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둘하나 98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7

 

이시중

 

7. 8·15 광복에서 한국전쟁 전후까지 2

 

36년간 억압과 탄압과 굴욕을 받아 온 한민족에게 찾아온 8·15 광복은 기쁨과 환희와 해방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정부 상태에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쫓겨나기 전에 총독부와 각 지방 관서에 있던 각종 서적과 문건들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행한 잔악하고 잔혹한 흔적들을 지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불빛이 무려 10여 일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나 군에 의해 각 전쟁터나 열악한 작업장으로 강제로 연행되어 갔던 학병, 징병, 노동자, 위안부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감동적인 모습도 있었고, 귀국하지 못한, 귀국할 수도 없었던 동포들의 아픔과 슬픔과 원한들도 곳곳에 사무쳐 메아리쳤습니다.

 

일본 패망과 함께 식민시대에 형성된 천리교 시설과 교회들은 모두 몰수되고, 일본인 포교사들과 교직자들도 거의 다 일본으로 물러갑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한국인 포교사들과 신앙인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 종교를 신앙하는 자라 하여 매국노’ ‘친일파’ ‘민족반역자’ ‘왜놈의 개’ ‘왜놈 앞장이라는 비난과 멸시가 뒤따랐고, 심지어는 폭력도 서슴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 냉엄한 현실이 남겨졌습니다. 어떤 자는 흉기를 들고 포교사를 협박하거나 미행하고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때로는 부인 포교사들을 불법으로 납치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참하게 살해하기도 합니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천리교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천리교가 일본에서 생겨난 종교이고, 군국주의 일제에 협력한 종교라 하여 박멸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드러내놓고 천리교를 신앙할 수도 없었고, 더더구나 포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해방은 천리교인들에게 또 다른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기존의 신자들은 신앙을 그만두고, 불교·개신교·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신앙했다는 사실조차 숨깁니다. 심할 때는 민중 편에 서서 포교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비방합니다. 대부분 포교사는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위협을 느껴 간판을 내리고, 신각을 태워 없애고, 교회를 폐쇄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버티어낸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선교회 초대 김선장 선생입니다. 어느 날 신심이 두터웠던 신자가 거리의 민심을 전하며 선생님, 사람들은 선생님을 친일파라고 야단입니다. 변을 당하기 전에 신각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교회를 어떻게 유지해 가겠습니까.”

그러나 선장은 태연히 대답합니다.

세상이 바뀔 것은 벌써 짐작했다. 우리나라 우리 강토를 찾은 것이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아둬야 해. 일본이 패망하였지 신님이 패한 것이 아니야. 전쟁에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모두가 귀여운 천신님의 자녀들이야.”

(김선장의 일생, 187-188)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히면 바로 민중들에게 끌려 나와 봉변을 당하는 시기였지만 선장은 결코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장인들 마음에 동요가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 때는 신각을 내려 불태워 없애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걱정 마라. 이 사당은 어버이신이 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공연히 눈앞에 나타난 일로 놀라워하지 마라.”

마디에서 싹을 틔우라.”

시시각각으로 느껴지는 어버이신님의 음성에 따라 다시 용기와 힘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간판을 떼지도 않고, 신자야 오든 말든 다시 박자목을 치며 일어로 신악가를 부르고(나중에는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름), 손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조석근행에 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월차제에도 신자 한 사람 오지 않은 채 옥수 한 사발만 떠 놓고 근행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신자들은 거리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않고, 눈길을 피해가거나, 선동가들과 합세하여 친일파, 매국노라 외쳐대고 손가락질하기도 했습니다. 김선장은 젊은 청년들이나 학생에 둘러싸여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뒤에서 날아온 돌팔매질에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근행 도중에 돌멩이가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훗날 진해교회 초대가 되는 김순염 선생이 가끔씩 교회에 발길을 날라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김순염은 김선장에게 아부지(아버지)’라 불렀고, 그 응답은 언제나 순염아였습니다.

 

또 한 사람의 선각자는 혜성교회 초대이신 김기수(金杞洙) 선생이십니다. 김기수는 종전으로 인해 일본으로 쫓겨 가는 경성대교회장을 직접 찾아가서 한성관(韓成官)이 반납한 해운교회(海雲敎會)의 목표님을 넘겨받습니다. 남들은 다 포기하고 철거하고 폐쇄하는 데도 김기수 선생은 오히려 그것을 공손하게 받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끊지 않고, 때로는 신령연구소라는 이름을 걸어 명맥을 이어가면서, 열렬하게 포교를 한 끝에 훗날 혜성교회라는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됩니다.

순선(順鮮) 초대교회장 김태주(金泰柱) 선생은 불상을 하나 사들여 그것을 앞에 놓고, 뒤에 신각을 숨겨 조석근행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다 경찰에 발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옥고를 치르기도 합니다.

이런 수난의 시기에도 서울 장안에 거리를 누비며 신악가 팔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천리교 믿으라고 외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으니 만대할멈이라고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언젠가 천리교도 떳떳하게 신앙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세상의 외면과 냉대, 사탄 취급당하고, 매국노라 비난받는 서글프고 외로운 현실을 견뎌내게 했습니다. 남이야 비방하든 조롱하든 신념을 꺾지 않고, 포교를 하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게 하는 힘을 줍니다.

 

이러한 와중에 19475월에 김기수를 발기인으로 한 비공인 천리교연합회가 서울에서 결성되고, 19481014일에는 원장 이순자(李順子/ 일명 이영원, 이춘자라는 기록도 있음), 부원장 김태봉(金太峰, 초대 대구교회장)으로 하는 천경수양원(天境修養院)’을 공인 단체로서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설립합니다.

천경수양원의 원장 이순자 선생은 조선 왕조 마지막 황태자의 사촌 누나로 알려진 왕족의 한 사람입니다. 조선포교관리소 마지막 관리자인 이이다 죠사브로 선생의 지도를 받아 신앙하게 된 인텔리 용재로 조선교의강습소 강사 겸 통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천경수양원은 겉으로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병자나 고아를 돕는 복지단체를 지향하였으나, 실제로는 천리교인들 사이에 연락, 그리고 친목과 유대를 통한 천리교 재건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고문으로 참여한 사람은 독립투사로 유명했던 명제세(초대 심계원장), 독립투사를 무료로 변론하며 독립운동자를 도운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독립운동가로서 건국 초기에 공헌이 많았던 야당 당수 조병옥(대통령 후보)이 있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원장이었던 이순자의 면면과 인물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순자는 6·25 동란 때 납북되어 피살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직도 천리교라는 이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분위기였으므로, 천리교에 합류하기를 반대하거나 꺼리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영영 이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포교사나 신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차츰차츰 교회를 떠난 용재들이 모여오고, 신앙을 저버렸던 신자들도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신자들도 생겨납니다. 드디어 마디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김태봉 선생이 발품을 팔아 예전의 쟁쟁한 포교사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규합하여 천경수양원은 나중에 대한천리교 연합회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일본강점기 때 한국으로 들어온 일본계 종교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천리교만큼은 결코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나 교회본부나 그 어떤 상급교회의 지원이나 협력 없이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해방공간, 식민지 시대에 쌓아 올린 천리교의 모든 재산과 위상이 모두 사라지고, 일본인 포교사들도 모두 떠나간 뒤 남은 것은 오로지 한국인 천리교 신자들에게 쏟아지는 민중들의 비방과 조롱, 그리고 모욕과 폭력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적인 열정으로 기적같이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운 한국인 포교사들의 투혼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사실 왜색종교라는 색안경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이런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천리교 가르침은 원래 국가시책과는 상당히 다른 가르침이었기에 일본 위정자들한테는 결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조님 재세부터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언제나 국가 탄압의 빌미가 되어 교단의 존속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단으로 인가를 받고, 일파독립으로 가는 긴 과정에서 변절의 역사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군국주의 천황제와 이웃 나라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사상통제와 종교탄압이 있었기 때문에 왜곡과 변절은 식민지 시대에 극에 달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의 입맛에 맞는 표면적으로 내세운 교의가 있었다고 해도, 외압에 의해 인간들이 만든 변절된 교의서가 있다 해도, 그와 무관하게 암묵적으로 전해지는 비의는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교조님께서 직필로써 남겨주신 신악가와 친필이 있었고, 본석을 통해 계시하신 신의 가르침인 지도말씀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없앨 수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담긴 어버이신님의 마음과 진실한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뜨거운 가슴과 가슴으로 비밀스럽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약동하는 생명처럼 전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쓰인 일본 군국주의자만을 위한 교의서를 식민지 조선 민중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다면 결코 많은 신자를 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모두 물러난 해방정국에서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고, 보호망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인 스스로 천리교를 지켜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교리가 아니라 천리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교조 본래의 가르침에 인류 보편적인 세계성과 위대함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도 천리교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1945년의 종전은 일본에 있는 교회본부에서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물의와 문제를 일으켰던 국가신도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해체됩니다. 1946년 종교법인령과 1951년 종교법인법이 공포가 되면서 여러 교파신도들이 교조 본래의 가르침을 되찾으며, 명실상부한 독립교단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종전과 함께 2대 진주님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복원을 제창합니다. 복원을 제창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순수한 가르침에서 이 길이 많이 벗어나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아 원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지요. 복원의 중심에는 으뜸인 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복원 운동에 따라 19451026일부터 신악근행과 12장 손춤근행이 복원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46126일에는 복원 신악가가 공간됩니다. 이 신악가에는 예전에 빠진 팔수, 3, 5장이 들어갑니다. 19481026일에는 주석이 달린 친필이 공간되고, 이때 지도말씀도 공간된 후, 1949626일에 전 8권으로 공간이 완료합니다. 19491026일에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천리교교전(복원 교전)이 공간되고, 125일에는 다른 나라보다 가장 먼저 한국어로 번역된 천리교교전이 공간됩니다. 1942년 폐지되었던 별석이 19461월에 재개되고, 1950626일에는 별석에 한국어 통역까지 넣습니다. 195031일에 천리대학에 조선문학조선어학과도 증설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대한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로써 교리나 교의 체계에 기본이 갖춰지면서 어느 정도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순수한 교조님의 가르침으로 다 돌아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원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교회 제도나 체제에서는 복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