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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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년08월] 인연자각 - 교회장

2024.07.29 14:50

편집실 조회 수:57

7월 월차제 신전강화

 

인연자각

 

 

교회장

 

 

오늘 7월 월차제를 맞이해서 근행을 올리게 되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잠시 한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4)

 

천리교를 신앙하는 우리는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연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네비게이션이 없을 시기에 운전할 때는 항상 지도를 보고 다녔습니다. 이 길로 가서 몇 번 국도를 타서 어디까지 간 다음 갈라지는 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항상 큰 지도책을 차에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더 그랬습니다. 그러다 2000년 정도 들어오고부터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고부터는 모르는 길, 처음 가는 길도 네비게이션을 이용해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기본 원리는, 네비게이션에 GPS가 달려 있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기술을 이용한 것입니다. 나의 지금 위치를 알아야 어디로 갈 것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사는 목적지로 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인연 자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서 있는 위치가 다릅니다. 절대로 같은 장소가 아닙니다. ‘나는 자식들이 잘되는 목적지를 가려고 한다.’, ‘나는 사업이 잘되는 길로 가려고 한다.’, ‘나는 지금 앓고 있는 병이 잘 낫는 데로 가려고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뭉뚱그려서 즐겁게 산다고 하지만 사람마다 그 목적지는 다릅니다. 그걸 통합해서 우리가 즐거운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기 위해 찾아봤더니 해발 1,000m가 되는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합시다. 그 산을 넘지 않으면 목적지에 갈 수 없다고 하면 그 산을 넘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혹시 다른 길이 없나 찾아봐도 그 산을 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지 못하고 가면 계속 헤매고, 편한 길이 어디 없을까 하고 찾아보겠지만, 결국에는 그 산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비유하면, 인연을 자각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행을 위해서는 인연의 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연이라고 하면 천리교에서 인연이 지중하다.’, ‘인연이 안 좋아서...’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인연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리교에서는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인연이라는 의미는 인연이라는 것은 마음의 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마음 그대로 어버이신님이 수호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써온 마음 그대로 수호해주시기 때문에 거기에 좋고 나쁜 의미는 없는 겁니다. 어버이신님이 활동해주시는 것이 인연의 리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어버이신님이 우리에게 마음의 자유를 줬기 때문에 마음을 쓰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인연의 의미를 풀어서 이야기하면, ‘()’은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고, ‘()’은 밭, 못자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뒷마당에도 밭이 있습니다. 거기에 배추씨를 심으면 배추가 나고, 무씨를 심으면 무가 나겠죠. 그것이 씨앗입니다. 무엇이 될지 결정되는 것입니다.

밭은 그 씨앗이 무엇이 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수확이 좋을지 안 좋을지는 밭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감자나 고구마는 척박한 땅에 심어야 열매가 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감자나 고구마를 기름진 밭에 심으면 도리어 작황이 안 좋다고 합니다. 밭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씨앗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못자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안 좋은 말을 듣더라도 나에게 좋도록 받아들인다.’는 것이 밭의 리입니다. 밭의 리가 부족한 사람들은 무엇이든 안 좋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모처럼 좋은 씨앗을 심어놔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보면 씨앗과 못자리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씨앗의 마음, 못자리의 마음으로 현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연의 자각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으뜸인 인연입니다. 어버이신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심어놓은 으뜸인 인연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인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버이신님의 자녀로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으뜸인 인연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안 좋은 동네에 사는 것을 비하하는 등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뉴스에도 나오긴 하는데, 개근거지라는 말도 나옵니다. 너는 못 살아서 해외에도 못 간다는 겁니다. 요즘은 부모들이 학생들 학기 중에도 체험활동을 내서 해외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외에 갈 형편이 못 돼서 개근상을 받는다고 해서 개근거지라고 비하해서 놀린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별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못살고 게으르다고요. 그런 것들이 모두 어버이신님의 으뜸인 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자기식대로 판단해서 너는 불행한 사람이다.’, ‘너는 그렇게밖에 못사나.’라고 하는 것들이 모두 인연을 짓는 행동입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 이 길에서 용재는 으뜸인 인연을 자각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즐겁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생각에서 구제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힘들고, 병든 사람들을 구제하는 처지에서 함부로 남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게을러서 그렇게밖에 못 산다든지, 후진국에서 와서 저것밖에 안 된다든지. 하는 식의 시각으로 사람을 봐서는 구제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누구든지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용재로서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개개인의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버이신님에게서 육체를 빌려 받았습니다. 내 혼은 그대로인데 수없는 환생을 거듭하면서 육체를 돌려드리고 다시 빌려 받아서 살고, 살아오는 생을 거듭하면서 우리가 써온 마음씨나 행동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개개인의 인연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친필에도

부모자식간 부부간 형제간이라도

모두 각각으로 마음 다른 거야 5-8

라고 했습니다.

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도 같은 인연이 아니고 전부 다른 인연입니다. 부부가 될 인연이 있어서 맺어졌고, 부모자식이 될 인연이 있어서 맺어졌고, 형제가 될 인연이 있어서 맺어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구성원이 모두 인연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와 나의 인연이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연이 있어서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게 되는 것은 전생에 인연이 있어서 만나게 된다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친필 1호 마지막 구절에 보면,

전생 인연 모아서 수호한다

이것으로 영원히 확실하게 다스려진다 1-74

우리의 현 위치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인연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모습뿐 아니라 전생인연을 자각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버이신님이 전생의 인연을 살펴봐서 부부, 부모자식, 형제로서, 가족으로서 만나게 해서 너희들끼리 만나서 잘살아 봐라 하는 가르침으로 맺어주신 것입니다.

전생인연의 자각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나.’ 하고 부모를 탓하고 이런 애먹이는 자식 때문에 고생을 한다.’, ‘재수가 없어서 이런 남편에게...’, ‘이런 부인을 만나서 고생을 한다.’ 하고 남을 탓하는 것은 전생부터 와졌다고 하는 현재 위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네비게이션 없이 자기의 현재 위치를 모르고 헤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가족에 대해서 원망하고 부족을 한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휩싸인 사람들은 목적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전생인연의 자각이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전생인연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이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조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전생인연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으면 누구나 백주 대낮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것이 즐겁게 사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어버이신님이 가려놨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에 세상은 모두 거울이다. 인간은 모두 환생을 거듭하면서 마음 그대로 몸에 비추고 있으므로 이것을 잘 분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거울이다. 라는 말은, 세상에 태어나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내 안의 전생을 비추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 부부, 배우자 간에, 가족들 안에 다 비추고 있으므로, 이런 남편을, 이런 시어머니를, 이런 자식을 만나게 됐나 하는 것들이 모두 전생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전생인연 그대로 몸에 비춰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족, 친척, 친한 이웃, 학교 친구들, 직장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전생인연의 모습들이 조금씩 비추고 있는 겁니다. 그 되어 오는 모습들 가운데 전생인연이 비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생, 금생, 내생이라고 해도 애매모호합니다. 이것을 쉽게 비유해서 말하자면, 어제, 오늘, 내일로 압축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세상에서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10만 원을 줍니다. 10만 원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누가 1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어제 빌려 간 돈 10만 원을 내놓으라며 그 돈을 뺏어가는 겁니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뺏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 빌려준 돈 10만 원을 다시 받아 가는 것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제 10만 원을 빌린 게 맞습니다. 그럼 그날은 0원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게 힘든 겁니다. 그러면 또, 10만 원을 빌리게 됩니다. 0원으로 살려니 힘들다고 생각해서 다시 10만 원을 빌리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하루를 0원으로 버티고 나면 내일은 빌린 돈을 받으러 올 사람이 없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전생, 금생, 내생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오늘 나에게 어제 진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은 대단히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늘 그 사람이 돈을 받아 가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오늘 다시 10만 원을 받아서 오전에 다 써버리고 오후에 또 10만 원을 빌려서 써버릴 겁니다. 그럼 내일은 10만 원이 덧붙어서 20만 원의 빚으로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루하루 반복되면서 빚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것에 빗대어 교조님께서는 나쁜 버릇, 성품을 고치라고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버릇, 성품이 우리의 장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처음과 같이 어제 진 빚 10만 원을 받으러 온 사람 덕분에 아무것도 없이 하루를 시작했지만, 내일이 되면, 그 빌리는 버릇, 성품이 없어지면 내일부터는 정상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누가 10만 원을 주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 잘 빌려 썼다고 하면서요. 그런 사람은 원래 그런 좋은 버릇,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돈을 잘 아껴서 살고, 곤란한 사람이 돈을 빌리게 되면 내일도 돈을 돌려주는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내일은 30만 원을 가지고 출발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압축해서 설명한 겁니다. 세상은 절대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어버이신님이 모두 마음 그대로, 마음과 행동으로 뿌린 씨앗 그대로, 받아서 자라난 씨앗 그대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단노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만족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하면 바로 전생인연이 납소되는 겁니다. 이런 걸 모르고 왜 나한테 돈을 뺏어가느냐, 억울하다.’ 하면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 가운데 단노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무일푼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안 되는 가운데 단노하는 것이 참된 단노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알고 있으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노력해보는 겁니다. 그게 바른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지 않은 인연을 납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씨앗의 리로부터 말씀드리자면, 좋지 않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인연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탐, 분노, 욕심, 교만, 인색, 편애, 미움, 원망 등 여덟 가지 티끌이 좋지 않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못자리의 리로 말씀드리자면, 밭이 황폐해져서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면 거름을 뿌려야 하겠지요. 밭이 황폐해져 농사가 되지 않는 모습이 덕이 없는 모습입니다. 덕이 없는 모습으로 있으므로 어떤 씨앗을 뿌려도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쁜 씨앗을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조님께서는 이것을 모본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보여주셨느냐면, 교조님이 월일의 현신이 되신 이래 16년 동안 나카야마가의 재산을 없애는 데 힘을 쓰셨습니다. 재산이 많아서 그것을 모두 없애는 데 16년이 걸린 겁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 16년 동안 없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나서 그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신이라고 존경받았겠습니까. 정반대의 말을 들었습니다. 미쳤다, 여우에 홀렸다, 귀신이 씌웠다. 등 비난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카야마가의 좋지 않은 씨앗을 없앴다고 했습니다. 비난받고, 조롱받으면서 나쁜 씨앗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지도말씀에도 보면

돌 위에 씨앗을 둔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린다, 새가 와서 쪼아 버린다. 싹트지않는다. 마음에서 진실로 뿌린 씨앗은 묻혀 있다. 괭이로 파헤쳐도 거기서 트지 않더라도 다른 데서 튼다. (1890. 9. 30)

안 좋은 씨앗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남에게 칭찬을 들어서는 어떤 덕도 그 자리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좋은 일을 남에게 칭찬과 칭송을 받고 박수를 받으면 자신이 모처럼 쌓은 덕도 모두 없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안 보는 데서 남 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성을 내지 말고 자기의 안 좋은 인연을 없애준다고 생각해서, ‘맞다. 그렇다.’ 하고 좋은 마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대놓고 성을 내면서 내가 언제 그랬냐.” 하고 달려들고 따지고 하면 악인연이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교조님은 그런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나카야마가의 안 좋은 씨앗은, 욕도 먹고 비난도 받으면서 없어졌기 때문에 앞으로는 세계구제의 기초가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이 없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비난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은 나의 나쁜 인연을 가져가 주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안 좋은 인연을 없애주는 사람 등 뒤에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칭찬해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만 쫓아다니면 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인연을 가꾸기 위한 마음을 정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고생이 좀 이어지더라도 거울처럼 비춰지는 세상의 모습들을, 내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싹튼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도 참 감사하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씨앗을 뿌릴 때는 신악가 제11장 둘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부부가 합심하여 히노끼싱

이것이 첫째가는 근원이 된다

부부가 합심하여 히노끼싱, 신에 대한 은혜보답을 하는 것이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 됩니다. 부부가 아니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가족 안에 마음 맞는 사람 둘이면 상관없습니다. 굳이 부부가 아니어도 됩니다. 부모자식 둘이어도 괜찮습니다. 신님 은혜에 보답하면서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밭이 황폐해져서 좋은 씨앗을 뿌려도 잘 자라지 않는, , 덕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름을 줘야 합니다.

신악가 제11장 넷에

사욕을 저버리고 히노끼싱

이것이 첫째가는 거름이 된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쨌든 씨앗을 뿌리는 것도, 밭에 거름을 하는 것도 히노끼싱이 중요합니다. 인연을 납소하고 덕을 쌓는 기본은 히노끼싱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겁니다. 별석 말씀에도 다하는 리, 나르는 리에 의해서 인연을 끊어주신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하는 리, 나르는 리를 계속해나가는 것도 히노끼싱입니다. 인연을 끊기 위해서 하는 히노끼싱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 어버이신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히노끼싱은 구제하는 히노끼싱입니다.

친필에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을 할지라도

남을 구제할 마음이 없으므로 12-90

이제부터는 월일 부탁이야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바꿔 다오 12-91

교조님께서 항상 남을 도우라, 남을 구제하라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어버이신님이 친필에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돕는 마음, 구제하는 마음으로 바꿔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어떠한 복잡한 과정도 모두 생략하고 좋지 않은 인연을 납소하고 좋은 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을 수호해주신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각자 전생인연도 자각하면서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연자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죽을 때까지 인연자각을 해야만 지금 나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있어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을 돕는 마음을 낸다면 어렵고 복잡한 과정 없이 어버이신님께서 좋지 않은 인연을 끊어주시고 덕을 쌓을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게 해줍니다.

뿌려놓은 씨앗은 모두 싹튼다. 우리 눈에 비추는 이 세상의 모습은 모두 나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하신 것처럼 교조140년제를 향한 연제활동에 있어서 교조님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의 기본 토대를 다시 마음에 잘 새겨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교조님 연제시순에는 우리 주위에 여러 가지 사정이나 마디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들도 모두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이런 것에서도 우리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는 인연자각을 나름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담겨 있는 신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알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각자가 즐거운 삶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마음을 바꿔서 마음 역사의 노력을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