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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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마음의 문을 열고

 

유상준(성진교회장)

 

우리들은 어버이신님의 수호로 대자연의 품에 안겨 아무런 댓가나 조건없이 무한대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움 속에서 부자유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자연에 은혜보답은커녕 온갖 생활 쓰레기로 자연을 오염시키고, 그도 모자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산과 들을 마구 훼손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사람과 사람끼리도 소통이 잘 되지 않고 꽉 막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천대시하는 풍토가 사회 저변에 쫙 깔려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모두는 자기중심적 이데오르기에 사로잡혀 나만 좋으면 남이야 어찌 되든 좋다고 하는 이기주의적 사상에 젖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천리교 교인 모두는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며 앞으로 앞으로 매진해 나아가야만 할 때이다. 인색한 마음에서 벗어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성진실한 마음으로 나누고 베풀어서 환골탈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때로는 불편도 따를 것이고,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당황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시행착오를 잘 이겨내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내 주위의 모든 것에는 밝은 빛이 새어나올 것이 아니겠는가.

 

물은 반드시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는 물을 결국 썩고 만다. 썩은 물은 악취만 풍길 뿐이다. 썩은 것은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고 쓰일 곳도 없다. 아무리 거대한 댐도 모여드는 물을 가두기만 하면 결국 수압으로 인해 둑이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대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수문을 잘 조절해서 물을 적절하게 흘러 보내야 만이 홍수기 때 문제가 없으며, 갈수기 때는 댐물을 아주 유용하게 잘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십전 수호의 리 중에 수기승강수호의 리를 보면 사람 몸에서는 먹고 마시고 내고 들이는 일, 세상에서는 수기의 오르내림을 수호하는 리라고 되어 있듯이 모든 것은 섭취, 소화, 흡수, 배출을 적절히 하여 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흐르고 있는가. 나눔과 베품이 있는가. 내 주위의 배고픔과 고통을 모르는 채 외면하고, 나만의 쾌락을 꿈꾸며 살고 있지는 않은 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입버릇처럼 베풀어야 하고, 감사함을 알아야 하고, 겸손 겸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실천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살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내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놓은 채 상대가 나에게 맞춰 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용재들은 다 잘 알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과감히 털어버리고,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교조모본의 길을 성진실한 마음으로 실천해야만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시대의 불교도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외고 몸소 행동하지 않을 때 골목안 꼬마한테서 만이 아니고 수많은 대중들로부터 날아오는 돌팔매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무소유중에서)

이것은 몇 십년 전 불교인에게 외친 소리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다.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소리는 아무에게도 감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돌팔매질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깊이 새겨들어야 하겠다.

내 자신이 깊이 반성하며 거듭 깨어나야겠다고 마음작정을 새로이 해 본다. 우리는 쉽게 말로만 친필속으로’ ‘우리도 교조님처럼하고 있지만 몸소 실천하는 용재가 되어야 하리라. ‘자기 수양을 거듭함으로써 남에게 미치자라는 교지의 말씀처럼 먼저 자기 자신이 수양을 거듭해서 상대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