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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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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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9

 

실천하면

김귀금(연지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초대회장님은 실천을 많이 하셔서 우리 한국 천리교에서도 실천으로서 아주 유명하신 분이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몇몇 교회장들 중에 한 분이기도 하다.

내가 존경하게 된 이유라 한다면 상급교회장에게 무조건 순직했던 모습에 있다. 우리들 보통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얼마든지 상급이 원하시는 대로 하지만 용재·신자마저 산하로서 리를 세우라고 하면 잘 순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런데 초대회장님은 고성교회의 그 누가 되었다 해도 원남성교회장이 원해 그 곳에서 신앙을 하게 되더라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점이 너무나 존경스러웠고, 그것은 우리들 보통 용재로서는 흉내 내기 어려운 실천이라 생각한다.

초대회장님은 상급이 사람도 올려라, 물질도 올려라.’ 하면 무조건 순직하게 하시는 그런 신앙인이었다. 상급에만 그렇게 하시지도 않으셨다.

그 때 부산에는 고성교회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 부산에서 신흥교회가 번창했었는데, 부산에서 고성교회까지 나오는 신자들에게 멀리 고성에까지 올 필요 없이 신흥교회에서 신앙하라.’고 하셨다.

고성근교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집 가까이에 있는 포교소에서 신앙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일부러 용재들에게 면소재지에 포교소를 개설하게끔 하셨다. 그리고서는 그 곳을 차츰차츰 그 지역의 포교 거점으로 삼으셨다.

그야말로 단독포교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자기 살을 떼어내어 산하를 키웠던 것이다. 니 산하 내 신자를 따지는 지금의 세태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영제(靈祭) 올린 돈을...

 

우리들은 소인이 되어서 신자들이 잘못하면 잘못한다고 나무라기도 하는데, 초대회장님은 상대가 아무리 어이가 없는 짓을 하고 얄궂은 짓을 해도 면전에서 잘못한다고 면박을 주는 일이 없으셨다.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마당에 초대회장님이 나와 계셨다. 어떤 분이 초대회장님께 다가와서는 회장님, 이번 영제에서 올라온 돈을 가지고 제가 그만 비료를 사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당시 신앙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쓸 돈이 따로 있제. 영제 모신 돈을 가지고 비료를 사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지하며 슬쩍 초대회장님의 눈치를 보았다.

초대회장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 같으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다른 곳으로 슬쩍 가셨다.

어떤 교회장이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난리가 나도 열두 번은 더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초대회장님

 

유병희(평화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초대회장님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는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상급교회장 앞에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죽은 목숨을 덤으로 살고 있는 처지라 더 그러 했을 것이다.

그리고 눈 마주치는 것조차 어렵고 힘들어 초대회장님을 바로 쳐다본 기억도 그다지 없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초대회장님이라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기억의 부스러기 밖에는 없다.

우선 초대회장님은 자그마한 키에 몸무게는 80킬로그램 정도로, 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나가 뚱뚱하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운동을 한 듯한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초대회장님께서는 포교를 작정하고는 제일 먼저 하신 것이 평소 그렇게 좋아 하시던 술을 끊으신 것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 포교라 하면, 먹거리도 흔하지 않았던 시대라 포교사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굶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초대회장님께서는 단식도 그다지 안하셨는데도 서너 집만 호별방문 전도를 해도 2개월 만에 4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이 길은 남을 도우려는 정성만 있으면 전도·구제에 더 이상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은 없다고 하시며 자기 자신의 마음의 즐거움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 모습을 본 신상·사정자들은 저절로 마음이 용솟음쳐 하루가 다르게 수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초대회장님께서는 포교를 시작하고서 단 한 번도 상급 월차제를 빠지지 않으셨다고 했다. 평소 이 길은 리의 길이기 때문에 부모가 출직하지 않은 이상은 상급 월차제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상급교회장 앞에서는 한 번도 옳고 그름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절대 순종을 하셨다. 왜 그런지 궁금해 누군가가 물었더니, “우리 가정에는 불효인연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 걱정만 끼쳤다.”고 하시며 상급에게 잘 하는 용재라야 이 길에서 성공(?)을 하는데, 삼천가지 죄 중에서 불효죄가 제일 크다고 하시며 불효인연만 끊어지면 여간 잘못한 일도 다 묻혀 진다.”고 하셨다.

또 아무리 사회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고 배움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상급에게 불평불만을 하며 자기 딴에는 전도에 애를 써도 신자가 모여들지 않고, 설사 신자가 온다 하더라도 옳은 신자가 되기 어렵다고 하셨다.

이 길은 오로지 처음도 끝도 계산 없는 히노끼싱과 바보 같은 신앙에다 용재의 임무인 전도·구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을 순교 때마다 강조하셨다.

 

친정아버지 같으신 어른

 

내가 포교를 하고 있던 그 시절, 김천에는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성천

이 있었다. 하루는 순교를 오셨다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초대회장님께서 느닷없이 구성천의 이쪽과 저쪽의 물을 돌려 막으면 수십만 평은 족히 되겠다.”며 관심을 보

이셨다.

그 이후로 순교를 오실 때마다 신자들을 이끌고 현장에까지 나가 사업설명(?)을 해

가며 흥미를 보이시다가, 나중에는 당시 군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오빠의 도움으로 조

금 막아보기도 했지만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 바람에 중도에 포기를 하고 말았다.

이 구성천은 그 뒤에 모() 건설회사가 초대회장님의 생각대로 물길을 막아 수십만 평의 부동산으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고 했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 초대 회장님은 우리들 범인(凡人)하고는 달리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틀림이 없구나, 참으로 큰 그릇이며 대인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자주 든다.

그리고 고성에서 김천까지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초대회장님께서는 김천을 자주 오

시지는 못했지만. 돌아가실 때는 친정아버지가 오셨다 가시는 것처럼 언제나 역전까지 배웅을 나갔다.

초대회장님께서는 열차에 타고서도 언제나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는데, 그 모습을 뒤로 하고서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그리움의 눈물이 솟아나곤 한다.

그리고 이 길은 신의 길이기 때문에 누가 비방·조롱을 하더라도 관여치 말고 신님께 기원을 드리면 답이 나온다고 하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성교회에서 신상자가 수양을 많이 하고 있을 때, 풍병에는 사람 뼈가루가 좋다고 누가 가져와서는 변소 천정에 그것을 꽂아 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졌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초대회장님께서는 신님전에 가서 기원을 한참동안 하시더니 저기에 있구나.”하며 벌떡 일어나가셨다. 우리도 초대회장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같이 나갔는데, 변소 뒤 밭에서 그것을 찾아 나오셨다.

나는 그때부터 기원을 하는 것을 배워 신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늘 기원 드리는 것을 꼭 잊지 않는다.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교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