그런데 넌 떼를 쓰느라 내가 주는 메시지를 바로 알아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구나! 한없이 안타깝고 안타깝구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다만 너를 지키면서 바라볼 수 밖에.”하셨을 신님을 느낀다.

무슨 면목으로 신님께 사죄를 드리나? 이렇게 철부지 아이같이 어리기만 하니.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