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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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년07월]신앙 42년 - 강완성

2021.06.25 17:09

편집실 조회 수:174

6월 월차제 신전강화

 

신앙 42

 

 

강완성(신화교회장)

 

(4) 여러분 반갑습니다.

코로나 시순에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하루하루 즐겁게 이 길을 따라오는 여러분들과 저 자신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요새 무더운 날씨이지만 오늘은 많이 덥지 않아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천리교 고성교회의 입교 1846월 월차제를 어버이신님의 수호와 은혜로 즐겁게 근행을 올릴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입교 142년의 오늘, 620, 지금부터 42년 전에 이 길에 입신했습니다. 그때가 교조님 100년제였습니다. 부산 수강원에 102기 월기로 들어가서 103기로 수료를 했습니다. 그때 들어가니까 유달 제3호가 발간이 되어서 교의 시간에 그 내용에 대한 많은 깨우침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달에 담긴 진주님과 교조님의 뜻에 어떤 내용이 있었느냐. 저도 지금 생각이 납니다만,

 

한 마디의 전도는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그것은 어버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까닭이다. 한번의 구제는 사람의 마음을 바꿔 놓아, 희망이 없던 목숨마저도 구제해 주신다. 그것은 어버이의 리를 받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의 역사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으로 나아가며 온 세계로 미쳐 간다. 이것이야말로 온 세계의 역사이다.

신악가

아홉에 여기까지 따라 오라

열 로 수확량이 정하여졌다 제

아홉에 마음을 작정하게 되며는

열 로 곳곳마다 평화 이루리 제

라고 가르치시었다.

(유달 제3호 중에서)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듣고 저도 이 길을 따라가면 인연이 납소되어 운명이 바뀌어 즐겁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습니다.

지금 입교 184년이니 42년째입니다. 제가 나이로 따지면 33살에 이 길에 입신해서 지금 75살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는 이 길을 따라갑니다.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약속한 으뜸하루, 으뜸의 달에 오늘 상급교회에서 근행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의 지난 이야기는 이런 감화 석상에서 몇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당시 42년 전에는 원남성교회에서 교의강습소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부산 동삼동 원남성교회에 초대회장님이 살아계실 때입니다. 그때 전국에서 4백여 명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뭔가도 모르고 4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앉아서 강의하시는 선생님들 교리 이야기 듣고, 듣기 싫으면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왔다,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 근처에 박영태라는 24살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앉지도 못하는 신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헤엄을 치듯이 흔들흔들 강습소 안을 뺑뺑 돕니다. 마치 올챙이 같았습니다. 양쪽 다리를 보니, 미꾸라지도 아닌 것이 올챙이도 아닌 것이 마치 뼈가 없는 듯 물렁물렁해 있었습니다. 제가 하도 궁금해서 영태야, 니 천리교 믿으면 이게 좋아진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으니 그래도 끝까지 해 봐야지예.”라는 겁니다. 말하는 건 정상입니다. 시간 관계상 중간이야기는 길게 못 하겠는데, 2달 만에 이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근행시간만 되면 이 아이가 원남성교회 신전에 올라가는 계단을 혼자 올라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고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일절 남의 도움을 거절하고 손마디에 피가 나고 무릎이 까지도록 계단을 올라 신전에 가 신전 행주를 가지고 헤엄을 치듯이 신전을 닦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났습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4백 명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얘가 일어났습니다. 얘가 일어나니,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아이고, 박영태가 일어났다.” 하니까 그때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전국에서 모인 4백 명의 수강생이 박수를 치는데, 웃음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고, 서로 감동받아서 부둥켜안는 등 하던 식사는 뒷전이고 완전히 잔치가 됐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원남성교회 신전 앞마당에서 초대회장님이 가운데 앉고, 그 둘레를 4백 명의 수강생이 둘러싸고 그 박영태가 자기가 어버이신님께 받은 수호를 수강생들에게 보여준다고 원둘레를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박수가 절로 났습니다. 당시 원남성교회 주위의 민가에서는 천리교회에서 오늘 잔치하나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천리교가 예사로 볼 것이 아니네, 저세상에 안락한 세상이 있든 어쨌든 간에 인간을 만든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우째 이런 신기한 수호를 보여주노.’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서 하루 4, 5시간의 강습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강사 선생님들의 과목마다 정성껏 듣고, ‘내가 어쨌든 죽을 때까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든 말든 내가 이 길을 따라가겠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또, 어렴풋한 기억으로 광일교회에서 왔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성씨는 박 씨였습니다. 보리타작하다가 중참으로 먹은 막걸리에 취했는지 모르겠는데, 보리타작하는 기계로 한쪽 팔이 딸려 들어가서 절골이 나서 부산에 있는 부산대학병원에서 치료하고 수술을 해서 몇 달 동안 있는데, 담당 정형외과 의사가 하는 말이 도저히 안 되겠으니, 팔을 절단합시다.”라고 했답니다. 그래도 이분이 신앙을 오랫동안 하셔서 신님을 믿는 마음이 한줄기 마음이 되어 있으니, “어쨌든 나는 어버이신님께 정성을 들이면 도움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팔을 절단하라는 병원에서 몇 달 만에 자진 퇴원을 했습니다. 그 후 저와 같이 부산 교의강습소 102기로 제 앞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분과 한 달 남짓 지낼 무렵엔가 같이 방 쓰는 다른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충무에서 온 그 아저씨가 어제 꿈에 보였는데, 어떤 연못가를 지나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팔을 다쳐 욕보는구나 수고가 많구나. 하면서 할머니 손을 가지고 박 씨 아저씨 사고 난 팔을 쓰다듬어 주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저는 예사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강습을 마치고 고성교회에 와서 생활하던 중에, 교회 월차제가 되어 교회 입구 테라스 나무 아래서 교우들 몇몇과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박 씨 아저씨가 양팔을 휘저으며 교회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반가워 달려가서 아저씨, 이 팔을 수호를 받았네요.”라고 하니, “, 수호를 받았지요.” 하고 당당히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끈기가 있고 믿음이 있고 한다고 하면 틀림없이 믿으며 끝까지 하는 마음으로 진실성 있게 하면 신님도 수호를 주십니다. 인간 마음이 들어가면 그대로 인간 마음의 수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제가 부산 원남성교회 강습소 102기로 들어가 103기로 수료하게 됐습니다. 그런 가운데 수료를 마치고, 상급 3대 회장님을 모신 가운데 나이가 저보다 5살 아래인 삼성포교소 김복자 씨와 백년가약의 식을 올려서 나름대로 이 길을 변함없이 따라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길을 따라오는 가운데 고향에서 포교하다가는 학교 동기들이나 일가친척들이 아이고, 니가 그리 부모 속을 끓여 쌓고 친척들에게 애를 먹여 쌓더만 여기 와서 또 이라노.”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바에는, 틀림없는 이 길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알려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종이에다 전국 각지를 몇 장에 적어서 삼성포교소 신전에 올린 후 3일간 기원을 올려서 제비뽑기하는 식으로 뽑아보니까, 영천이 나왔습니다. 교의강습소 중에 김종석이라는 구서교회장 둘째 아들이 소아마비인데 그 젊은이가 하는 말이 아저씨, 포교하려면, 영천이 사람 살기 좋은데 그리 가이소.” 했습니다.

저는 영천이 어디 있는가도 잘 몰랐습니다. 그렇게 제비가 나왔는데 이것도 신님의 뜻이다. 신님께 3일 동안 나름대로 공덕을 들이고 기원을 해서 이게 맞는 것 같다 해서 그렇게 거기 가서 생활을 했습니다.

무일푼으로 가서 생활을 했습니다. 배운 게 고생을 낙으로 삼아라.” 고생 속에서 신님을 만날 수 있지,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르면 자연적으로 인간생각이 많이 떠오른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어떻든 고생을 해보고 싶어서 일 원 한 푼 없이 갔는데, 동행자 두 사람이 생겨서 세 사람이 출발해서 영천 완산동이라는 시장통에 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큰 재래시장 중의 하나입니다.

천리교가 역사가 짧지만, 천리교가 있다는 것을 알리자 하는 생각으로 원남성 초대회장님 하시는 식으로 깃발을 하나 만들어서 목에 걸고 장날마다 골목을 다니며 천리교를 믿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 사람이 돈 것 같지도 않은데 천리교를 외치고 다니네.’ 하며 호기심에 돼지마구 같은 곳에 와서 참배도 하곤 했습니다. 신님도 제대로 모시지 않고 종이에 나무천리왕님이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팔족대는 옆에 장의사 하는 데 가서 합판을 구해서 만들고, 박자목은 하나 구해서 근행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오는 사람들에게 수훈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수훈을 전하니 희안하네 그렇게 아프더만 금방 괜찮아지네.”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수훈을 전하며 아픈 데만 좋아지는 게 아니다. 천리교를 믿으면 신상이 도와지는게 문제가 아니고 가정이 편해져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니까. 그분이 돼지마구 같은 천리교가 있는데 아픈 데를 만지는가 주무르는가 싶드만 좋아졌다고 얘기를 전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100일 작정을 해서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믿음을 가지려는 아주머니 서너 분을 통해서 방을 한 칸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버이신님의 수호입니다. 그렇게 거기서 시작을 했습니다. 어버이신님 수호로 활동을 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2~30명씩 오고 해서 재미도 났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생각이 드니까 모든 게 꿈결같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인근에 하양읍, 경산시까지 가서 어쨌든 이 길을 알리자는 마음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버이신님의 수호와 상급회장님의 덕분으로 현재의 교당을 수호를 받았습니다.

비만 오면 신전을 제외한 부엌이고, 신찬실이고 비가 새들어와서 양동이를 너덧 개 갖다 놓고 물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장마가 지는 때는 완전히 전쟁입니다. 그렇게 생활해오던 가운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1년 몇 개월 전부터 코로나로 활동에 제약을 받다 보니, 이런 시국에 근행장소를 제대로 손보자는 생각으로 역사에 임하게 됐습니다.

신자들의 도움도 받고 교당을 담보로 해서 이래저래 기금을 마련해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입교 183412일에 역사를 시작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난 53일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쓰러졌습니다. 처음에 쓰러진지도 모르고 역사 현장에서 히노끼싱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목수나 여러 인부와 이래저래 일을 하고 있는데 쓰러졌습니다. 급하게 119에 전화를 해서 집사람이 실려 갔습니다.

사람이 같이 생활할 때는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내고, 열도 내고 했는데, 막상 집사람이 입원을 하고 보니까. 짜증 낼 데도 없지만, 모든 것이 내 잘못이고 있을 때 잘해줄 것을 하는 후회와 마음의 간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면서 남 도운다는 것이 자기 사랑하는 부인 마음 하나 못 맞춰줘서 저런 모습을 만들었나 싶을 때는 기도 안 찼습니다.

그래도 그거는 뒷전이고 손발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땅의 토대가 없으니까, 혼자서 다 하려고 하니 이중 곱빼기입니다. 나이가 서른셋이면 모를까, 이제 칠십이 넘어 팔순을 보고 가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자기 맡은 역할을 잘 인지를 하고 해야 합니다. 근행을 볼 때마다 집사람에게 참 죄송하다. 내가 출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든지 신님의 도움을 받게끔 해야지, 내가 이래야 되겠나 싶었습니다. 코로나 시순이라고 정부 방침이야 어쨌든 하루도 쉬지 않고 신님 앞에 노력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 교회에 큰일이 생기니까 내가 용기가 죽고 내가 마음이 쓰러지면 누가 내 사랑하는 아내를, 집사람을 도와주겠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역법 위반으로 내가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띠를 둘러매고 마스크를 쓰고 영천시장에 나갑니다. 나가니, 주위 사람들이 천리교 아저씨 저분은 변함이 없네.”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두 달을 안 나가던 하양장에 갔더니, “아이고, 아저씨, 천리교가 이제 끝나고 아저씨가 죽었다는 말도 있던데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말에 죽기는 내가 왜 죽어요.”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아저씨가 천리교에서 뭔가 큰 도움을 받았기에 이런 시순에도 하는구나.” 하는 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어느 교우로부터 이런 글귀를 받게 돼서 잠시 읽어드릴까 합니다.

 

인류의 진실한 신 천리왕님이시여.

우리가 얼마나 거짓에 막말을 했으면

입을 마스크로 틀어막고 살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했으면 거리를 두고 살라 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손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어딜 가나 손 씻고 소독하라 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열 올리고 살았기에

가는 곳마다 체온을 체크하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비밀스럽게 다녔으면

가는 곳마다 연락처를 적어야 합니까?

 

이제 그만 어버이신님 노여움 거두시고

우리 인간 자녀들을 다시 한번 용서 속에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즐거운 삶의 세상으로 다시 한번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조석근행을 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마음이 힘들고 어려워도 어버이신님께서는 언제나 즐겁게 되어오너라 라고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겁니다.

신악가 45절에

언제나 도움을 서두르시니 조속히 즐겁게 되어오너라

라고 하셨듯이 언제나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은 신전에 있든, 방구석에 있든 앉아서 생각 속에서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활동하면서, 이 길의 전도지 한 장이라도 전하면서 사는 겁니다. 어려운 시순에 전도지를 갖고 나가서 나눠주면 안 받는 사람은 안 받지만 받는 사람은 공손하게 잘 받습니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 제게 드는 생각은 위기가 나에게는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반드시 새로운 일이 생길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거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은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 틀림없이 좋은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런 속에 기운이 빠지고 용기가 죽어서 아이고, 이렇게 어려운데 내가 이 길을 가것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자체가 어버이신님에 대한 은혜가 아니라 신님의 마음에 섭섭함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나마 근행장소를 아담하게 마련했습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낙성봉고제는 못했지만, 동월이하고 저하고 둘이서 짝꿍이 되어 얼마나 힘이 되고 좋은지 모릅니다. 사람이 많이 있고 가족이 오순도순할 때가 봄날인데, 매일 그런 봄날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또 어려움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마음이 정해지지 않고 마음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므로 정신이 차려집니다.

 

항상 친절하고 어버이신님에게 보답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저는 항상 은혜보답을 먼저 생각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이 성질이 많이 변했네, 어쨌네 해도 저 스스로 자신을 많이 점검해봅니다. 내가 과연 어버이신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는가. 교조님 모본 속에 내가 조금이라도 어버이 모본을 따라왔는가 하고 점검해볼 때, 아직도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까운 일가친척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니 천리교 가더만 그래도 지금까지 하는 것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어려운 가운데 걸어갈 수 있는 그 정신이 참 대단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전화가 와서 천리교는 어떤 종교인지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천리교는 내세에 안락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금생의 극락도 천국도 이 세상에서 내가 즐겁게 살아야 하는, 천리, 하늘의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만가지 구제의 근본인 근행을 보면 신기한 도움을 받고 인연이 납소되어 조상님이나 집안에서 뿌려진 악인연들이 납소되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식의 답변을 전화상으로 주고받으면서 바로 답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내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코로나 시순이 종식되고 박멸되는 것도 이 길을 걷는 용재들의 활동과 실천, 노력이 어버이신님의 마음에 들 때 어버이신님, 교조님으로부터 평화롭고 좋은 나날이 되어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이 길에 정진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기원드립니다. 함께 감사한 가운데 구제한줄기에 최선을 다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