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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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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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10

 

세상을 바꾸는, 말 한 마디 4

 

이시중

 

3. 이 길을 침울하게 하는 말 (2)

 

신앙은 자유자재를 추구한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질병의 뿌리를 끊어내고, 사정의 뿌리를 끊어내고, 모반의 뿌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이 길의 신앙은 운명을 바꾸는 길이고, 즐거운 삶의 길이다. 즐거운 삶이란 자유자재에 있다. 그런데 정작 자유자재는 질서와 규율, 통제와 간섭을 전제로 한다. 세상에는 온갖 질서가 있고, 규율이 있다. 통제나 간섭이 있다. 이것을 지키고 받아들일 때 스스로 자유롭게 되고, 남들도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길거리를 나서면 지켜야 하는 교통법규가 있다. 신호에 따라서, 갈 때 가고, 설 때 선다. 이러한 통제와 간섭을 흔쾌히 받아들일 때, 생명이 지켜지고 자유자재하게 된다.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그런데 교통법규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예외가 없다. 누가 대신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통해서 지킬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문제는 어떤 질서와 규율인가, 어떤 통제와 간섭인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납득이 되는 질서와 규율, 누구나 흔쾌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통제와 간섭이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이 잘못될 때 신앙은 오히려 구속이 되고, 억압이 되고, 온갖 굴레가 된다. 질병은 깊어지고, 사정은 복잡하게 얽히고, 삶의 기반은 허물어진다.

 

교통법규처럼 이 길에서는 따르고 지켜야 하는 훌륭한 규범이 있다. 신악가, 친필, 지도말씀 3원전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다가 교조님이 남겨주신 50년간 모본이 있다. 이것이 이 길에서 가장 훌륭한 규범이고, 기준이고, 지침이다. 누구나 납득이 되고, 흔쾌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지킬 때 우리들의 삶이 안전하게 지켜지고, 어떤 질병이나 사정, 모반이 사라지고, 자유자재한 즐거운 삶이 있다.

교통법규를 누구나 지켜야 하듯이, 이 길의 중심 가치인 친필, 신악가, 지도말씀, 교조 모본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범이고, 기준이고, 지침이다. 누가 대신 지킬 수도, 누구를 통해서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달님의 혜택과 해님의 혜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 가야만 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통해서 받는 것도 아니다. 남한에서 받는 달님 해님과 북한에서 받는 달님 해님이 다를 리 없다. 일본이나 미국, 중국이나 소련, 유럽 어디에서나 달님과 해님은 다 똑같다. 달님 해님의 혜택을 누가 대신 받아주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거쳐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야만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자기가 선 바로 그 자리, 그 현실에서 바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상급, 상급 그 줄기가 내 생명줄이다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길을 왜곡되게 하고 한없이 어둡게 만드는 심히 고약한 말이다. 이런 말은 교조님 말씀 어디에도 없고, 3원전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상급이 내 생명줄이다.’라는 말에서 파생되는 말이 다른 교회는 가지 마, 다른 교회 사람과는 어울리지도 마.” “상급을 통해서만 터전으로 잇는 거야.” “상급 외 누구한테도 수훈을 받아서는 안 돼.” 하는 것이다. 얼마나 편협되고 쪼잔하게 만드는 말인가?

신앙을 통해 자유자재하고, 용솟음치고, 즐거운 삶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다. 죽은 신앙이다.

 

셋째, “이 길은 실천종교야. 교리 공부는 필요 없어.” 하는 말로 이 길을 어둡게 만든다. 우선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 어느 종교치고 실천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가르침치고 실천을 무시하는 가르침이 있던가?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 길은 실천종교라고 할 때 그 실천이란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일까? 내가 아는 실천, 내가 한 실천을 강조하고, 강요하려는 방편은 아닐까?

그런데 남을 이롭게 하고, 이 길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 이것뿐이겠는가. 신악가에서도 도와주는 곳들이야 더러 있겠지.’라고 하셨듯이 수천 가지, 수만 가지도 더 된다. 왜 내가 알고, 내가 실천한 단 몇 가지만을 고집하면서 스스로를 거기에 가두고, 소통을 막고, 이 길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버리고 마는가! 이것이 이 길 전체 수준을 떨어뜨리고, 이 길 내부 사람끼리 소통하지 못 하게 하고, 사회와도 소통하는 길을 막아 쪼그라들 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 시대 흐름을 볼 수 없고, 시대정신을 읽을 수가 없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기는커녕 동시대 세상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지도 못하고, 뒤따라가는 것조차 급급하여 자꾸 넘어지고 끝내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렇게 하고서 어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안아서 그들의 고충, 아픔, 어려움을 위로하고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 있겠는가!

 

한편 이 길은 실천종교라고 말을 하면서 공부하지 않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남의 공부를 무시하거나 공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아닌가? 같이 망하자는 꼴이다. 만약에 실천만 중요하고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면 그 방대한 친필, 지도말씀을 남겨놓을 턱이 없다. 읽지도 않을 책을 왜 남겨놓는다는 말인가! 으뜸인 리에서 밝히듯이 6천 년의 지혜나 3999년 문자의 가르침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똑같은 책이라도 시대 상황이나, 읽는 이의 입장이나 처지, 환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은 가르침을 오해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것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싶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말만 듣고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실천종교를 강조하는 말에는 내가 알고, 내가 했고, 내가 시키는 실천만 하라는 오만한 마음이 있고, 상대를 무시하는 옹졸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능가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키우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다.

바로 이것이 이 길이 이 땅에서 100년이 넘었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누구나 존경하는 대가가 나오지 않고, 큰 스승이 나오지 않는 근본 원인이지 않을까?

 

생사가 달린 긴박한 신상과 사정에서 구제가 절실했던 초대한테는 실천만이 최고였다. 그래서 그 실천으로 사람을 많이 모으기는 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풍파에 쉽사리 흔들렸고, 한때 모여든 사람한테도 철저한 신앙신념을 심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정에 휩쓸려, 쉽게 갈라지고, 흩어지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런 일들이 23대 갈 것 없이 이미 다 초대에서 시작되었다.

23대는 공부는 좀 했으되 넓이와 깊이는 부족했다. 실천만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짓눌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실천은 빈약했으니 실천만을 보아온 초대 신자들에게 감화를 주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자녀들을 신앙으로 이끌기에는 논리가 부족했다. 초대든 23대든 한쪽이 부족하고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부가 없는 실천은 팔다리만 있고 눈이 없는 것과 같다. 실천 없는 공부는 눈은 있되 팔다리가 없는 꼴이다. 눈이 없는 팔다리는 위태롭고, 눈만 있고 팔다리가 없는 것은 이루는 게 없다. 어느 쪽도 우열을 따질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55부 둘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최상의 길이며, 온전해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공부가 된 만큼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한 만큼 공부의 넓이와 깊이가 달라진다. 공부와 실천이 같이 가는 것이지 따로가 아니다.

 

넷째, “전도는 혼자서 하는 거야. 어울려 다니면서 하면 안 돼.”하는 말도 이 길을 침울하게 한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한 전도 구제를 개인 차원의 일로 축소 시켜버린다. 전체가 협력해서 만들어가는 포교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즐거운 삶의 표상은 근행으로 드러난다. 근행은 서로 역할을 나누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데 있다. 여기에 즐거운 삶이 실현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근행의 정신이 일상생활에서 펼쳐지고, 포교 구제 일선에도 그대로 접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교조님 재세시에는 마을의 요청에 따라 여러 명이 기우근행에 나갔고, 중환자 구제를 위해 여러 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그 집에 찾아가 환자의 머리맡에서 악기치고, 손춤을 추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구제에 나섰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전도 구제를 개인 차원의 일로 환원하면 일선 포교사들이 자신감을 상실한 채 힘을 잃고 만다. 이 거대한 세상에 던져진 한 톨의 모래알보다 작은 일개 포교사가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포교사를 혼자 세상 속으로 내팽개치고, 홀로 자족하면서 독립하라고 하는데 무슨 힘으로 버틴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 길을 알리는 포교사가 점차 사라지고,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 아닌가? 교회장은 있되 포교사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설사 보인다 해도 풀 죽고, 생기를 잃은 초라한 모습만 보일 뿐.

 

포교는 기세다. 기가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기를 살리는 일,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면 포교는 없다.

기는 서로 호응하면서 활동할 때 살아나는 것이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때 기는 살아난다. ‘함께 해 보자, 함께 가 보자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어깨동무하고, 두둥실 춤을 출 때 신명이 살아나고, 생기발랄한 온전한 기가 온 세상에 뻗치게 된다. 이것이 포교다. 포교는 기세다. 하늘에 닿는 의기가 충천하여 그 무엇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전체가 함께하는 포교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더 큰 구제, 더 큰 세계구제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끼리도 서로 협력하지를 못하는데, 어느 세월에 진정한 의미의 세계종교가 되겠는가! 교단 홈페이지 하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방송국 하나, 학교 하나 세우지 못하는 교단이 무슨 세계종교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지금 당장 할 수 없으면 꿈이라도 꾸게 해야 한다. 스스로 용솟음치고, 주변도 용솟음치게 하는 가슴 설레는 원대한 꿈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모두가 함께, 동시에 가꾸어가는 가슴 벅찬 비전이 우리에게 있는가?

 

다섯째, “넌 이단이야. 그렇게 하는 것은 사이비야.”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도 이 길을 한없이 어둡게 만드는 말이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너무나 쉽게 이단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상대를 함부로 재단하고, 무시하고, 거부하고, 죽이려 든다. 이것 역시 이 길이 다양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다.

흔히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형태는 어느 종교에서나 만연하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미운 사람들을 마녀사냥 하는 아주 손쉬운 방식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독점하려는 것이고, 그에 반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적으로 몰아 죽이려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넌 이단이야라는 굴레를 씌우는 순간 너 죽어라하는 말과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독화살을 날리고, 칼을 들고 설치게 하는 꼴이다. 누군가 대신 나서서 방어라도 할라치면 너 역시 이단이구나하는 또 다른 화살촉을 날린다. 그 비난과 공격이 두려워서 부조리한 현실이 펼쳐져도 누구 하나 쉽게 나서지도 못한다.

정통과 이단, 진짜 용재와 가짜 용재를 가리는 것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버이신님이 아니고선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 이단이냐고 물으면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에, 상급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터전에서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라는 말이 돌아온다. 3원전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하기 쉬운 말을 끌어와 아무렇게나 독설을 내뱉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해서 넌 내 아들이 아니야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무렇게나 선을 긋고, 이단을 운운하는 것은 너 꼴 보기 싫으니 죽어라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면 변화와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토론문화가 사라진다.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사라진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도전 의식이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