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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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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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9

 

세상을 바꾸는, 말 한 마디 3

 

이시중

 

3. 이 길을 침울하게 하는 말 (1)

 

이 길을 어둡고 침울하게 하는 말이 있고, 이 길을 활기차고 용솟음치게 하는 말도 있다. 어떤 말이 주류를 이루는가에 따라서 이 길이 침체하기도 하고, 이 길이 발전하기도 한다. 이 길을 침울하게 하는 말은 줄이고, 이 길을 용솟음치게 하는 말은 살려내야 이 길이 다시 융성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길을 어둡고 침울하게 하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말을 바꿀 수 있고, 말을 바꾸어야 이 길의 양상을 바꾸어갈 수가 있다.

 

첫째, 신앙하다가 뭔가 나쁜 일(신상, 사정)이 생기면 비난하고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다. “덕이 없어서 그래.” “인연이 나빠서 그래.” “지중(至重)한 인연이야.” “네가 마음을 잘못 써서 그래.” 이런 말을 쉽게 한다. 뭔가 심판관처럼 보고, 신의 뜻을 다 헤아리고 있는 듯이 말한다. 설사 그것이 바른 말이라 해도 그것을 앞세우다 보면 상대한테 비수를 꽂고, 상처만 더욱 깊게 할 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 처지를 깊이 헤아리는 공감 능력이 앞서는 것이 먼저고, 친절하고 다정한 말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고 윗말이 앞서게 되면 당사자에게 더욱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한 번 더 마음을 죽인다.

많은 사람한테 물어보았더니 윗말들이 이 길을 침울하게 하는 대표적인 말로 꼽아주었다. 이런 말이 주류를 이루고 반복하는 사이에,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 버린다.

지도말씀에서는

 

남의 장애를 보고 이런저런 티끌이 있어서 그래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몰인정하다. (1889. 10. 9)

 

고 경계를 하고 있다.

사실 덕이 없고, 인연이 지중한 것으로 치면 교조님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을까? 결혼 후 시집 집안 살림을 다 날려 버렸다. 딸 둘을 먼저 잃고, 남편이 죽고, 셋째딸이 죽고, 다섯째딸이 죽고, 아들이 죽고, 며느리가 죽었다. 거기다가 자신은 감옥에도 십수 차례나 다녀왔으니, 이보다 더한 박복하고 비참한 인생살이는 없다. 덕이 지지리도 없고, 나쁜 인연도 극에 달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천하에 불쌍한 사람이 교조님이고, 지금 천리교는 없다.

실제로 교조님께서는 신상이나 사정을 구제받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한테 덕이 없어서 그래.” “인연이 나빠.” “지중(至重)한 인연이야.” “네가 마음을 잘못 써서 그래.”하고 바로 지적질을 하지 않으셨다. 먼저 그 아픔과 괴로움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희망을 주셨다. 마음의 주름을 펴고, 밝은 마음이 깃들게 하셨다.

 

둘째, ‘상급이 신이다, 상급이 내 생명 줄이다, 상급 말에 무조건 예하라. 상급에 돈을 많이 올려라, 상급에서 하지 않는 일은 하지도 말라.’고 한다. 이것이 또 얼마나 이 길을 어둡고 침울하게 만드는 말일까?

일본에서는 천황을 신이라 한다. 천황을 신으로 올리고 나면 그다음 어떻게 될까? 천황이 내리는 말은 신의 말이 된다. 신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게 되고, 반대가 있을 수가 없다.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면 이웃 나라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도, 천황의 이름으로 살육을 해도 정당화된다. 전쟁이 끝나도 천황에게 한치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천황이 신이다, 진주는 신이다, 상급은 신이다하는 말은 어딘가 닮아있지 않는가!

신인 이상 거역할 수 없다,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저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은 완전하므로 비판해서도 안 된다.

원래 세상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깊은 내면에 신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사람이나 선택받은 몇몇 사람만이 신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신적 존재다. 그러므로 천황이 신이다, 진주가 신이다, 상급이 신이다고 할 수 있듯이 당연히 일반 백성도 신이다, 일반 용재 신자도 신이다, 산하도 신이다해야 한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처처가 불성’(곳곳마다 부처가 있다)이라는 불교보다도 못하고,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한국의 동학사상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르침을 이 길에서 펼치고 있는 셈이 된다.

사람을 보지 말고 리를 보라고 한다. 이것을 두고 흔히, 사람이 저지르는 티끌, 허물, 단점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지위, 권력, 입장을 보고 그에 순응하라는 말로 해석한다. 윗사람이 무슨 못된 짓을 하든, 개의치 말고 윗사람을 신으로 받들고, 니 할 짓이나 다 해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주변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통해 신의 이치, 신의 섭리를 보라는 말이지 사람이 뒤집어쓰고 있는 허울을 잣대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위나 아래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쪽만이 아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리를 보라는 말은 아래를 다스리려는 방편이나, 위를 세우려는 방편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하기를 강조하고, 예하는 정도를 보고 신앙이 있니 없니 하는 잣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 강조되고 아니오가 억제되면 말이 막히면 된다. 말이 막히면 기가 막힌다. 기가 막히면 삶이 막히고 이 길이 막힌다. 기가 막히면 그 막힌 기를 살리기 위해 가벼운 사람은 떠나버리지만 굳어진 조직이나 체제는 떠날 수가 없고, 움직이지 못하는 교회도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떠나고 빈껍데기인 조직이나 체제가 남고 건물만 남게 된다. 지금 침체하고 있는 이 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꼴이다.

말은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오도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무수히 많은 말들이 있다. 이것이 자유롭게 오고 가야 기가 살아난다. 말을 막아서는 것은 침체고 죽음이다.

침체된 이 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먼저 말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고 가는 말이 자유로워야 한다. 말이 자유롭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길이고, 남을 속이지 않게 하는 길이다.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을 때,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생명력이 담긴다. 여기에 마음이 살아나고, 넘실거리는 춤이 된다. 이것이 신바람이다. 신바람이 사람을 살리고, 이 길을 살린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살리지 못하고 용솟음치지 않으면, 이 길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를 강조하는 문화는 말을 막는 것이고, 말이 막히면 자유롭게 흘러가야 할 기(), 용솟음치는 마음을 막아버린다. 신바람이 사라진다.

아니오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가정이든 모임이든 직장이든 어떤 사회든 인간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된다.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 하는 게 진실이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하고, 슬프면 슬프다 하는 게 진심이다. 틀리면 틀렸다 하고, 맞으면 맞다 하는 것이 솔직하다. ‘하라는 것은 진실을 막고, 진심을 숨기게 하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게 한다. ‘잘하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면 이것은 폭력이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노예만 기를 뿐이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즐거운 삶도 없다.

으뜸인 리에서 도구를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납득이라는 것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절대 존재 어버이신님이 하시는 일임에도 처음부터 도구들이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니오했다는 말이다.

도구들이 얼마나 거부를 하고, 어버이신님은 얼마 동안 납득을 시켰을까? 그 실마리는 입교 당시 모습에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3일 밤낮으로 진행된 신인문답(神人問答). 어버이신님이 인간 세상에 처음 나타나시어 자기 존재를 밝히고, 나타난 이유를 밝히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거절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한두 시간이 아니다. 무려 사흘 동안 거부하고 버티었다. 그동안 어버이신님은 줄기차게 인간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하셨다.

입교의 이 과정을 미루어 봤을 때 창조 당시에도 한 번에 납득 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거절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의미를 몰라서 그럴 수 있고, 어찌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여러 입장을 고려하다 보면 거부할 수 있고, 게으르거나 싫어서도 거절할 수 있다. 거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누구나 하는 일이다. 거부나 거절이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납득을 시켜가려는 진실과 정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인간 창조과정에서나 입교 당시 과정에서도 거절과 거부를 당연한 것으로 설정되어있고, 오히려 납득시킨다는 것에 중요한 요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납득을 시키는 주체는 윗사람, 앞서가는 사람, 먼저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즉 마음성인이 더 된 사람이 마음성인이 더딘 사람을 납득시키는 것이고,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거부당하는 일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성인 될수록 남의 거부, 거절을 더 많이 받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을 내고 정성을 들여서 납득을 시켜나간다. 여기에 이 길의 정수가 있다.

 

를 강조하는 문화는 상명하복의 노예문화고, 군사문화고, 조직문화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억압 문화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신앙의 잣대로 삼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