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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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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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5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14

 

이시중

 

11. 이 글을 마치며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이라는 주제로 더 넓고, 더 깊고, 더 많은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지만, 저의 역량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미흡하고 부족한 이 글을 지금까지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천리교가 시작된 지 184, 이제 16년만 있으면 200년이 됩니다. 한국에 전래된 지는 110년이 넘고 120년이 흘러가고 있으니 그동안 일들을 스케치나마 살펴보고 싶어서 감히 펜을 들었습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이기 때문에 스케치하듯이 담아내는 글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쌓여 1년이 되고, 1년이 쌓이고 쌓여 10년이 되고, 10년이 쌓이고 쌓여 100년이 넘었으니 그 긴 세월의 일을 어찌 글로 다 담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평생을 바친다 해도 제대로 된 글을 쓰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이것이 자극이 되어, 반드시 누군가 귀 밝고 눈 밝은 사람들이 깨어나, 한국에서 천리교 역사를 더 잘 써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기록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한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습니다. 물론 기록된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 역사보다 훨씬 적고, 드러난 의미는 드러나지 않은 의미보다 훨씬 적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지난 역사를 객관과 주관이라는 씨줄 날줄로 하여 그 시대정신을 찾고 이해하고 배우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배우고, 현재에 처한 여러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혜안을 기릅니다.

 

입교 200년을 불과 16년을 앞둔 시점에서,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관문인 한국에서 천리교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를 밝혀내는 일은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한순간의 관심으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사람의 일이란 많은 시간을 두고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다양하여 그 모두를 아우르고 통합하는 일도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역사를 모르면 지금 처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지금의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미래 역시 어떠한 길도 선명하게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펼쳐 본 천리교사전에서 다음과 같은 교세의 흐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리교사전, 오야사토연구소편, 287-289, 2018)

 

1892년 교인 5,351, 용재 49,752, 신자 977,240

1896년 교인 19,061, 신자 3,137,113

1898년 신자 3,285,413

1911년 용재 96,396명 신자 4,754,395

1922년 용재 157,592

1928년 교인 46,576, 용재 221,248명 신자 4,093,000

1938년 교인 82,620, 용재 370,824명 신자 4,559,000

1946년 신자 1,129,466

1956년 교인 97,035, 용재 526,390명 신자 2,021,600

1966년 교인 108,606, 용재 624,805명 신자 2,459,009

1977년 교인 149,622, 용재 897,295명 신자 2,377,786

1992년 교인 185,042, 용재 1,079,188명 신자 1,855,282

2015년 교인 159,143, 용재 856,797, 신자 1,191,422

 

교조님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 길이 교조님 은신 이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던 세간의 시선과는 달리 확고한 신앙신념을 가진 이 길의 선인들의 진실한 정성에 힘입어 한동안 계속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교조님이 은신하신 지 불과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300만 신자를 헤아리게 됩니다. 그러자 당국에서는 깜짝 놀라 천리교 말살정책을 펼치는 내무성 비밀훈령을 1896년에 발포합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다소 주춤거리지만, 이것이 오히려 해외 포교의 기폭제가 되어 세계로 나가는 천리청년들의 기상이 드높았습니다. 그것이 안팎으로 자극이 되어 1910년대에서 30년대까지 최고의 교세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1937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전 국민사상통제에 돌입하고,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발동하면서 더욱 철저하게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하고 통제해 갔습니다. 이것이 1945년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천리교 교세에 미친 영향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교세는 1945년 전후로 바닥을 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복원의 길로 들어서면서 교세는 다시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1970년 중반 전후로 정점을 찍고는 결국 하향국면으로 꺾이고 맙니다. 이것이 계속 몇십 년 이어지면서 코로나19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신자가 1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교인과 용재 수는 대체로 늘고 있는데, 신자 수는 줄어들고 있는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상승과 하향곡선은 한국에서도 거의 일치하는 곡선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승과 하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해답을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승하게 만드는 동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끌어내리는 요인은 또 무엇인가.

이것을 묻고 답을 찾고 정리해 나가는 진지한 노력이야말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첫 출발점입니다.

이번 글은 이러한 고민에서 나온 아주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징검다리 하나같은 것입니다.

아직도 다루지 못한 주제는 많습니다. 교회 계통문제, 후계자 문제, 교리 복원문제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변죽만 울리고 핵심적인 문제에는 아무런 접근을 하지 못한 채 이 글을 마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970년대 한국 전성기 때, 한국에서 최초로 천리교 학생회를 만들고, 수련회를 하면서 미래의 꿈나무를 키우시던 이병석 고성교회 2대 회장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분은 현직에 오래 머물지를 못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겨우 싹터 소년 나무로 자라기 시작할 무렵 고성 2대 회장님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게 1987년 무렵입니다.

그 몇해 전, 고성 상급교회인 원남성교회는 후계자 문제가 발단이 되어 결국에는 1985년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원남성교회는 한 때 한국의 신자 1/2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세를 자랑하던 대단한 교회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에는 고성 산하교회인 충무교회가 신각 내 목표물을 문제 삼아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무교회는 그 당시 전국에서 조석근행 참배 인원이 가장 많다고 알려진 교회였습니다. 목표물 사건은 일파만파가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결국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한국에서 천리교가 두 갈래 세 갈래 갈라지는 또 다른 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태에 가장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고성 2대 회장님은 실망과 좌절의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거기다가 경찰이나 검찰에 수십 차례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 개인 인간으로서 느꼈을 모멸감과 수모, 그리고 갈등은 누구도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터진 모든 사태에 무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한때 일로 끝나버리고 만 일이 아닙니다. 세월이 몇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여러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쩌다 생긴 단 하나의 사건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천리교가 내재적으로 항상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규모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입니다.

결국 이것이 순수한 신앙신념을 갉아먹고, 열정을 갉아먹고,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어 알게 모르게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말았습니다. 한때 30-40만을 자랑하던 교세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용솟음치던 기상은 온데간데없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침체된 기운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용솟음치는 기세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이것이, 입교 200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천리교 신앙자인 우리한테 주어진 아주 큰 숙제입니다.

어떻게 풀어내느냐, 여기에 이 길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유수한 종교들은 오늘날 세계종교로 되기까지 몇백 년, 몇천 년을 그저 순탄하게 쉽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수 차례나 벼랑 끝으로 몰려갔던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 견딜 것은 견디고, 바꿀 것은 과감하게 바꾸어서 끊임없이 체질을 개선해 왔기 때문에 오래도록 살아남게 되었고, 세계종교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길도 역시 그런 과정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거의 200년이 되었으니까, ·여름·가을·겨울이라는 한 순환을 거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천리교는 지금은 아주 긴 겨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어떻게 해야 천리교가 세계종교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

다행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몇백 년 몇천 년이 흘러가도 절대 변함없는 길이 있습니다. 교조님의 모본과 순수한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불순물이 끼이고 변질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천리교는 불행하게도 국가권력의 억압과 탄압 때문에 변질 왜곡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중이 일제 식민지 탄압을 받았던 것과 꼭 같이 천리교는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탄압을 오랫동안 받아왔습니다. 해방된 지 8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식민지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관계도 쉽지가 않습니다.

 

한국 속에 천리교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종교입니다. 특히 3.1절과 8.15 광복절에는 신문지상이나 방송 언론매체를 통해서 왜색종교, 천리교라는 악의에 찬 내용이 흘러나오고, 한일 간에 관계가 악화가 되면 그 불똥은 반드시 천리교인들한테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천리교가 우뚝 서서 한때나마 3040만 혹은 50만 신도를 헤아렸다는 것은 너무나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다. 충분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외세를 업고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천리교인들의 깊은 내면에 흐르고 있는 교조님의 근본 사상과 순수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길이 지닌 세계성이고, 보편성이고, 위대함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천리교 자체가 가진 또 다른 모순이 발목을 잡고 걸림돌이 되어 스스로를 무너뜨렸던 경험도 많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다행히 이 길의 가르침은 세계종교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 종교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일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서양에 예수가 있다면 동양에는 미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조님이 직접 남겨주신 친필, 신악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본석을 통해서 일러주신 지도말씀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하지 않고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이설들이 교리서나 교의서 곳곳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전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진실과 거짓을 규명하기는 쉽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천리교 내에 형성되어 있는 조직, 체제, 문화, 정서에 이르기까지 천리교 가르침이 아닌 것이 스며들어가 있을 개연성은 매우 높습니다. 천리교가 일본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민족성, 일본의 정치, 일본의 문화, 일본의 경제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국가의 신도 정책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버린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 잔존하는 영향으로 고착화되어 버린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걸러내기 위해 19458월 종전과 더불어 2대 진주님께서는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복원은 그때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복원의 길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고, 내일 또 누군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해나갈 일입니다.

성찰과 개혁이란 일상적으로 매일 일어나는 일이어야 하지, 한순간에 하고 끝내는 일이 아닙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 역시 변하고, 만나는 사람도 변하고, 상황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런 변화 속에 성찰과 개혁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만약 성찰과 개혁이 멈추면 이미 죽은 생명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성찰과 개혁이 없으면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산 송장입니다.

 

지나간 역사는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개혁의 방향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 부족한 글, 지금까지 함께 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