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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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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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101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10

 

이시중

 

 

8. 한국전쟁 전후에서 한일협정 전후까지 3

 

해방과 더불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천리교가 온갖 어려움을 딛고 기적 같이 되살아났지만, 이것은 곧 안팎으로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교단 내에서는 크고 작은 파벌 싸움이 일어났고, 밖으로는 정부 탄압과 타 종교인의 공격이 있어 다시 한번 한국에서 천리교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1962년 박정희 혁명정부의 정일권 국무총리는 소위 <행정각서>를 발표합니다. 여기에 사회 5대 악을 들어 그것을 척결해 나가겠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회 5대 악이란 밀수, 도박, 밀주, 깡패, 유사 종교단체입니다. 이것에 의해 천리교는 유사 종교단체로 몰려 탄압받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문교부는 문교부대로 조처를 하여 간섭과 압박을 하고, 내무부는 내무부대로 각 지역 경찰서와 파출소에 훈령을 내려 치안 명목으로 단속하고 억압하였습니다. 이것이 4년간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19648월 이후에는 더욱 강한 탄압이 1년여 계속 이어집니다.

 

천리교 탄압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천리교는 사이비 종교처럼 병을 고친다 하면서 이상한 손짓과 이상한 주문을 하여 순진한 사람을 기만하고, 금품을 갈취하여 사회를 어지럽히고, 말썽을 많이 피우고 있다. 또 해방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주체성 있는 종교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시정하라는 것이었죠.

(대한천리교사2306-7쪽 참조)

이런 명령과 지시에 따라 일선 경찰서와 파출소에서는 천리교에 대한 단속과 감시를 하고 사사건건 간섭합니다.

근행 보는 일이 경범죄 처벌법의 위반이 되어 소음을 일으킨 죄로 즉결처분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나 포교소 입구에서 감시하고, 때로는 음덕함에 헌금도 하지 못하게 막아서기도 했습니다. 요주의 대상 인물은 주기적으로 관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기도 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사람이 나와 조사를 해가기도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며칠씩 구류를 사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교단 회의 때는 형사가 배석하기도 합니다.

정치 차원의 탄압도 탄압이지만 타 종교계도 국가 시책에 편승하여 천리교를 뿌리 뽑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전국적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킵니다. 교회 간판을 떼어내고, 대문을 박살내고, 돌을 던져 지붕을 망가뜨리고 유리창을 깨고, 방문을 부수고, 신전에 난입하여 북을 찢고, 신자를 못살게 구는 따위 난동을 부리는 것은 예삿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처벌은 미미하였습니다. 처벌은 커녕 오히려 교회와 포교소가 소음과 안면방해라는 이유로 당국에 고소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천리교 신앙하는 공무원이나 교사들은 징계나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자녀들도 학교에서 멸시를 받고, 그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진해교회사62-65), 오직 근행뿐이야147-151,

대한천리교사290, 308쪽 참조)

 

이런 사정을 허태규 교통은 2003718일 전도청 신전강화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석근행과 월차제 시 경찰이 파견되어 감시를 하였으며, 죄명이 없으므로 좌우 통행위반을 했다하여 도로교통법을 적용, 벌금형과 구류형에 처했고, 공직에 근무하는 천리교인을 색출하여 신분상에 불이익을 받도록 하였으며, 천리교인 자녀학생들에게 교실에서 손들고 세워서 부모형제 가족들에게 천리교를 신앙을 못하도록 하는 등, 탄압의 가지 수는 부지기수였다.

(<도우> 2003. 8월호)

 

이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개인은 개인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여러 경로로 진정서를 내고,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성 초대 교회장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유력한 인사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하고, 고성교회 20대 청년인 최금용은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왜색종교라 하여 천리교를 탄압하면 중앙청 앞에서 분신자살하겠다.’는 결의로 진정서를 냅니다. 이에 대통령 비서실장 한병기로부터 내사해서 잘 조치할 것이니 양지하시기 바란다.”는 답변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단은 교단대로 정부 간섭을 받아 가며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합니다. 전국 교회장과 포교소장에게 하달한 교통 최재한 명의로 낸 1964103일 자 공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명(神名)에 대하여; 십주신님의 호칭을 십전대덕의 리로 한다.

2. 신단(神壇)에 대해서; 한국식 기와집의 모형을 본 딴 것임을 확인한다.

3. 마크(紋章)에 대해서; 매화문의 마크와 각종 표지는 회수 철거하고 개정한다.

4. 교복·교모는 일부 개정한다.

5. 신경(神鏡)은 철거한다.

6. 박수치고 주먹 쥐고 하는 예배는 시정한다.

7. 안등(安燈)은 없앤다.

8. 신악가에 부채 사용은 없앤다.

9. 기타 왜색은 일소한다.

10.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포교 교육을 받은 자는 자중한다.

11. 청년회는 해산한다. (1961년 진해교회 후계자 나상기가 만든 청년회가 1964926일 자로 이미 해체 결정이 되었고, 이후 청년회 운운하지 말도록 한다.)

12. 일본 천리교와 교류하지 않는다. (, 문화 친선 교류와 공무는 예외로 한다.)

13. 북과 현종의 장식은 그 형을 변경하고, 팔족대도 팔족이 아닌 것으로 한다.

 

더 나아가 교통 최재한 명의로 19641014일 자에 교회본부 진주 나카야마 쇼젱(中山正善) 앞으로도 공문을 발송합니다. 대한천리교단이 자주교단임을 천명하고, 교회본부와는 호혜·평등의 국제적 친선유대 이외에는 일체 교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와 국민이 수집하여 알려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대한천리교사2309-320)

 

해방 이후에도 조선포교관리소가 계속 존속되고 있다.

해방 이후에도 이와다 조사부로가 포교관리자로 있다.

이와다 조사부로 주재로 매월 14일 월례제를 지내고 있다.

해방 전 우리나라 지명을 사용하여 설립한 교회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교회를 00부하 또는 부속 등으로 공공연하게 예속된 교회로 취급하고 있다.

 

한편, 교단 관계자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정치인과 정부 요인들과 교섭을 시작하고, 정부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정을 허태규 교통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최재한 교통과 원로 선생 몇 분이 정치인을 통해서 정부요로에 교섭을 시작하였고, 한국천리교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건이었으므로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해결하려 애를 썼다.

정치인의 중재로 정부와 교단 대표자 간의 대화가 내무부 회의실에서 있었는데, 정부에서는 김득황 내무부차관, 치안국 문화반장 강민찬 경감, 황경사, 내무부 무관 2명이, 교단 측에서는 최재한 교통, 김기수 선생, 김태봉 선생, 나상기 선생, 허태규 선생 등 다섯 명이었다. 대화가 아니라 대격전이 일어났다.

(<도우> 2003. 8월호)

 

그러던 중 진전이 없던 협상이 급물살 타며 해결하게 되는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천리시와 천리대학 조선학과의 내용에 정통한 학계 출신 정치인의 주선으로 현역의원 13명과 당료(黨僚)관계자 7, 그리고 교단 원로 선생들과 실무진을 포함한 39명의 터전 귀참단이 구성되어 출발하기 직전 정부의 방해공작으로 취소가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국제사건으로 번지게 되고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가 됩니다. 그 당시 관계된 국회의원은 길재호, 예춘호, 이종국, 김동환, 오치성, 김택수, 조시형, 양순직, 최석림, 박규상, 최영근 의원을 비롯한 13명이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정치인은 정치에, 공무원은 공무에, 기업인은 기업에, 종교인은 종교에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며 정리합니다. (<도우> 2003. 8월호 참조)

이를 계기로 경찰의 단속과 탄압이 사라지고, 잡혀갔던 사람들이 풀려났으며, 법정 싸움으로 번졌던 일들이 수습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 공식적으로는 정부 탄압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시종일관 천리교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은 계속 곱지 못했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한 예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경선교회 추말순 선생의 구술 내용입니다.

 

사회단체나 종교단체에 전화를 우선 설치해준다는 전신전화국의 안내공고문이 있었다. 구비서류를 갖춰 신청했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답이 없다. 그래서 전화국에 찾아가 문의를 해보니 다른 신청자들은 다 설치되었는데 경선교회만 빠져있다. 그들의 답이 천리교는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의해도 소용이 없고, 시청 경찰서를 찾아봤지만, 천리교는 통하지 않았다.

(연수회보. 728월호, 4-5. 참조)

 

왜색 시비는 때때로 지상 방송이나 언론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시비를 거는 타 종교인이나 일반 시민들의 모습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이것은 발생지가 일본이고, 일본과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한국에서 뿌리내려야 하는 천리교가 이겨내야 할 큰 시련입니다.

한국 포교에 언제나 관심이 많았던 2대 진주님은 한 때 수행원들에게 한국에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수행원들은 지금의 사정으로는 어렵습니다.”고 대답하자 팔이나 발이나 하나가 부러져도 좋으니까 한국에 갔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지시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한국에 갈 수 없는 상황에 가슴 아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671114일 출직하실 때까지 2대 진주님은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미치노토모 1968. 3월호, 진해교회사101, 천리교사전1038쪽 참조)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천리교가 나아가는 길에는 아주 많은 제약과 한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한일 간에 불행했던 역사적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채 아물지도 않고, 민중들 사이에 아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국주의나 국가신도에 의해 왜곡되었던 천리교 자체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한계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이 길에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큰 숙제입니다. 이것이 안팎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간다면, 천리교 자체가 가진 위대성과 잠재력이 한때 반짝 빛나더라도 어느새 점차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반일 정서가 팽배한 이 땅에서 한국적인 토착 천리교를 만들어 자립하자는 움직임은 늘 있어 왔고, 이에 반발하여 어떻게든 교회본부와 터전은 연결해 가야 한다는 움직임이 맞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적인 것도 아니고 일본적인 것도 아닌 순수한 본래의 천리교는 무엇일까. 그것을 탐구하고 실천해나가려던 후대 사람들의 고뇌와 고민은 깊어 갔습니다.

한국에서 천리교는 항상 이런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떠나가고, 점차 활력도 잃어 갔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도약하려는 시기에 그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천리교는 차츰차츰 나락으로 떨어져 갔습니다.

앞으로 계속 전개될 이 길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끊임없이 무한 반복하느냐 아니면 그 한계를 극복하여 새롭게 도약하느냐, 이것이 늘 큰 문제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