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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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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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3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12

 

이시중

 

 

9. 교단의 성립과 분열, 이합집산, 그리고 분단 고착화 2

 

통합은 다양한 이익 관계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게 되어있습니다. 각기 다른 이해와 이익에 따라 세가 뭉치고 흩어지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력 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큰 통합의 리더십이 없는 한, 조직과 체제가 완비되지 않는 한, 교의가 온전하게 정비되지 않는 한, 교육과 자기 수련이 적절하게 수행되지 한, 충분한 대화와 소통이 동반되지 않는 한, 서로에 대한 관용과 기다림이 없는 한, 밖으로 아무리 통합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안으로는 분열의 씨앗이 언제나 싹트기 마련입니다. 분열은 통합을 지향하고, 통합은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천리교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고자 하였지만, 속마음은 언제나 달랐습니다. 한쪽은 자주적이고 자립하는 독자적 교단을 만들려 했고, 또 한쪽에서는 터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본부와 어떻게 해서든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물과 불처럼 55부로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밀고 당기면서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툼으로 좋은 시절을 다 허비하고, 결국에는 분열이 되고, 고착화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채질하는 외부의 요인으로는 일제 식민지배를 겪어야 했던 한민족의 수난과 그 속에서 생겨난 보통 시민들의 심성, 그것을 끊임없이 자극하려는 여론몰이와 정부의 통제와 간섭이 있었고, 그리고 교회본부의 성급하고 적절하지 못한 대응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이 길은 여러 사건이 숨 가쁘게 돌아가고, 결국에는 교단이 다시 분열되면서 그것이 고착화되는 길로 접어들어 버립니다.

우선 1983814일 제5대 교통으로 김기수 선생이 취임합니다. 김기수 교통은 이 나라 천리교인의 구심체가 되는 교단 청사 역사에 최대 역점을 두고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분열이 시작되는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단본부를 쓰고 있던 청파동 11213번지 위에 새 건물을 앉히자는 것이 교통 측의 주장이었고, 거기는 좁으니 더 넓은 땅을 물색해서 역사를 하자는 것이 반대편의 주장이었습니다. 결국 청파동에 역사를 추진하기로 했지만, 더 넓은 부지를 추진하자는 주장도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이것저것 동시에 추진하게 된 것이지요. 청파동 역사는 교통을 중심으로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추진되어 갔지만, 그에 맞불을 붙이던 새 대지 매입 추진은 청파동 역사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자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참여한 사람들은 청파동 역사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도 않은 채 소극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처음부터 청파동 역사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19851015일 교통은 교령 제3호를 발포하여, 교단본부 청사 역사에 반발한다는 이유로 경남교구를 문제 교구로 지목하고, 조문봉 교구장을 해임하기에 이릅니다. 이로써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열의 골은 깊어갔습니다. 이에 경남교구는 어쩔 수 없이 자체 수습위원회를 열고 19851118일 이동규 선화교회 초대를 경남교구장으로 추대하여 교단에서 1213일 정식 임명받습니다. 잠시 사태가 수습되는 듯했지만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한편 해마다 때때로 3·1절이나 8·15 광복절이 되면 T.V, 신문, 라디오, 잡지 따위에서 친일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왜색종교 운운하며 천리교에 대한 나쁜 여론몰이들이 형성되곤 하지 않습니까? 1985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14일 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매체에서 천리교를 왜색종교라 칭하는 가운데 일본 국조 신을 신봉하고 민족의 정통성을 혼미하게 한다라는 주장과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되면 신앙인의 신념이나 의욕이 한풀 꺾이게 마련이고, 전도 포교 활동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거기다가 정부 당국에서도 조사를 나온다든지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든지 하게 되지요.

따라서 1985923일에 문공부 종무과에서는 3개 항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며 해명을 요구하고 조사까지 하기에 이릅니다. 신앙의 의식(儀式), 제전(祭典), 목표물(目標物)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허가 당시와 같이 이상 없이 하느냐, 민족 정서에 위배 되는 행위나 활동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이러한 요구와 조사, 감시와 단속은 천리교가 이 땅에 몇십 년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일입니다. 그만큼 천리교는 한국에서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아직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천리교가 성장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무리가 있다고나 할까요.

 

물론 당국에서 경계하며 간섭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개중에 우리가 제공하는 빌미도 분명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시로 터져 나오는 교회의 분규나, 고소 고발 사건 따위가 그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원남성교회 문제가 대내외적으로 한창 떠들썩했고, 충무교회 초대 김철암 선생이 터뜨린 신각 내 목표물 공개와 철거 사건은 충격과 파장이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학계나 언론에서 제기하는 비판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기고 있던 김철암은 어느 날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신각 문을 열어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일본 천황가를 상징하는 야타노카가미(八咫鏡)가 나왔다는 것이지요. 지금껏 예배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 언론이나 학계에서 제기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고 속았다는 생각에 분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것을 끄집어내어 사진을 찍고 신각을 철거합니다.

그러한 소문이 전국 각지에 퍼져나가기 시작했겠지요.

 

이에 따라 당연히 교단에서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14일에는 전국 주요한 교회장 모임을 가져 의논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배 목표인 신각을 철거하고, 감로대를 예배 목표로 복원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교단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충무교회 2대교회장 김동연)도 구성하지요. 1124일에는 교령 제5호를 발포하여 신각 대신 감로대 형상으로 바꾸도록 전국에 지시를 내립니다.

그러자 교회, 포교소에 놀라움과 당혹감과 분노가 확산되어 가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신각을 내리고, 부수고, 태우고, 목표물을 강물에 던져버리거나 똥통에 던져버리는 대 소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각이 내려지고 그 자리에 모형 감로대가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교단본부 신전에도 19851213일에 모형 감로대를 설치하여 진좌제를 거행하고, 이듬해 19일 국내 최상급교회장 회의를 열어 감로대 복원조치를 재차 확인하고 계속 추진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반발하는 곳에서는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도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에 교단에서는 한국토착화에 동조하지 않는 교회와 포교소에는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공문을 내려보내고, 정부관계 행정기관에도 협조 공문을 보내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당연히 크고 작은 잡음이 끊임없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급기야는 교단의 지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선동한다는 이유로 교단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1986330일 경남교구장 이동규, 부산교구장 배차효, 제주교구장 양정남의 해임을 결의합니다. 교단의 이러한 결의는 더욱더 분열을 부추겨 터전파(종속파)와 토착파(자주파)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나아가도록 몰아갔습니다.

 

429일 경남, 부산교구가 합동으로 교단정상화 수습위원회를 발족합니다. 614일 대한천리교 교단본부에서는 교령 제7호를 발포하여 경남교구를 해산하고, 이동규 교구장도 해임합니다. 또 교령 제8호를 발포하여 부산교구도 폐쇄를 지시합니다. 이에 반발하여 터전 중심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던 용재들이 진해로 모여 618한국천리교연합회’(회장; 이동규 선화교회장, 경남 진해시 여좌동 108-10번지)를 결성하고, 토착화를 내세운 기존 교단과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1988224한국천리교연합회는 법인 자격을 취득(594)하여 재단법인 한국천리교연합회’(초대 이사장 이동규)로 됩니다. 이때부터 교단은 법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1993218재단법인 한국천리교연합회혜성교회’(2대교회장 김웅선)와 뜻을 같이하여 통합교단이라 칭하며, 초대교통으로 김기수가 됩니다. 말이 통합교단이지 한국천리교연합회에 몇몇 교회가 흡수된 형국이라 통합교단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명칭입니다. 교단 대 교단이 합쳐진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당시 김기수 교통은 고령으로 올바른 자기 판단이 어려운 정신상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재단법인 한국천리교연합회1996913일에 문화체육부 승인을 얻어 재단법인 천리교한국교단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 땅의 천리교는 한국토착화라는 거대한 파도가 거세게 일어났고, 그에 따른 반작용도 거칠어지면서 소용돌이치고, 끝내 분열로, 그 분열이 끝내 고착화로 치달아갔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벌어질 때마다 순수한 천리교인들은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였고, 신뢰를 갖지 못하여 떠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설사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앙신념이 현저하게 옅어지면서 활력을 잃어갔고, 신명 나는 신앙생활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한때 몇십만을 헤아리던 신자가 지금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1~2만 명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평이며, 실제로 각 교회에 참배하는 사람들은 그 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평입니다.

 

흔히 이 길에서 자주파니 종속파니 하면서 파를 가르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주와 종속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주 없는 종속, 종속 없는 자주는 없습니다. 자주에 이미 종속이 내포되어있고, 종속에는 자주가 내포되어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좌는 우에 의존하고, 우는 좌에 의존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이 있다는 것은 밖이 있다는 말이고, 밖이 있다는 것은 안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안이 밖을 거부하고 우가 좌를 거부하면, 이미 안도 없고 우도 없습니다. 안과 우는 밖과 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키면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지려면 지켜야 합니다. 교통질서를 지키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막히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어디든 불안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습니다. 질서를 지킨다는 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적절한 구속은 삶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이 이 길에서 말하는 55, 둘하나의 이치입니다. 이것으로 교단사를 바라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 땅에서 이 길이 걸어온 혼란과 어려움은 이러한 55부를 잃고, 둘하나의 이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이 지닌 특수성과 천리교 가르침이 지닌 보편성을 살려내지를 못했습니다. 나르는 새나 비행기의 날개처럼, 서로 의지하고 어깨동무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서로를 무시하고 적대시하면서 상대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터전에 이어지는 결속도 당연히 필요했고, 이 땅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처절한 자립의 몸부림도 분명 필요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이해와 관용이 부족하여 양극단으로 치닫고, 분열을 조장하고, 그 분열이 고착화 되도록 몰아갔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촉발되었던 분열의 핵심에는 신각 속에 있던 예배의 목표물이 있습니다. 이른바 야타노카가미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삼종신기(三種神器)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종신기는 칼, 곡옥(굽은 구슬), 거울(둥근 거울, 야타노카가미)입니다. 실물 거울은 미에현의 이세신궁, 실물 칼은 나고야시 아츠타신궁에 신체로 모셔져 있고, 이 둘의 대용품(모조품)과 구슬이 황궁에 모셔져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된 적이 없고 더군다나 관리하는 사람도 보지 못하며, 천황조차도 쉽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삼종신기는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신격화하기 위한 상징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칼은 무력으로 왕의 위압을 상징하고, 곡옥은 풍요로 생명에 대한 사랑과 다스림과 자애로움을 상징하며, 거울은 자신을 돌이켜 비추어보는 반성과 참회 그리고 열린 마음을 추구하는 제사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 원래 야타노카가미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제사에 쓰이는 거울 일체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였습니다.

(<블로그 예스24>, 시사재팬/ <나무위키>, 미쿠사노카무다카라 참조)

 

그렇다면 야타노카가미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첫째, ‘야타노카가미가 일본 황실에서 내려오는 삼종신기의 하나라고 할 때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황실의 상징 야타노카가미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둘째, ‘야타노카가미실물은 이세신궁, 대용품은 황궁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희소가치의 극대치입니다. 마음껏 만들어서 아무 곳에나 안치하는 헐값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셋째, ‘야타노카가미는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제사에 쓰이는 거울 일체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특별난 것도 아닙니다. 천리교 제사상에 쓰이나, 신도 제사상에 쓰이나, 불교 제사상에 쓰이나 매 한 가지 아닙니까?

문제는 마음입니다. 어떤 신념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돌을 보고, 부처님하고 부르면 부처님이 깃들고, 하느님하고 부르면 하느님이 깃들고, 어버이신님 하면 어버이신님이 깃드는 것입니다. 마음먹는 대로 가고, 정성 기울이는 대로 가고, 정신 쏟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깃들고 내 정성에 깃들고 내 정신에 따라 깃드는 것이지, 돌 자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어버이신님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제까지 내 생명을 살리는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가, 오늘 야타노카가미라 하여 내팽개치고 똥통에 처박아버리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것을 버리는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로 안타깝고 두렵습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거울은 고대로부터 제사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거울이 지닌 의미가 자기를 비추어서 살핀다, 되돌아 반성한다라는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자기 정화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어느 제사든지 상징적인 도구로 거울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거울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