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8월 부인회 신전강화

 

상급의 뜻과 시순에 맞추는 실천

 

 

김규수(성원교회장)

 

지금 천리교가 많이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감화내용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80년제 활동 때 열심히 해서 4년 만에 교회를 이룬 어느 선생님 이야기를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원남성교회보에 실린 글을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1961519일 나는 아내와 두 살 난 딸과 그리고 생후 2개월이 되는 장남을 거느리고 단독포교의 길에 올랐다. 포교의 동기로는 그해 12580년제의 활동이 시작되어 이 시순에 내 나름대로 무엇인가 결과를 얻고 싶었고, 또 신앙적으로 성인의 모습을 보여드려서 즐겁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 작정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교회에서 나고, 교회에서 자란 나로서는 교회 이외의 일에는 전연 무지하였다. 인간의 고뇌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단독 포교의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당시의 나로서는 교단의 모습이 교조님의 모본, 그리고 평소에 일러주신 가르침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초대선인들이 들려주는 일화 가운데 옛날의 이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단독포교의 생활고(生活苦), 또 고독한 투쟁 속에 교조님 모본의 길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길, 모본의 길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출발에 즈음하여 현재 상급회장인 아버지께서는

단독포교라는 것은 나날이 전쟁이다. 그리고 한그루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지 끝과 같은 것이다. 가지 끝에는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뿌리에 거름을 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작은 진실일지라도 첫째 상급에 헌공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또 우리 집의 초대인 조모님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포교하는 데 짐이 되리라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오히려 아이들이 길잡이가 되느니라.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다고 하시며 자신이 최초의 단독포교때에는 네 아이를, 그리고 두 번째 단독포교 때에는 여덟명의 아이를 데리고 포교하신 경험에서 오는 굳세고 자신에 찬 말씀을 선물로 주셨다.

그런 격려를 받고 용약 출발하였던 것이다. 당도한 곳은 이층집의 아래층 단칸방이었다. 저녁이 되면 밥을 달라고 졸라대는 딸아이 울음소리와 장래에 대한 생활의 불안, 또 어버이로서 자식에 대한 정으로 측은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때 옆집 아주머니가 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가져와서

당신네들 어른은 괜찮지만 아이들이 가엾다면서 매일 갖다 주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먼저 우장을 갖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하는 교조님의 말씀과 또 조모님께서 자신에 찬 말씀이 이때처럼 마음에 깊이 새겨진 적은 없었다. 그 아주머니는 그 후 별석까지 받게 되었다.

포교 나온 지 일주일 쯤 되었을 때 수훈을 전해 준 어떤 분이 사례로 과일 한 광주리를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가지 끝에 도움한줄기의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작은 진실이라도 상급에 헌공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 과일 광주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상급 신님께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여비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것이 매월 아버지는 터전에 가시는 데 내일이 그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내는 네 시에 일어나 아기를 들쳐 업고 한 손에는 과일 광주리를 들고 한손에는 기저귀 가방을 들고 역 대합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겨우 아버지를 만나 광주를 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지금까지 산하교회에서 또 신자들로부터 신님께 헌공해 달라고 몇 십만, 몇 백만의 돈을 받아왔지만 지금 네가 내놓은 이 과일과 리의 즐거움은 그 몇 배, 몇 십 배의 것이다하시며 손을 꼭 쥐어 주시더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아들의 진실을 몇 십 배로 높이 받아주신 어버이마음이야말로 단독 포교의 커다란 활력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자식이 귀엽지 않은 부모는 없으리라. 그래서 자식들이 단독 포교하느라 심신이 고생스러울 것이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 정을 주고 자비를 베풀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자식으로서도 괴로움이 거듭되면 정에 흘러 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지 끝에 거름을 주면 썩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대단히 엄중하셨다.

포교 나간 지 두 달 째의 일이다. 때마침 청년회 히노끼싱에 교회에서 열명쯤 데리고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단독포교 중이라 이번만은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 까 하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아내와 어린 것들을 두고 한 달 동안 비울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자다운 신자도 하나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처와 아이를 두고 간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용서하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출발 전야에 아내에게 단독포교사가 그럴 틈이 어디 있느냐, 바삐 가라고 호령하셨다. 대꾸 한마디도 없이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서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앞세우고 해서 교회 정문을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눈물어린 눈으로 배웅할 때, 이길을 걷는 엄숙함과 어려움을 절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선인들이 걸었던 길, 선인께서 깨달았던 깨달음을 그 주옥같은 경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는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 달의 히노끼싱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이웃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붓하게 담소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눈물 속에 보고 인간 생각의 그릇됨, 거기에 비해 터전에 심어진 음덕에 대한 신님의 수호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달았다.

이 집과의 친분이 인연이 되어 이웃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훗날 교회 설립 때에는 수양과 강습에도 가 주었고, 현재도 교회의 손발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전도 구제의 어려움은 모든 용목이 하나같이 겪는 일이다. 우리들도 역시 그 당시에는 그러한 용목들과 다름없이 아내와 동서로 갈라져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성과는 전혀 없고 하여 때로는 마음이 위축되어 이지러질 때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교회 생활이 그립고,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럴 때 지금은 돌아가신 이와다 선생으로부터 격려의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와다 선생이 단독포교를 나갈 때의 선물로써 미야모리 선생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쓰여 있었다.

[집안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걷고 걷고 또 걸어가면 개도 막대기도 걸린다. 이와다가 오사까 거리를 너무 걸었기 때문에 흙이 닳아 없어졌다는 말을 들을 만큼 걸어보아라. 너무 걸었기 때문에 신발도 없어지고 발바닥도 없는 놈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이와다도 이럭저럭 하고 있구나 하고 나는 안심할 것이다. 힘껏 하여라. 단 한사람, 혼자라도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 만큼 신님의 덕을 주시는 것이다. 남의 힘을 빌리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은 비겁하다, 어떠한 출세도 너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다.]

자식이 귀엽지 않은 부모는 없다. 자식의 출세를 원하지 않는 부모도 없다. 후계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우리 부부가 단독포교로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만큼 많은 사람의 기대와 기원이 깃들어 있는지, 하루 빨리 성인하여 하나의 표적을 보여 드려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렇게 생각한 우리들은 다음 날로부터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마을의 청소 히노끼싱을 시작하였다. ‘이 마을에 구제의 길로 나온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고서는 죄송스럽다’ ‘어느 것 하나라도 마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하자는 생각에서 히노끼싱을 열심히 하였다. 수일이 지나서였다. 어떤 부인이 찾아왔다. “실은 댁 건너편에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저의 딸애가 소아마비로 누워 있습니다. 항시 누워있어서 그런지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그 딸애가 말하기로 요즘 아침마다 길을 쓰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을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이웃에 물어보았더니 아마 천리교 포교를 하는 분이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딸애를 좀 만나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즉시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이 애가 수호를 받으려면 이 세상을 창조해 주시고, 세상을 두루 보살펴 주시는 이버이신님을 믿고 의지하는 길 이외는 없다고 단언하고 수훈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아가씨를 터전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긴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시중들기, 본부참배, 별석, 어떤 때는 등에 없고, 어떤 때는 안고, 정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음은 활짝 개여 즐겁고 감격스럽다.

나는 이렇게 해서 초석 제1호를 수호받은 후로는 차례차례로 길이 트여 그해 1221일 신님을 모셨을 때에는 34명의 신자들이 참배해 주시고 방에 다 들어갈 수 없어서 많은 분들이 밖에서 근행을 볼 정도가 되었다.

단독포교를 나갈 때 우리들은 교회를 수호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만 부모에게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성인을 해야겠다는 염원뿐이었다. 교조 80년제의 거룩한 시순에 무엇인가 경험을 쌓고 싶다. 이러한 마음으로 나선 우리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지시가 내렸다.

19641월 포교소 개설, 그리고 27일 상급교회에 당시 구제위원장이시던 진주님이 왕림하셔서 젊은 우리들이 단독포교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하시고 모처럼 내친 걸음이니 80년제까지 교회 설립의 수호를 받도록 더욱 정성을 기울이도록.”이란 말씀을 주셨다. 그런데 상급의 아버지는

구제위원장의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다. 어떻든지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해 보아라. 그리고 또 너희들이 수호받는 교회는 헌집이서는 안 돼, 먼저 토지를 구하도록, 그리고 신전건축이다.”하고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 주셨다.

그로부터 1년 반, 토지 구하기 또 신축역사, 그리고 별석자, 수양과생 강습생을 수호받기 위해 침식을 잊고 매일이 전쟁같은 나날이었다. 마음 작정대로 1965102642평의 신전건축을 완성하여 기어코 교회설립을 본 것이다.

교회에서 나고 교회에서 자란 나로서 이렇다 할 신상도 사정도 없이 행복한 환경 속에서 구도는 어려웠고, 오히려 비판하고 교회에서 태어나게 된 것을 혐오마저 느끼고 있었던 자신의 방자함을 교회에서 나와 보고 처음으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절실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진실에 대한 즐거움, 신자에 대한 고마움, 그보다 더한 것은 음으로 양으로 항상 염려하여 지도해 주신 이친, 이길의 선배님들의 고마움을 통절히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교조 80년제에 활동의 시순이 있었기에 작은 씨앗도 꽃이 피고 교회라는 열매가 맺었던 것을 생각할 때, 시순의 중요함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나에게 포교의 천재라든가, 구제의 명인이라든가 하는 말은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다. 또 인내도 남보다 오히려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우리들이 단독포교 4년 남짓해서 교회 설립의 수호를 보여주신 것은 역시 부모님들의 음덕과 선배님들의 후계자에 대한 축원,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지며, 후계자 되는 사람은 모름지기 한번은 단독포교에 나가야만 스스로 이길의 멋진 슬기로움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입니다. 이글은 제가 자주 읽으며 마음을 추스르는 글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하고 읽어 드렸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잔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집에서 술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쌀뜨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영문을 모르고 막걸리인 줄 알고 마셔보니 맛이 없었습니다. 쌀뜨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색깔이 같으니까 나 하나쯤이야 쌀뜨물을 가져가도 되겠지 싶어서 다들 술 대신에 쌀뜨물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상급회장님께서는 원단제때 올해 교회목표의 하나로 수훈전하기 1만번이라고 발표하셨습니다. 지난달에 수훈전하기 실적을 보니 상반기가 지났는데도 3천회 정도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적은 걸 보고 나와 여러분 모두가 쌀뜨물을 가져온 그 마을 사람 심정이지 않았나 싶어서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산하 용재 두 명과 의논을 했습니다.

장거리 도보 실천을 하는 것도 좋지만 수훈을 많이 전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독교와 천리교의 다른 점은 상급이 있는 게 아니겠나... 천리교는 상급을 신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상급의 말씀이 지도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원단에 말씀하신 상급의 목표 수훈 1만번 전하기를 지도말씀으로 생각해서 상급의 뜻에 따라 활동을 하자. 지금 시순이 그런 시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정한 장거리 도보가 곧 끝날 것이고, 두 사람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 일단 나는 장거리 도보실천을 마저 곧 끝내고 수훈전하기에 매진할 거니까, 우선 두 명은 장거리 도보실천을 중단하고 수훈을 많이 전하는 쪽으로 실천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교회라도 신앙의 초대가 있습니다. 초대가 있어서 2대가 있고 3대가 있습니다. 초대가 신앙을 한 길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나는 초대로 30년 동안 신앙을 해 왔지만 다른 교회의 초대들처럼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2, 3대가 신앙하는 것은 초대처럼 절박하지가 않습니다. 가업이니까 이어받고, 건강이나 행복을 수호받기 위해 신앙을 하고 있지만 초대는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절박하고 진실한 신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초대정신을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목숨을 건 초대정신을 이어받아 저나 여러분이나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노력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날짜
28 [174년02월]정성의 마음으로-이상봉 2012.06.11
27 [174년01월]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의 차이-정선일 2012.06.11
26 [173년11월]5푼 5푼으로 더 성인하여 나아가자 - 이상봉 2012.07.10
25 [173년10월]전(前) 진주님이 오신 감사한 수호 - 최정욱 2012.07.10
24 [173년10월]인생 적자를 면하자 - 유병희 2012.07.10
» [173년09월]상급의 뜻과 시순에 맞추는 실천 - 김규수 2012.07.10
22 [173년08월]수훈 전하기에 두배의 노력을 - 김영진 2012.07.10
21 [173년07월]팀플레이를 갖춘 교회로 - 이상봉 2012.07.10
20 [173년05월]바보는 이길의 기둥 - 김위태 2012.07.10
19 [173년04월]가난에 빠진 교조님의 모본을 되새기자 - 배재기 2012.07.10
18 [173년03월]신앙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 김대경 2012.07.10
17 [173년02월]인간생각과 신님생각을 돌이켜 보는 시순 - 이상봉 2012.07.10
16 [173년02월]남을 도우려면 내 것을 버릴 줄 알아야 - 이상봉 2012.07.10
15 [173년01월] 172년12월 월차제 신전강화 - 이상봉 2012.04.11
14 [172년12월]십전수호의 리에서 살펴본 여성의 역할 - 오대원 2012.09.09
13 [172년11월]고생하지 않고서 즐거운 삶의 실현은 없다 - 이상봉 2012.09.09
12 [172년10월]욕심과 집착을 버려서 포도알처럼 - 이상봉 2012.09.09
11 [172년09월]은혜 보답의 길 - 김규수 2012.09.09
10 [172년08월]즐거운 삶 - 전인수 2012.09.09
9 [172년07월]행복의 조건 - 유상준 2012.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