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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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없을까

 

최진만(부평포교소장)

 

교회 월차제가 끝나면 교회는 다시 정적에 잠긴다. 그렇다고 절간처럼 정서적 아늑함은 아니다. 2500년 전 힌두교는 미이라가 되었다. 계급을 나눈 성자는 제사를 지낼 뿐이었다. 인간의 고뇌와 근원적 삶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마음에서 점차 관심 밖으로 밀리면 역사 속에 쇠락 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유대교도 그랬다. 신의 숨결을 망각한 종교는 율법만 강조했던 것이다. 울타리 속에 갇힌 믿음은 의무감과 책임만 강조한다. 석가님은 자비를 설파 하시고, 예수님은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이웃을 사랑하고 베풀라하셨다. 천리교 교조님은 성진실로 남을 도우면 네가 도움 받는다.” 라고 하셨다. 그러나 기성종교도 신흥종교도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 빨간불이 켜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도 포교는 한계가 없겠지만, 보편적 짝사랑은 온도 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누구, 누구는 무슨, 무슨 죽을병 이였는데 생명을 수호 받았단다.’ 하던 그 때, 고솜하게 퍼지던 감동 드라마로 다시 옛날이 그립다. 치마폭마다 구수한 신앙의 냄새가 흘러 넘쳤다. 믿음의 물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같이 손으로 만져질 만큼 수호는 선명했다. 귀가 놀라고 눈으로 번쩍이는 그런 신앙이 어디로 갔을까? 전도포교에만 전념하는 어느 손길에서 신님의 수호로 기적이 일어났단다.’ 그런 뉴스가 듣고 싶다.

그리고 이런 지면을 통해 신기한 신님의 수호가 있다면 투고를 하여 함께 기뻐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이의 꿈과 희망이 될 것인가! 얼마나 자신감과 믿음의 신뢰와 행복한 대리만족이 있을까 말이다.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는 무거워 보인다. 어떻게 하면 젊게 하고, 밝게 하고, 즐겁게 하고, 웃음지게 관심을 이끌어 낼 것인가?

신의 노래이기에 창인으로 신악가를 부를 때 마다 진실을 다해보지만 어렵다. 하지만, 어버이신님과, 교조님과, 흥겨웁게 용솟음치며 교감을 하듯, 소리 내 불러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다. 우리도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자성의 목소리에도 스스로 귀를 열자.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기에 소외 된 길 잃은 양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언제 부턴가 우리는 우리라기보다 이기적 믿음에서 오는 진부한 느낌이 드는 게 나만의 생각일까?

21세기는 문화, 교육의 콘텐트에 코드를 맞추는 시대라고 한다. 얼마 전 부산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동인들이 고성에 문학기행을 갔다. 우리교회에도 방문하여 팔계명에 대한 교리도 전하고 함께 삼전 참배도 했다. 몇 분의 선생들은 진지한 나머지 고성 교회 회보를 다달이 부쳐 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리고 역사(役事)의 과정을 모르는 시인들은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 건축물과 내부 시설에 놀라워했다. 또한 이런 훌륭한 곳에서 시 낭송회도 갖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비 종교인과 타 종교인의 소통은 문화 교류가 유일한 통로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우리교회 어린이 고적대와 단식 및 죽음체험 수련회, 요가 등은 이 길을 알릴 수 있는 좋은 매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일간지 신문에 대안학교인기상승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대안학교란 서구의 얼터너티브 스쿨에서 나온 말로, 억압적이고 경쟁적인 입시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우며 자연친화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말한다. 사과나무학교, 아시아공동체학교, 꽃피는 학교, 우다다학교 등이다. 2001년부터 개교당시 9-12명부터 시작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현재 학교마다 50명 이상 학생들을 수용하여 인성 교육과 정규수업에 좋은 성과와 성적을 낸다는 기사였다. 우리도 교단 차원에서 이런 교육이라도 입안하여 즐거운 대안학교라도 설립 하면 어떨까? 아무튼 대안학교가 설립되는 그 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