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8월 월차제 신전강화

 

신상으로 감사함을 깨우칩니다

 

최영철(문산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다고 했습니다만, 진주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조금 왔었는데 고성에는 아직 비가 오지 않고 있네요. 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이 오셔서 함께 즐겁게 8월의 월차제 근행을 올릴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지명을 받았기에 제 소임을 다할까 합니다. 끝까지 경청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4)

 

고관절 신상

 

그동안 무더운 날씨 속에 일선에서 구제활동 하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어느덧 전반기를 지나 후반기에 들어서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새해 들어 뭘 했는지조차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를 핑계 삼아 허송세월만 하다가 방역체계가 조금 느슨해져 이제는 그동안 움츠렸던 마음의 날개를 펴고 활동을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자 뜻하지 않게 한쪽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잘 지나가겠지 했는데 조금 심한 것 같아 예전에 진료한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문의를 했더니, CT를 찍어 보시고는 고관절이 많이 상했다고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처음 오른쪽 관절을 수술할 때는 시기를 너무 늦추어 고생을 엄청나게 하고 수술을 받았기에 이번에 왼쪽은 어차피 수술받아야 할 것 같으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우리 교회 월차제를 마치고 곧장 수술 날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수술은 4년 이전입니다. 그때는 전문병원에서 한쪽은 수술하고, 한쪽은 시술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대학병원에 가니 시술은 안 해도 된다기에 그냥 지나쳤는데 세월이 가니 결국 한쪽마저 해야 했습니다.

수술 날짜 잡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저기 제일 날짜가 걸려 모두 한 달씩만 빠지면 되겠다 싶어 우리 교회 월차제를 보고 곧바로 입원했습니다. 입원한 그 날 사진 촬영장에 앉아 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한쪽 다리를 절며 들어오는데 집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다리가 아프신가 봅니다.” 하니 고관절 수술을 하러 왔다며 저도 그렇다고 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입원실로 갔는데 같은 층이지만 호실이 달랐습니다. 그분은 합천 삼가에 사시는데 몇 달 전에 예약을 해 겨우 입원 날을 받았다며 하소연을 하며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어디에 사시며 직업이 무엇인지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천리교회를 운영한다니까 그분 말씀이 고성교회 기와를 이었다고 하기에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전도청이며 태종대도 했다고 하여 더욱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처음이라 많이 불안해하기에 한 번 먼저 해본 경험자라 많은 도움 될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참으로 담담했습니다. 나도 그분처럼 처음에는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며 어디서 수술을 할까 하며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심정 이해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 아침이 되어 곽사장이란 분이 첫 번째 들어가고 저는 두 번째로 들어갔습니다. 예전에는 수술실이 관절센터 바로 밑층에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폐쇄되었다며 본관 쪽으로 한참을 실려 갔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문 몇 군데를 지나 들어서니 냉기가 확 몰려왔습니다. 천장에는 흔히 TV에서 본 그대로 불빛이 요란하며 수술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집도할 교수님이 들어서니 일사불란하게들 움직여 나를 수술대로 옮겨 꼼짝 못 하게 두 손을 묶고 준비를 마쳤는지 , 지금 마취가 들어갑니다.” 하더니 척추에다 몇 번을 주사를 주었습니다. 어느 사이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술대가 옛날과는 달리 옆으로 누워있는데 옆구리가 얼마나 아픈지 온통 그쪽에 신경이 다 쏠렸습니다. 수술대가 몸 전체를 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절반만 받치고 엉덩이는 바로 되어있어 갈비뼈가 얼마나 아팠는지 하체에는 아예 감각이 없었습니다.

요란한 톱 소리, 징 소리 거기다 망치로 얼마나 힘껏 치는지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몸이 들썩거렸습니다. 예전에는 12장 근행을 2번 보고 끝마치더니 이번에도 2번을 보면 마치겠지 했는데 한참을 지나도 끝이 안 났습니다. 옆구리도 아프고 해서 간호사에게 아직 멀었는지 물어보니 20분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면을 시킬까요. 하고 물어보았으나 아니요. 참아보겠습니다. 좀 따뜻하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연신 얼굴에 덮인 보자기 속에서 따뜻한 바람을 넣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니 엉덩이 쪽에서 따끔한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 실밥을 꿰매는 느낌이 왔습니다. 한 겹, 두 겹, 세 겹, 2시간 정도 되니 마취가 풀리자 콕콕 찌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났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마취 깨는 대기실에서 한참을 있다가 호실로 왔는데 큰 통증은 못 느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는 밤에 헛소리도 하고 섬망증도 왔는데 이번에도 그럴까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도 주입을 안 하고, 통증도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누워서 몇 번의 근행을 보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밤에도 큰 통증은 없었습니다.

어버이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술받는 내내 이번에는 섬망증에 안 걸려야지 하면서 얼마나 용을 썼는지 모릅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아침 420분이면 꼭 잠에서 깹니다. 휴대폰으로 집에 상황을 보고, 함께 청소하고, 함께 근행 보며 매일같이 상상 속에서 터전에 가서 한 바퀴 돌며 참배도 하고 근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카메라가 연결되어있어 근행 보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늘 그 시간이면 함께했습니다.

 

팔의 신상

 

12장 근행은 교회장 임명을 받고부터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의 빠지지 않고 보아온 덕분에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인연이 지중한가 보다.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나들며 온몸을 칼로써 난도질해야 했으며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마저 수술을 해야 한다니. 모 회장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시원찮은 것인지 이렇게 마디를 많이 겪을까. 그래도 어느 회장님께서는 그나마 신님 수호란다. 잘못 넘어져 머리라도 깨졌으면 어쩔 것인가. 하기야 대난은 소난이라 했던가. 상급에서 신찬실 일 보다가 그랬으니 신님께서 많이 봐주신 거겠지. 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게 우리 용재가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보다 먼저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관절은 2주면 걸을 수라도 있지만, 팔은 몇 달을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니 남부끄러울 일이었습니다. 고성이며, 전도청이며, 또 교구는 어쩔까 하고요. 이젠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수술한다 해도 모두가 알게 될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자 이게 내 결론이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요. 신님께서 다듬어서 새롭게 쓰려고 하는데 그래도 바로 신님 품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자. 덤으로 사는 세상 아닌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걱정을 안겨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걱정해주고 염려해주시는 주위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보답을 할까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수술 후에 재활을 받지 않고 집에서 재활 겸 운동으로 대체하기 위해 수술 2주 만에 퇴원해 집에 오니,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일거리였습니다.

와송밭을 둘러보니 가뭄이 지속되어 작물은 크지 않고 시들었고, 잡초만 자라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이니, 집사람은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돌보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하루 이틀 조금씩 적응하며 계단 오르는 게 힘들었지만, 우리 교회는 의자가 놓여있어 근행 보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춤은 도는 동작이 안 되어 넘어질까 그냥 서서 하기도 하고 이렇게 고군분투 열심히 근행을 보며 걷고 운동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고관절 수술한 곳은 자연스럽게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회복이 되어갔습니다.

이제 팔 수술이 남았습니다. 팔 수술하기 전에 할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당분간 병원 신세를 진다 생각하니 내가 처리해 놓을 일이 많았습니다. 가뭄 끝에 비가 온다기에 와송밭에 거름을 한 줌씩 주고 잡초도 뽑고 운동한다 생각하고 시원찮은 몸으로 빠지지 않게 주고 나니 다음날 모처럼의 단비가 내렸습니다. 얼마 만에 내리는 비였는지 비가 그치고 한 바퀴 돌아보니 모든 작물이 생기를 얻어 방끗 웃고 있었습니다.

수술 가기 전에 자전거 도로에 금잔화 꽃씨를 뿌려놓았는데 한번 둘러보니 자갈밭이라 가뭄 끝에 모두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의 화단에 많이 나 있는 금잔화 꽃을 뽑아 와송밭 양 코너와 자전거 도로에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의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제법 많은 양의 꽃을 심었습니다. 앞으로 꽃이 피면 이 도로로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아픔도 잊었습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물도 주어야 하고, 많은 손길이 가고 힘도 들지만, 지도말씀에

모두들을 용솟음치게 해야만 참된 즐거움이라 한다. (1897. 12. 11)

라고 했던가요. 내가 행하고 있는 이것도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하는 히노끼싱이다. 하고 생각하니 즐거웠습니다. 수술 후에 한 달 만에 병원에 고관절 수술 경과를 보러 갔더니 이상 없이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를 알아보는 간호사가 이렇게 빨리 회복되는 사람이 드물다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팔 수술 날짜를 713일로 정하고 병원에 입원 날짜를 잡고 보니 병원 가기 전에 해놓고 가야 할 일들이 또 많아졌습니다. 교회에 거주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몸도 완쾌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라며 걱정들을 많이 하십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재활 운동이라고 생각하니 아픔도 잊은 채 즐겁게 뭐든 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팔 수술 날이 되었습니다. 전신마취를 한다는 말에 걱정할 건 없었습니다. 언제 한지도 모르게 수술은 끝나 있었고 마취에서 깨어나니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으며 고관절 수술 때보다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래도 3, 4일 참고 지나니 견딜만했습니다. 어깨에 구멍을 5개 뚫고 내시경으로 수술을 하였기에 실밥 빼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삿바늘을 빼고 나니 살 것만 같았습니다.

크게 할 일도 없고 해서 담당교수님께 퇴원해도 안 되는지 여쭈었더니 아직은 치료가 더 필요하지만 해도 가능하다고 해서 그럼 퇴원하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습니다. 내가 퇴원한다니까 함께 있던 환자 네 분이 덩달아 퇴원한다고 해서 같은 날 한꺼번에 퇴원했습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집에서 한다며 파스며 약이며 챙겨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힘줄이 많이 약하고 이전에 한 번 수술한 자리가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이미 몇 가닥 떨어진 상태에 있었고 이번에 몇 가닥 남은 힘줄이 넘어지면서 떨어졌다며 힘들게 수술했다고 했습니다. 두 달은 움직이지 말고 재활을 늦게 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소 퇴원을 앞당겼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오니 근행도 보며 운동 삼아 와송밭도 돌보며 잡초도 뽑고 요즘은 날씨가 더워 한낮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아침근행을 보고 나면 한 시간 반 정도 산책 삼아 꽃도 가꾸며 잡초도 뽑고 운동 삼아 합니다.

한 가지 서운한 것은 병원 가기 전에 자전거 도로에 심어놓은 금잔화 꽃은 전기 배선 작업으로 온데간데없이 없어지고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힘들게 꽃을 심었지만, 오히려 운동하기 좋게 가로등을 설치해주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집사람은 몸도 정상이 아닌 사람이 많이 움직인다면 매일 잔소리 아닌 걱정을 많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잡초란 것이 하루만 안 뽑아도 풀이 무성합니다. 물론 관심을 꺼도 될 일이지만 예쁘게 쌓아 올린 옹벽 담에 잡초만 무성하면 많은 사람이 운동한다며 다니는 길목인데 보기가 좋을 리 없겠지요. 교조전일화편에 보면 교조님께서는 휴지 한 조각도 버리지 않으시고 구겨진 종이도 정성스레 펴서 방석 밑에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셨다고 합니다. 주름투성이 종이를 그대로 두면 휴지밖에 쓸 수 없어 이것을 정성스레 주름을 펴 두면 어딘가 요긴히 쓰인다. 뒤지나 휴지가 되면 다시는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예쁘게 쌓아 올린 담벽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할 뿐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도 꽃도 피고 깨끗하게 와송이 자란 모습을 보면서 보기가 좋다고 말씀은 많이 하셔도 지나가면서 풀 한 포기 뽑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작물을 키워 나 혼자 잘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다니는 길목에 깨끗하고 보기 좋게 하기 위한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고 합니다. 하지만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많은 사람이 눈요기하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공짜로 주어진 땅 조금만 정성을 들이면 일거양득이 되는데 왜 마다하겠습니까. 어떤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이 식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재활 운동한다 생각하고 합니다. 전도는 못 다녀도 근행만큼은 철저히 보며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합니다.

지도말씀에

몸의 부자유 부자유스런 가운데 노력하는 것이 효능의 리라 한다. (1889. 10. 29)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신님께서 하시는 일 이루시는 일이라 하셨듯이 이것도 신님의 의도라 생각하며 겸허히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상의 깨우침

 

신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저 자신이 몸에 부자유를 겪으면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장애인의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을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도 있지만 살아가며 뜻하지 않게 장애를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에서는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운 시선이 많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좋은 시선으로 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만 그분들의 생활을 좀 더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나 할까요.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옆에는 보조 가방을 차고 다니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차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96일 최종검사 후 재활한다고 하니 그때가 지나면 정상의 몸으로 활동하리라 봅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가르침도 많이 받지만, 남들보다 빠른 효과를 봅니다. 이번에 함께 고관절 수술을 한 곽사장이란 분 내외가 우리 교회에 다녀갔습니다만 병원 생활하면서 교회장님 덕을 크게 보았다며 다리도 그렇고 팔도 보면 참 회복이 남들보다 빠르다고 하며 신앙하는 사람이라 다르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신앙하는 우리 용재들은 믿는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게 보던 진실과 정성으로 행한다면 분명히 신님께서는 그 정성을 받으시고 되돌려 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전생과 내생은 아직 모릅니다만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깨우쳐 가는 거로 생각합니다.

지도말씀에

아무리 구석에 있어도, 그늘에 있어도, 하늘이 꿰뚫어 보고 있다. 이것만 분간하면 당장 리가 다스려질 것이다. (1899. 8. 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씨를 뿌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씨앗이던 안 좋은 씨앗이던 그 뿌린 씨앗은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거둬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하는데 왜 이런 불행이 닥칠까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어버이신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바라시는지 찾아가 보면 분명히 답이 있다고 봅니다.

지도말씀에

천연자연의 리로 다스린다면 아무리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라도 신이 손을 잡고 데리고 간다. 하늘의 줄을 갖고 가는 것과 같은 것.(1900. 2. 11)

라고 하셨습니다. 어렵고 안 좋은 일일수록 침착하게 신님을 의지하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슬기롭게 차분히 헤쳐 가면 좋은 결과가 있다고 봅니다. 올해 들어 유난히 날씨가 덥습니다. 더위가 아무리 유세를 떨어도 조금 지나면 그 기상이 꺾일 거라 봅니다. 많이 더울 때는 더위에 맞추어서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고성교회에도 눈앞에 큰일이 산재해 있습니다. 포교 70주년 행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혼신의 힘으로 정성을 다해 뜻깊게 70주년 행사를 보냈으면 합니다.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