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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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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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어느 날에...

 

박혜경(진홍교회)

 

이야기를 시작하며

 

요즘은 여러 가지 생각이 참 많아지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더위에 머리를 비워 버리고 싶은데, 오히려 더 생각이 많아져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오늘은 20년은 좀 안 된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의 기억력이 예전에는 신통방통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리고 저 나름대로 기억력이 엄청 좋다는 자만심이 좀 있기도 했는데요, 요즘 들어 50이라는 나이가 되다 보니 슬슬 저의 기억력에 스스로 의문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 기억이 정말 맞을까.’ 하고 혼자 자문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을 잘 되살려서 어떻든 잘 전해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기억을 자~~알 살려 보겠습니다.^^

 

우리 진홍교회는 八木대교회 소속입니다. 우리 대교회의 전 대교회장님 사모님(이하 사모님)께서는 본부에서 여자악기 강사를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사모님이 처음 한국으로 여자악기를 가르치러 오실 때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여자악기 강습회를 하며 들려주셨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들었던 당시가 지금으로부터 20년이 좀 안 되었으니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지요.

 

사모님께서 처음 한국으로 여자 악기를 가르쳐 주시러 오실 때, 그때까지 한국에는 여자 악기가 제대로 된(터전에서 근행에 사용하는 여자악기) 악기가 없어서 한국의 가야금과 해금으로 가르치셔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모님은 한국 악기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악기는 한 번 보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터전에 있는 음악연구소에 가서 담당 선생님께 사정 이야기를 하시고는 한국 전통악기를 보여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당신 제정신입니까?”라고 하셨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이 한국 가야금으로 근행에 맞는 음을 찾아서 조율하고 연주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줄의 장력도 다르고 음 체계가 다르니까, 아무리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신악가 음에 맞추어 연주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해금은 완전히 줄의 수도 다르고 연주법도 다르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한국 악기를 눈으로 보고는 한국으로 들어오시는데, 공항에서 검색대를 나오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고 합니다. 가방의 모든 것을 다 검사하고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일일이 설명해 주고, 개인적인 소지품까지 다 검사를 하니 자존심 상하는 그런 일들도 많았답니다. 그래도 그런 것을 다 뒤로하고 한국에 오로지 여자악기를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어려운 길을 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한국에 오신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전국에서 여자악기를 배우러 오셨다고 합니다.

 

저도 어릴 적 생각나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지 초등학교 1, 2학년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엄마가 경북 김천에서 경남 고성으로 악기를 배우러 갔다가 오셔서 노래를 숫자로 부르시며 와이셔츠 상자에 고무 밴드를 걸어서 줄을 만들어 튕기시며 가야금 연습을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저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엄마가 연습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따라서 4334 3234 21234 하는 노래를 부르며 음도 안 맞는 고무 밴드를 퉁기며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 그때 해금 연주를 하시는 분을 한 번도 못 봐서 한국 해금으로 어떻게 연주를 하셨을지 상상이 잘 안 갑니다. 그렇게 많은 분이 여자악기를 배워서 잘 안 되는 실력이지만, 근행에 올라갈 수 있었을 겁니다.

 

가르치는 분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무모한 도전이었을 겁니다. 저는 사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그렇게 못 했을 겁니다. 저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는 사람이기에 사모님처럼 순직하지 못해서 아마 그렇게 못 했을 겁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악기를 가르치시러 한국에 오시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셨고, 늘 오시면 열정을 다해 악기를 가르쳐 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저도 강습소에 가서 여자악기를 제대로 처음 배웠는데, 거기서 기본 조율법을 배워 그 바탕에 사모님의 조율 하시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조율을 공부했습니다. 사모님께서 한국에 오실 때마다 저의 실력도 성장해서 그전에는 못 보던 것이 눈에 보이게 되고 그걸 눈으로 익혀서 거기에 맞춰 연습해 가며 차츰 성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덕분에 제가 지금 여가악기 강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생각해보면 강습소에는 여자악기가 많이 구비되어 있고, 각 교회에도 리 받은 교회는 물론이고, 현지 교회나 포교소라도 가야금을 보유하고 계신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악기가 갖추어져 있고, 장소가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터전에 가서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되고, 전국 어디에서든 강습소만 가면 악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처럼 코로나 사태로 인해 터전에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실정에 언제 터전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터전까지 강습을 하러 가야 한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게 되면 터전 참배 겸 터전에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시간을 두고 봤을 때 가까운 곳도 가기 힘든데 먼 곳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대 회장님의 터전참배

 

두 번째 제가 전해드릴 이야기는 우리 진홍교회 초대 회장님께서 터전에 수훈의 리를 받으러 가셨을 때의 일을 잠깐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단교에 가까운 관계 단절 상태여서 터전에 한 번 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초대 회장님께서 밀항선의 선원으로 위장 취업을 하여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항구 근처에 배가 정박을 하면 헤엄을 쳐서 항구에 도착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드디어 터전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별석 말씀을 듣고, 별석 말씀을 한 석만 더 받으면 되는데 다음날 배가 다시 한국으로 출항하게 되어 너무나 안타깝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배를 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대 회장님께서 타고 가실 배가 암초에 걸려 좌초되면서 수리를 하는 데 한 달이 걸리게 되어 감사하게도 수훈의 리까지 무사히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신님의 수호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전해드린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터전에서 어렵게 한국으로 들어와 여자악기를 가르쳐 주셨던 대교회 전 사모님의 이야기와 한국에서 어렵게 터전으로 건너가 별석말씀을 들으셨던 우리 초대 교회장님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어렵게 터전의 리를 날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지금 터전을 왕래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문득 두 가지 이야기가 저의 마음을 자꾸 두드립니다. 힘든 무모한 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여자악기를 가르쳐 주시러 오셨던 사모님들이 뿌려놓은 작은 씨앗이 지금은 전국에 있는 여자악기를 하는 분들에게 싹이 터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터전에 별석말씀을 들으러 가는 일도 중단되었고, 언제 다시 그 기회가 열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다시 기회가 열린다면 그 옛날 우리 초대들이 하신 고생의 손톱의 때만큼도 고생을 안 하고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쉽게 터전을 다녀오는 것에 대해 몰랐던 소중함과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악기를 연주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모르던 지난날을 반성해 보며 한 사람이라도 더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선배 선생님들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