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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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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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9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8

 

 

이시중

 

8. 한국전쟁 전후에서 한일협정 전후까지 1

 

6·25전쟁은 또 한 번 한국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일제식민지에서 이제 갓 벗어나자마자 닥친 전쟁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또다시 젊은이들은 전장에 끌려가고,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야 하는 피난민 신세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이 휘몰아쳤습니다. 새롭게 발돋움하려고 애를 쓰던 이 길 역시 다시 주저앉고 말 상황으로 몰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이 땅의 선각자들은 어버이신님의 절대적 존재를 믿고, 신앙적 열정을 불태우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중에 미선교회 초대 김선장 선생의 당시 모습이 남아 있어서 먼저 소개를 합니다.

전쟁의 포화가 남으로 번져오면서 마산까지 미치자 이제 피난을 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선장은 한국인 첫 포교사답게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피난을 가지 않은 채 교당을 사수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당은 군에 의해 접수가 되고, 부상자를 위한 임시수용시설로 이용되기에 이릅니다. 선장은 이때 이들 부상자를 마치 친자식처럼 돌봅니다. 이불도 갖다주고, 된장 간장 고추장도 갖다주면서 무엇이든 퍼먹였습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부상병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며 따뜻한 위로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알든 모르든 수훈을 전하고 신지를 상처에 붙여주면서 신님의 뜻을 전해 주었습니다. 갓 태어난 모 경위의 갓난아이가 옷이 없자 선장은 부인이 아끼던 옷을 고쳐 아이에게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너무나 진실하고 자비로운 모습에, 혼란과 절망에 빠져있던 병상의 젊은이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개중에는 선장이 가르쳐준 신악가를 따라 부르는가 하면, 뒷날 선장을 찾아오거나 연락을 주는 사람, 음으로 양으로 선장 가족을 돌보며 관계를 이어오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진실한 포교사의 모습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변을 밝히며 빛을 발하였습니다. (김선장의 일생. 200-205쪽 참조)

 

이 외 한국전쟁 전후에서 활약하였던 선각자들은 여러 갈래 신앙 경로를 거칩니다. 첫째는 해방 전부터 포교하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국내에서 일반 평신앙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포교 일선에 나서게 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본에서 신앙하다가 귀국한 포교사들의 맹활약입니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괴롭고 지치고 병든 이 땅의 민중들에게 어버이신님의 신명을 전하면서 희망의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김진조(경심교회 초대), 김태봉(대구교회 초대), 김기수(혜성교회 초대) 선생 같은 분들입니다. 이들은 식민지 한국에서 신앙을 시작하였고, 포교를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든 천리교를 다시 이 땅 위에 새롭게 꽃피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신앙인들을 찾고, 모으고, 연대해 나가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앞서서 말했듯이 김기수를 중심으로 한 천리교연합회와 이순자 김태봉을 중심으로 한 천경수양원이었습니다.

전쟁이 확산되면서 천경수양원은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갔지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초대 원장이신 이순자 선생이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확해지자 다소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하여 2대 원장으로 김진조, 부원장으로 김점이(부산교회 초대) 선생을 내세웁니다. 김태봉은 여전히 여기저기 쟁쟁한 포교사들을 찾아다니며 어떻게 해서든 천리교를 재건을 위하여 노력을 다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천경수양원1952313일에 대한천리교연합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때 김진조는 회장이 되고, 김선장은 명예회장이 됩니다. 그러다가 김기수 선생이 주도를 하고 있는 천리교연합회와 통합하여 19531014일에 대한천리교본원이 탄생하면서 본부를 서울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최초로 전체가 통합된 모임체였지만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김순염 선생 같은 분들입니다.

김순염은 훗날 진해교회 초대가 된 분으로 원래 마산의 둘째가라 하면 서러워할 정도의 대단한 갑부 김한영의 딸이었습니다. 진주여고를 거쳐 전문교육(진주사범전문대 미술과 졸업, 경성전문 미술학교 졸업)까지 받은 인텔리 여성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까지 공부한 남편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김순염은 어린 시절부터 허약하여 중이염, 축농증, 기관지염 따위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며 병원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합니다. 1920년대부터 김선장 밑에서 신앙을 이어오면서 강습도 받고, 별석도 받고, 수훈의 리, 보권훈도까지 받지만, 포교만큼은 한사코 반대하며 남의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남편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큰아들 나상기가 군 입대했다가 급성 뇌막염으로 빈사 상태에 이르게 되자, 1952년 초 집에 가정신님을 모시게 되고, 나중에는 진주로, 다시 진해로 자리를 옮겨 단독포교에 나서게 됩니다. 그동안 김태봉, 김점이 선생은 여러 차례 포교를 권유했지만 귀담아듣지 않다가 큰아들에게 큰 신상이 덮쳐 사경을 헤매자 결정적으로 포교를 결심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진주로 단독포교 나설 때도, 그곳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진해로 옮길 때도, 이후 포교를 계속 진행해나가는 가운데서도 김태봉, 김점이 선생은 김순염을 적극 도와 포교가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돕습니다. 포교한 지 불과 5년도 지나지 않는 1955년에 현재 진해교회가 있는 부지를 확보하게 되고, 그 일부를 전체 천리교를 위해 내놓습니다. 그 자리에 연합회 신전과 교의강습소가 세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그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순염에게 신앙을 심고 키우고 자라게 한 것은 김선장이었지만, 포교를 적극 권유하고 포교 생활을 도운 것은 계통을 초월한 김태봉, 김점이였습니다. 김선장 선생은 김순염에게 가정신님을 모셔준 지 1년 남짓 만에 출직하고 말았지만 이후 포교 활동에서는 김태봉, 김점이 선생 같은 계통을 초월한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김순염 선생이 상급에 기울이는 정성에 무엇 하나 소홀함이 있거나 훼손되는 법도 없었습니다.

(진해교회사. 33-52, 80-82쪽 참조)

 

세 번째 부류는 최재한(원남성교회 초대), 이영수(고성교회 초대), 김점이(부산교회 초대), 배대봉(동광교회 초대) 선생 같은 분들입니다.

최재한은 일본에 있을 때 공갈, 협박, 사기 도박꾼으로 유명했고, 싸움도 잘하는 일류 깡패였습니다. 나중에는 전국 지명 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원래 나병을 앓고 있는 데다가 나중에는 위장병, 폐결핵, 치핵, 임질까지 얻고,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가 하면 실명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촌 누이를 통해 겡와분교회 기무라 히데오 선생을 만나 천리교를 알게 됩니다. 천리 이치를 듣고 두 번째 만나 수훈을 받아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자 최재한이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 말에 기무라 선생은

신님께 은혜 보답을 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남을 돕는 것이 첫째입니다. 세상에는 누워서 고칠 희망도 없는 괴로움에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조님은 남을 도움으로써 내가 도와진다고 가르쳐 주셨으니까. 이제부터는 그런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 씨는 아직 바깥출입을 못 하는 몸이니까 찾아오는 사람마다 신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전도란 마음만 있으면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겁니다.”

(회생의 모험자 최재한. 72)

하고 일러 줍니다.

그 말을 듣고 그날부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실명에다 집 밖을 나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어서 창문을 열고 방안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천리교 믿어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차츰 몰라보게 몸이 회복되면서 이후 교회본부 수양과를 수료하고, 겡와분교회에서 1년 입주하여 히노끼싱한 후,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합니다. 열렬하게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1954920일에 겡하쿠분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전국 지명 수배자가 차츰 얼굴이 알려지면서 일본에 머물러 있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밀항선을 타고 삼천포를 통해 한국으로 건너옵니다. 이후 놀라운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에서 가장 큰 원남성교회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영수는 일본 히로시마에 있으면서 원폭 피해를 보아 고생하게 됩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진통제 주사를 맞을 정도로 하루하루 힘겹게 연명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치병을 위하여 먼저 기독교를 찾아가 매일 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곳 목사가 당신은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으로 나을 병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혹 천리교에 가면 나을지 모를까.”하여 스스로 천리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5269일 히로시마역에서 겡와분교회 기무라 히데오 선생을 만나 그 길로 교회에 참배하고 입신하게 됩니다. 최재한과 이영수의 첫 만남은 겡와분교회에서 처음 이루어집니다. 이영수는 71일 수양과 135기로 입학하여 927일에 수료합니다. 수양과 생활 중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포교 작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하고, 가지고 있던 금덩어리를 겡와분교회에 모두 올린 후 신님을 모시고 한국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한국에서 포교하는 가운데 의문이 있거나 지도받을 일이 있으면 언제나 기무라 선생께 편지를 보내 회답을 받곤 했습니다. 거의 1주일에 한 번 편지가 오고 갈 정도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기무라 선생의 뜻을 받들어 나중에 한국으로 귀국한 최재한 선생을 적극 도와 한국에 천리교를 새롭게 꽃피어나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합니다. (다른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성교회 포교개설50년 기념, 근행이 제일이야.241-248쪽을 참조합니다. ‘겡와분교회 3대교회장, 기무라 미찌꼬구술 내용입니다.)

김점이는 남편을 따라 일본 시모노세키에 가서 살다가 장남 김득수가 급성 폐암으로 신음을 하자, 이를 구제받기 위하여 19203월에 나카쯔 대교회의 유우칸 분교회에 입신합니다. 그러다가 3남 김득상이 뇌막염을 앓자 포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교의강습소에 39기로 수료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3911월에 관선포교소를 개설합니다.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건너오지만 바로 포교를 이어갈 수 있는 사정이 아니라 잠시 포교를 접습니다. 그러다가 3남 김득상이 좌골탈골이라는 신상의 가르침을 받자 1949년 부산 보수동에서 다시 포교를 시작합니다. 김점이는 성격이 소탈하고 검소하고 매사에 거리낌 없이 행동하며 적극적이었습니다. 친화력도 뛰어나고 농담을 섞은 욕설을 잘하여 욕쟁이 할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습니다. 예전에 신앙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과 용기를 불어넣어 다시 신앙하도록 일깨웠습니다. 천리교의 재건을 위해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대한천리교사2. 99-101쪽 참조)

배대봉(裵大奉)은 청운을 품고 일본 와카야마시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인 김봉례가 신상을 얻고 처남의 권유도 있고 하여 194010월경에 와카가와 분교회에 입신하게 됩니다. 열심히 신앙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한국으로 건너옵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얼마 동안 생업에 열중하다가 사정이 생겨 195524일 진해에서 동광포교소를 설치하여 다시 신앙에 전념하게 됩니다. (대한천리교사2. 113-114쪽 참조)

 

이 세 부류 사람들의 신앙 경로는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이 땅에 천리교를 견인해 갔습니다. 여기다가 1957년부터 시작한 교의강습회가 서울에서 1-4, 미선교회에서 5, 진해교회에서 6기를 거치면서 점차 진해에 교의강습소가 정착해 갑니다. 교의강습소는 천리교가 이 땅에서 새롭게 도약하는데 아주 큰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96012월 말에 가면 이미 순수 한국인들의 열성과 노력만으로도 해방 이전의 교세에 근접해 갑니다. 교회 총수가 158개소(교회 66개소, 포교소 92개소), 지역별로는 서울 23개소, 경기 6개소, 충남 2개소, 전남 1개소, 경북 15개소, 경남111개소에 이릅니다. 총 신도수 36,616(남자 15,542, 여자 21,074)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활약하셨던 선각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계속)

 

p.s 천리교 역사에 대한 자료가 있는 분들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필요한 자료 부족으로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