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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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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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12

 

세상을 바꾸는, 말 한 마디 6

 

이시중

 

4. 이 길과 세상을 용솟음치게 하는 말 (2)

 

두 번째는 온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친필 13-43) 하신 친필 말씀에서도 이 길과 세상을 용솟음치게 하는 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안심을 주고, 든든하고, 평화롭게 하고, 기분 좋게 하고, 용솟음치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길이나 세상은 이 말과 전혀 다른 길로 걸어왔다. ‘끼리끼리문화를 만들어 차별하고, 울타리를 쳐서 자기 소유를 극대화하거나 배타적으로 접근을 막았다. 여기에는 무한 경쟁에 각자도생이 자리 잡는다. 항상 다툼이 상존하고, 모반을 끊임없이 잉태한다. 비록 외양은 커지고 번지르르하고 대단하게 될지라도, 결국 작아지고 쪼그라들고 침울하고 위태롭게 하는 씨앗을 뿌리고 있는 셈이다.

온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 하는 것은 이 길의 중심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이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물론 한때는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없어하는 말에 열광하고 용솟음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 말에 의지하여 불타는 신앙신념을 키우고, 불굴의 의지로 어떠한 어려움이나 난관도 뚫고 나갔다.

비근한 예로, 일제 치하 식민지 한국에서 피지배를 받고 있는 민중들한테 이 길이 통했던 이유, 해방 후 친일파 매국노라는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이 길을 지켜낼 수 있었던 힘, 1960, 70년대 정부 당국이나 기독교가 물리력을 동원해서 탄압할 때 견뎌낼 수 있었던 의지. 그 배경에는 어버이신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온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하는 믿어 의심치 않는 강력한 형제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이 국경을 초월하고, 이념을 초월해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난관을 불굴의 의지로 헤쳐나오게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줄을 세우고, 벽을 가르고, 내 것 네 것 따지는 사이에 이 길은 생기를 잃고, 거친 세상에 박차고 나가는 동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말았다. 설사 형제애를 앞세운다 해도 편 갈라놓고, 울타리를 친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그들만의 리그인 편협한 말로 타락해 갔다.

 

흔히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말인데 곱씹어보면 탐탁치 않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편 갈라놓고 우리 편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외치는 소리다. 부정한 짓을 해 놓고 우리가 남이가!’ 하면 눈 감아 달라는 말이다. 우리 편끼리는 같은 이익 공동체이므로 아무리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눈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주술이다. 비리가 드러날 때 우리가 남이가!’ 하면 비리를 덮어두자는 말이 된다. 우리끼리는 남이 아니니까 아무리 싫은 일이라도 함께해야 하고, 아무리 틀려도 맞다 해야 한다는 식이다. 반대로 우리 편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거부해야 하고,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틀렸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은 안을 단속하고 밖을 치기 위한 심히 고약하고 불순한 말이다.

 

그러나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형제는 우리끼리 편 갈라 묶어놓는 쪼잔한 형제가 아니다. 온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라 하셨다. 거기에는 어떠한 나라나 민족이나 이념이나 종교, 사상을 다 포괄한다.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으로든 편 가르고, 적대시하고,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형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라면 형제로서 당연히 서로 도리를 지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도리란 무엇인가? 어버이 입장에서 자녀들을 바라보면 그 도리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어버이의 유일한 바람은 자녀들의 행복, 즐거운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맞추어 서로 도와 함께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 여기에 형제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서로돕기가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가진 것이 다르고 부족한 것이 다르다. 그 가진 것으로 상대 부족을 채워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서로돕기다. 그러므로 잘 돕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도와야 하는지 살피는 눈이 필요하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말로써 묻는 것도 필요하다. 살피지 않으면 무엇으로 도와야 하는지 모르게 되고, 묻지를 않는다면 어떻게 도와야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남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생색내기일 뿐이다. 결국 헛짓을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남이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는 결코 그를 도울 수는 없다. 그래서 지도말씀에서는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 길이라 한다. 오직 하나라는 것은 몇 번이나 깨우쳐 두었다. 같은 형제 사이에서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이어서는 형제라 할 수 없다. 이 리를 분간하여 마음에 새긴다면 같은 물이 흐른다. (1902. 8. 10)

 

고 했다.

어버이신님께서는 만족의 리로써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기만족과 상대 만족을 일치시키라는 말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남의 만족을 무너뜨리는 일이 있어서 안 되고, 남의 만족을 위해 내 만족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어느 쪽 일방적인 희생에서 얻는 만족이란 없다. 그러므로 만족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서로 찾고 묻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희망으로 건져 올리고, 괴로운 사람을 다정한 말로 위로한다. 아픈 사람을 치유의 손길로 어루만지고, 뒤 쳐진 사람을 기다려주고, 넘어진 사람을 손잡아 일으켜 세운다. 그리하여 함께 하고, 함께 가고, 함께 누린다. 이것이 서로돕기다. 서로돕기는 마음과 마음을 맞추어 형제로서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근행의 정신이고, 십전 수호의 모습이고, 즐거운 삶의 바탕이다.

그래서 신악가 4장 일곱에서 무엇이든 온갖으로 서로도웁기 가슴속 깊이깊이 생각하여라 하고 그토록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의 노래를 부를 때, 때때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애절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친필에서는

 

앞으로 온 세상이 한결같이

만가지를 서로 도와간다면 12-93

월일도 그 마음을 받아들여서

어떤 구제도 할 것이라 생각하라 12-94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만가지를 서로 도와갈 뿐이다 13-37

온 세상이 서로 도와 나가면

월일도 그 마음을 모두 받아들인다 13-38

월일이 마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든 섭리하리라 13-39

 

고 했다. 서로돕기야말로 이 길의 근본 가르침 중 하나이고, 월일의 섭리를 받는 유일한 길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서로 깨우치는 것이 형제라고 하셨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깨우쳐주고, 잘못하는 점이 있어도 일깨워 줘야 한다는 거다. 때로는 꾸지람도 한다. 한 사람의 잘못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있는 가운데, 서로 모여 있는 가운데, 모르는 점을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깨우치는 것이 형제라 한다. (1898. 3. 28)

 

형제가 잘못하면 형제 모두의 잘못이 된다. 모두의 마음에 걸리지만 한 때 일로 생각해서 그냥 봐 넘기거나 들어 넘기지 말고 이것을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1890. 7. 7)

 

그래서 깨우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형제이고, 더 나아가 깨우치는 일에 주저하거나 꺼려서는 진정한 형제가 아니라고까지 하셨다.

 

꺼리거나 어렵게 여길 필요 없어. 전혀 필요 없어. 꺼리거나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 돼. 꺼리거나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는 진정 형제라고 하겠는가. 서로서로 의심하는 것은 신의 리라 하지 않는다.

(1891. 11. 15)

 

그런데 흔히 형제라면 높고 낮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형이 있고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앞이 있고, 뒤가 있다. 형이 있고, 동생이 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나이를 따지고 출신을 따지면서 먼저 서열로 구분 짓는 것을 예사로 한다. 그래서 처음 대면하면서도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떤 형식으로든 , 동생하며 서열을 확인하고 그것을 평생 가져가야 할 보물처럼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 길에서는 일렬형제라 했다. 한 줄로 줄 세워 서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일렬이라는 뜻의 신악가의 손동작은 한결같이 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원은 위아래 서열이 없다. 평탄한 땅, 평등한 의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형과 동생은 수직관계로 장유유서를 따지는 서열이 아니라 수평관계로 이어주는 연결이다. 그래서 형이 있어서 동생, 동생이 있어서 형이라고 했다. 우열을 따져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으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 형제다. 이것은 곧 교회장이 있어서 신자, 신자가 있어서 교회장이라는 말로도 통한다.

 

세계는 하나다. 어버이신님이 하나고, 지구가 하나고, 태양이 하나고, 달이 하나고, 바람이 하나고, 바다가 하나고, 생명이 하나다. 하나에서 나왔으니 우리 역시 둘이 아니다.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일렬형제고, 한 형제다. 우리 밖에 남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세계는 하나, 우리는 한 형제,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

참 가슴 설레고 용솟음치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용솟음치게 하는 말을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살려 쓰고 있을까? 이것을 명확히 알고, 명확히 세상에 알리라고 어버이신님은 다음 친필을 남겨주고 계신다.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 (13-43)

이 근본을 아는 자는 없으므로

그것이 월일로서는 섭섭할 뿐이야 (13-44)

높은산에서 살고 있거나 골짜기에서

살고 있거나 같은 혼인 거야 (13-45)

그리고 차츰차츰 쓰고 있는 도구는

모두 월일의 대물인 거야 (13-46)

그것을 모르고서 모두 인간마음으로는

어딘가 존비귀천이 있다고 생각해서 (13-47)

월일은 이 진실을 온 세상에

어떻든 명확히 알리고 싶다 (13-48)

이것만 명확히 알게 되면

모반의 뿌리는 끊어져 버려 (13-49)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