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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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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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대제 신전강화

 

진정한 마음의 구제

 

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제반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입교 185년 고성교회 춘계대제 근행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오랜만에 12장 근행을 용솟음치며 올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잠시 춘계대제를 맞이해서 한 말씀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4)

 

교조님께서는 인간의 정명을 115세라고 하셨지만, 지금부터 135년 전에 교조님께서 90세에 모습을 감추시게 됐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춘계대제 근행을 올리게 됐습니다. 춘계대제 근행은 교조님의 은신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올리는 근행입니다.

교조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구제를 받아 즐거운 삶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50년 동안 몸으로 직접 남겨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습을 감추시게 된 이후로 직접적인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친필 막바지 구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아

이제부터 앞으로는 깨달음뿐이야 17-71

물어봐서 답을 해주고, 이래라저래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각자의 깨달음에 달린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과 구제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천리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일을 겪거나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 때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고입니다. ‘내가 이런 병에 걸리게 됐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깨달음은, 내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판단이 천리에 맞는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가 참된 구제를 받게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고, 듣는 것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즉흥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직감, 감정일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을 때, 화가 확 치밀어오르는 것은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겠다고 바로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에 의해서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판단하게 됩니다. 내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물을 마십니다. 깊이 생각하고 물을 마시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즉흥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하거나 고민을 할 때 그렇습니다. 고민을 즉흥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논리를 세워서 맞는지, 틀리는지를 따져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생각입니다. 마음을 먹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에는 감각적으로 하는 것과 논리적, 인연적으로 차분한 형태로 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인격이 들어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평상시에는 잘 못 느끼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는 몸은 어버이신님에게서 빌리고 마음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고 있습니까? ‘내가 이런 때 이런 마음을 써야지.’ 하고 생각해도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순간적인 반응이 우선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면 화가 잘나는데 화를 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가 나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무심코 자신의 마음가짐과 다른 마음을 사용해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자유롭게 쓰라고 허락해주신 마음인데도 자유롭게 쓸 수 없습니다. , 자유롭게 쓸 수 없는가에 대해서, 이 길에서는 그 원인을 버릇, 성품, 인연이라는 말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버릇이나 성품, 타고난 인연 때문에 자유롭게 마음을 쓸 수 없고, 그것에 종속되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직감적이고 바로 떠오르는 감정적인 생각은 이 길에서 말하는 버릇과 성품, 인연에 기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냉정한 생각은 각자의 마음의 자유를 충분히 느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말씀에 보면 제멋대로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버릇, 성품, 인연에 의해서 쓰여지는 마음입니다. 제멋대로의 마음이 어때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좋지 않은 버릇, 성품, 인연에 의해서 쓰기 때문에 안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자유자재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각자에게 버릇, 성품, 인연이 있어도 이 길에서 배우는 리의 가르침인 차물에 대한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인연이 있어서 그 인연을 자각하고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노를 해야 합니다. 이 길은 은혜보답의 길이라고 듣고 알고 있으므로 그런 마음에 기반해서 쓰는 마음이 비로소 자유자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버릇, 성품, 인연에 져서 자신이 생각하는 마음을 쓸 수 없는 상태, , 버릇, 성품, 인연에 끌려다니면서 차분한 생각을 못 하는 상태에 잘 빠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질병이 회복되는 수호를 받거나 어려운 사정이 해결되는 수호를 받았다고 해도 그 후에 나의 일상적인 삶이 불평불만에 쌓여서 살고 있다면 구제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병이 낫지 않거나 어려운 사정이 해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각하는 마음이 나는 참 감사하고, 즐겁구나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사정이 해결되지 않고, 병이 낫지 않은 것으로 보여도 그 사람의 내면은 이미 구제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듣던지 참 감사하다, 내 마음이 즐겁다.’ 하는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진정한 구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논어에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나이 70세가 되면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해도 법도를 져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누구를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거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나이 70살이 되면 그렇게 가는 것과 같이 사람으로서 목표로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교조님께서 가르쳐주신 참된 구제라는 것도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먹고 행동을 해도 천리에 맞는 말이 나온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밝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직관 같은 것은 자기의 힘으로는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순간적으로, 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저 때 왜 화를 냈을까.’, ‘내가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라고 나중에 가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을 해도 천리에 맞는 반응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그것은 신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버릇이나 성품을 고쳐주고 인연을 바꿔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천할 수 없는 것, 혹은 부지불식간에 무심코 해버리는 일, 냉정할 때는 잘 알고 있지만, 감정적으로 되어버리면 제멋대로 하는 일들을 하늘의 이치에 맞게 수정해 가는 것이 신앙이고, 교조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이 있어서 우리는 이 자리에 왔습니다. 천리교라는 영혼의 구제를 설파하는 종교에 이끌려 지금까지 많은 가르침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교조님 모본을 통해서 배워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우리는 그야말로 모본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이렇게 하면 더 좋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천은 생각처럼 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릇, 성품에 떠밀려서 인연에 지기 쉬운 것이 본래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인간은 거의 다 버릇, 성품에 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에 신님의 힘을 받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바뀌기 위해서는 어버이신님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어려우므로 교조님을 통해 배운 근행이나 수훈과 같은 신앙 의식을 통해서 어버이신님과 마주하고 의지해서 그런 수호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냉정하고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어서 나의 평소의 마음가짐을 점검하고 감정적인 본능에 따라서 떠오른 생각이 내 통제를 벗어나서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깨달았다면, 그것이 하늘의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바뀌도록 신님을 의지해서 신님의 수호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는 구제를 받을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런 마음에 익숙해졌을 때 비로소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 내가 도움받는다는, 교조님이 보여주신 고귀한 신언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고 주위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키우면서 인연에 휩쓸리지 않도록 신님께 의지하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완전히 마음이 구제된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떠오르는 생각, 직감, 무의식의 행동이 그대로 즐거운 생활로 이어지는 생각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차분히 생각하지 않아도 조급하게 나오는 생각들조차도 즐거운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구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조님의 행동을 보면, 교조님이 차분히 생각해서 하신 행동들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하신 행동이 아니라, 평소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그대로 하늘의 이치를 따랐던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맑아져서 더 이상 구제받을 수 없는 마음의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나쁜 사람은 부단히 가르침에 따라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다 보면 인연에 져서 좋지 않은 길로 빠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앞의 논어에 나온 공자님의 말씀처럼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친필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합니다.

온 세상에 많은 사람 살고 있으나

사람들은 모두 안개 속에 사는 것 같아서 6-14

나날이 맑아져 알게 되는 신의 뜻

성인됨에 따라 나타날 거야 6-15

이 길이 확실히 나타난다면

장래를 참으로 낙으로 삼아라 6-16

올 한해도 마음 맑히는 노력을 부지런히 해서 남을 돕고, 남을 도와서 내가 구제받아서 어버이신님께서 빌려주신 이 차물의 세계를 감사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