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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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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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8

 

세상을 바꾸는, 말 한 마디 2

 

이시중

 

2. 나를 침울하게 하는 말, 용솟음치게 하는 말

 

나를 침울하게 하고, 남을 침울하게 하는 말이 있다. “넌 안 돼, 넌 틀렸어.” 하는 말이다. 뭐라도 이야기하려 하면 일 절만 해라, 고만 해라.”고 말을 막아 버린다. “너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하며, 기를 죽이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말은 짧되 여운은 길다. 어떤 말은 평생을 간다. 이런 말은 대체로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많이 한다. 말이란 원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많이 하는 것이니까. 상대를 침울하게 하는 말 역시 가까운 사이일수록 많이 하게 되어 있다.

 

다행히 이런 말은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거의 듣지 못했다. 아내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 대신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 ‘당신 멋져, 최고야!’ ‘사랑해.’ 하는 말을 자주 해 주었다. 이것이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되었다.

뭔가 주저하고 있을 때 곁에서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 해 준다면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자신 없어 하며 물러나려 할 때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 당신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라고 해 준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행히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만약에 기본 멘탈이 강하면 이런 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자존감이 높다면 남이 무어라 해도 개의치 않게 된다. 할 일을 제대로 하고, 갈 길을 당당히 갈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남과 비교하는 일에 강요당한 희생자이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강력했고, 나보다 뛰어났다. 원래 뛰어난 사람은 한둘밖에 되지 않는 소수이고, 그에 비교당하는 사람은 대다수다. 그러므로 자신을 되돌아볼 때 특별히 내세울 게 없고, 잘하는 것이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나 역시 이런 자괴감에 빠져 긴 세월을 허비해 왔다. 남보다 특출하게 공부를 잘한 것이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었다. 기본 멘탈이 나약했고, 자존감도 낮았다.

연애를 하여 운 좋게 아내와 결혼을 하였지만, 한동안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결혼의 환상이 깨어지게 되면, 분명히 드러나게 될 내 못난 모습을 발견하고 아내가 실망하지 않을까? 그러면 헤어지자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도망갈 수도 있을 텐데...... 그게 걱정이었고, 매사에 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신혼 초에 술을 마시면 때때로 아내를 붙잡고 애원했단다. 나는 필름이 끊겨 기억을 못하는 데.

여보야, 제발, 내 옆에 있어 줘. 어디 가지 말고, 제발...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두려워.”

 

이 길에 들어와 포교의 길에 들어서면서는 늙으신 엄마한테 무엇 하나 만족드린 일이 없었다. 그러니 만날 때마다 너 언제 철들래?’ 하셨다. 엄마 눈으로는 완전히 철부지다. 포교한답시고, 빈곤한 삶을 지나는 동안 집안 대소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가족으로서 분담해야 할 돈을 제대로 낸 적도 없다. 그러니까 엄마가 너 언제 철들래?’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포교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회로 나가 돈벌이는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아내가 등을 떠밀며 돈 벌어 오라고 하지 않았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하고, 고맙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거나 글을 쓰고 있을 때도, ‘돈도 없는데, 힘들어 죽겠는데, 당신은 뭐 하는 거야하는 말로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내가 의기소침할 수 있는 말을 아내가 한 기억이 없다.

우리가 결혼할 때 한 결혼 서약 중 하나는 혼자일 때보다 함께 더 행복하기였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렇게 되어왔다. 처가에서 극렬하게 몇 년에 걸쳐 반대한 결혼이었기에 아내는 행복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더 노력해 왔다. 그 때문에 불행할 수 있는 말, 침울하게 하는 말은 극도로 피했을 것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십, 몇 백 번이고 울고불고했을지언정, 내 눈에는 띄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보잘것없고, 자신 없어 하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말은 자주 해주었다. 그중에 가장 힘이 되어 준 말은 언제나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였다. 이 말은 분명 누구한테나 힘이 되는 말일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이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이외에도 힘을 주는 말은 많다. 뭔가 일을 하고 났을 때, ‘잘했어요.’ ‘그 정도면 훌륭해요!’ ‘조금 못하면 어때?’ ‘우리 둘이 함께하니 괜찮아요.’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의기소침한 마음이 달아나고, 새로운 자신감이 생긴다. 더는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게 한다. 만약에 내 그럴 줄 알았다. 잘못할 줄 알았다.’ ‘그것밖에 못 해?’ ‘꼭 당신이 해야 해?’ 하는 말을 들어버렸다면 더욱 절망에 빠지고, 자신감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그 어떤 일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꾸중 들을 것이 두려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응원해 주지도 않는데 또 할 리가 있겠는가? 한다 해도 더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힘을 주는 말이 또 있다. ‘당신이라서 좋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좋아.’ ‘함께 해 봅시다’ ‘같이 가 봅시다’.

 

이렇게 용솟음치게 하는 말을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많이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지가 못하다. 용솟음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가까이에 많이 없고, 설사 있다 해도 24시간 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곁에 있다고 해도 늘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도 자기 스스로 용솟음치는 말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면 된다. 자기 자신은 하루 24시간, 일 년 사시사철을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용솟음치는 말이 필요할 때마다 간직하고 있는 그것을 바로 끄집어내어 쓸 수가 있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용솟음치게 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자기를 용솟음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가.

다행히 나한테, 남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용솟음치게 하는 말 한마디가 많아서 고맙다. 그 한마디 말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먼저, ‘나는 어버이신님을 닮은 성품,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왜냐하면 어버이신님의 자녀이니까. 자녀는 누구를 닮는가? 부모를 닮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어버이신의 성품, 즉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확신하게 되면 두려움도 사라지고, 주저함도 사라진다. 어깨를 펴고 당당해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 속에 감춰진 신성이 보이게 되므로 존중하게 된다.

 

또한 어버이신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바람 십전의 수호로 내가 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십전의 수호는 곧 어버이신님의 섭리다. 이 섭리는 11초도 멈춤이 없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이것이 어버이신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어버이신님이 내 곁을 떠나시면 십전의 수호가 바로 멈추게 되고, 나는 그 순간 주검이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11초도 쉬지 않고 생명 활동을 하고 있다. 어버이신님께서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고, 방치하신 적도 없다. 이것을 분명히 자각할 때 용솟음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다. 침울하다는 것은 이렇게 함께 해 주시는 어버이신님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안다 해도 깊이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도 어버이신님이 늘 함께해 주시는 것이다. 나를 통해 어버이신님을 보고, 남을 통해 어버이신님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을 보지 말고 리를 보라는 말의 가장 근원적인 실체다. 단지 지위, 관계, 형색만을 따져 어디에 가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길을 잘못 들게 하는 원흉이다.

 

그리고 나한테 힘을 주고 용솟음치게 하는 말이 또 있다. ‘나는 어버이신님께서 10억 년에 걸쳐 만들어주신 위대한 존재다.’ 그러므로 지상 최고의 작품이 바로 나. 10억이나 걸려서 만들어진 작품이니까, 그것도 어버이신님과 내 영혼이 함께 만든 것이니까, 이보다 더 위대하고 뛰어난 작품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 거지 동냥 구하듯이 남의 존중을 바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된다. 이것은 남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사람 역시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이든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버이신님은 우리가 부르면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그리고 교조님하고 불러도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육친의 부모가 자식이 부르면 언제나 응답해 주듯이 어버이신님, 교조님도 우리가 부르면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부모님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를 하면 바로 받아주신다. 이것이 어버이다.

교조님께서는 신님에 대한 신앙은 말이지, 신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여겨야 해요. 그렇게 하면 진짜 신앙이 되는 거예요.”(일화편 104 신앙은 말이지)라고 하셨다. 어버이신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교조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여겨서 신앙하라는 거다. 그러면 진짜 신앙이 된다고 하셨으니 육친의 부모를 대하듯이 어버이신님, 교조님을 대하면 된다.

물론 어버이신님이나 교조님의 응답은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가 아닐 경우가 많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면,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신다. 말이든, 영감이든, 꿈이든, 몸을 통해서든, 가족을 통해서든, 지나가는 개나 고양이를 통해서든 분명히 나타내 보이신다. 우리들의 어버이시기에 언제나 선명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믿지 않고, 마음을 닫아둔 채 응답을 기다리면, 눈을 통해서 오는 응답을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오는 응답을 들을 수 없고, 몸으로 통해 오는 응답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응답은 간절함에 상응하여 돌아오는 응답이다. 간절함이 없으면 응답의 강도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어버이신님은 우리가 부르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언제, 어디서나. 이것이 얼마나 용솟음치게 하는가.

 

그리고 남의 비난, 공격, 험담을 받을 때 신님은 다 알고 계신다.’고 외친다. 그러면 모든 근심, 억울함,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구차하게 변명할 것도 없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호소할 필요도 없다.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자리의 바탕인 어버이신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데, 뭘 구차하게 변명하고, 호소할 게 있는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너가 알고, 내가 알고 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때가 되면 언젠가 천연자연으로 티끌은 티끌대로, ()은 덕대로, ()은 선대로, ()은 악대로 귀결될 뿐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있다. 이것은 내가 알 바도 아니고,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다. 시순은 어버이신님의 영역이고, 단지 우리는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 그래서 신악가 4장 둘에 남들이 무엇이라 말할지라도 신님이 살피시니 진정하여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지 않는가. 남의 비난, 공격, 험담을 받을 때 이 신악가 말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가.

남들이 하는 말이란 따지고 보면, 그들의 인연이 투영되어서 나오는 나부랭이들이다. 인색한 사람은 인색한 소리를 하고, 편애하는 사람은 편애하는 소리를 하고,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대로 말하고, 교만한 사람은 교만하게 말한다. 그들의 말속에는 그들의 인연이 들어있고, 그들이 쌓은 티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들의 인연에 휩쓸리고, 그들의 티끌에 놀아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을 항상 용솟음치게 하신 교조님 말씀을 하나씩 떠올려 보아도, 지금도 충분히 나를 용솟음치게 한다.

집안에 든 도둑이 하인한테 붙들려 오자

가난에 쪼들려서 한 짓일 거야. 그 마음이 가엾다.”고 위로하며 풀어주셨다.

게으름을 피우는 일꾼한테도 언제나 수고가 많구나하며 격려하셨다.

극빈에 빠져 먹을 쌀 한 톨이 없다고 하는 고칸에게는 세상에는 머리맡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께서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고 하셨다. ‘우리들은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께서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 이 얼마나 기막힌 표현인가.

박해가 심해져 경관이 연행하러 올 때는 마디에서 싹이 튼다.”고 하시며, “묻혀 있는 보물을 파내러 오는 거야.”라고 하셨으니, 그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이 없으셨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건이 터져 동요하는 사람들한테는 자아, 바다 건너 산 넘어, 바다 건너 산 넘어,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천리왕님 울려 퍼지는 거야, 울려 퍼지는 거야.고 하시며 마음을 안정시키셨고, 나타나는 일을 보고 걱정하고 의기소침하는 사람들한테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이 집터는 어버이신의 말대로 하면 되는 거야안심을 시키며 나아갈 바를 일러주셨다.

구제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한테는

잘 돌아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여기저기 너무 멀리 둘러서 왔구먼. 가엾기도 해라. 여기에 오면 모두 다 계시는데.”

자네는 신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신이 이끌어 들인 거야. 병은 걱정할 것 없어. 곧 구제해줄 테니. 그 대신 자네는 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잘 돌아왔구나. 신님의 분부대로 하면 틀림없이 구제해 주실 거야.”

걱정할 것 없다. 이 집터에 평생 이바지하면 반드시 구제받게 되는 거야.”

구제받을 거야, 구제받을 거야, 구제받을 몸인 거야.”

걱정 없어. 어떠한 병도 모두 수호받을 수 있는 거야. 욕심을 버려요.”

라고 하시며, 단 한 마디 말로 바로 위로하며 용솟음치게 하셨다.

 

남을 구제하는 포교의 길에 접어든 사람한테는

신의 길을 따라가면 물질에 궁하리라 생각해서 걱정하겠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용솟음쳐라 용솟음쳐라. 고생하려 해도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 옷이랑 음식이랑 용돈을 모두 줄 테야......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라.”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장래를 낙으로 삼아라. 낙으로 삼아라...... 누가 뭐라 하든 남이 하는 말에 마음을 두지 말도록.”

바르게 걸어야 해. 바르게만 걸으면 끝에는 얼마만큼 훌륭하게 될지 모르는 거야.”

고 하시며 나아갈 바를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게 한마디 말로써 하셨다.

 

교조님의 이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의지하여 어두운 운명에서 밝은 운명으로 삶을 바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조님 모습만 봐도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혔을 텐데, 거기다가 직접 교조님 말씀이라도 들었으니 얼마나 감동했을까. 얼마나 용솟음쳤을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한 생각까지 들었을 게 뻔한 일이다. 그 말씀 하나하나에 의지하여 칼날 같은 험한 길, 깊은 물 속, 뜨거운 불 속,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을 걸어온 무수한 선인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마음 하나 용솟음치면서 묵묵히 인내하고 견디며 만들어진 이 위대하고 훌륭한 길을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고 있다.

 

침울하게 하는 말은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용솟음치게 하는 말은 사람 사이를 연결한다. 그리고 침울하게 하는 말은 잘하던 일조차 못 하게 하고,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용솟음치게 하는 말은 주저하던 일을 자신 있게 하고, 뒤로 물러서려는 마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당당하게 도전하도록 이끈다. 마음이 침울하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길이라도 따라갈 힘이 없다. 마음이 용솟음치게 되면 못 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 어떠한 비난, 험담, 억압을 받아도 당당하게 나아간다. 이것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가서 이 길을 침울하게도 하고, 세상을 용솟음치게도 한다.

 

교조님께서는자녀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아야만 신도 기뻐하시는 거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단 하나밖에 없다. 서로 도와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즐겁지 않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즐겁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즐겁지 않는 것은 행할 필요도 없다. 신과 인간이 함께 용솟음치는 신인화락의 즐거운 삶은 언제나 변함없는 우리들의 길이다.

 

실로 힘이 되고 용솟음치게 하는 것은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아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단 한 마디 말이다. 어떤 순간, 어떤 시순에 가장 유효한 이 한 마디 말을 지혜롭게 잘 살려 쓰기 위해서, 오늘도 신명을 나르며 만 마디 리를 만들어 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