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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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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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7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6

 

 

이시중

 

6. 8·15 광복에서 한국전쟁 전후까지 1

 

1945815,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식민지 한국에는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억압받던 민중들에게는 환희와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해방으로 바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이 안겨진 것이 아니라 미군에 의해 3년간 또 지배를 받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이른바 미군정 시절로 1945911일에 미군정청이 들어섭니다. 해방은 곧 미소 냉전체제로 돌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전 세계 2차 대전 직전까지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히틀러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면서도, 소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중 플레이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더는 이럴 필요가 없어졌고, 안면을 바꾸어 소련을 견제하고 적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쳐갑니다.

그 정책의 최대 희생양은 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었지만, 한민족이 염원하는 대로 독립국으로 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강제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남한은 미국이 다스리고, 북한은 소련이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미소 냉전체제로 돌입하게 된 셈입니다. 소련은 빨리 북한에 주권을 넘겨주고 떠나 주었지만, 미국은 남한을 3년간 통치하면서 반공주의, 친미주의, 기독교주의를 국가의 근간이 되도록 밑바탕을 깔아놓고 물러가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게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이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 친미주의, 기독교주의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개신교 신도 수가 전체 인구에 2%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배경으로 정부 고위층이나 주요한 요직에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두루두루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제헌의회 의원 198명 중 54(27%),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의 부·처의 장 21명 중 9(43%)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후 전개된 한국에서 종교적인 분위기도 확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선 일본계 종교들이 전면 후퇴합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을 모두 잃게 되면서 몰락 상태에 이릅니다. 둘째, 민족종교들의 부활입니다. 대단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부여받아 약진합니다. 셋째, 각 종교 내부에서는 종교 지도 세력의 교체가 일어납니다. 그동안 친일파들이 장악한 종교 권력을 민족주의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넷째,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 아래 개신교가 두드러진 지위 상승이 일어납니다. 해방 후 적산 재산이나 귀속재산 처리 과정에서 개신교는 상당한 혜택을 받고 승승장구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 정부나 단체, 개인이 소유한 적산 재산의 처리는 한국에서 종교지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때 최고 수혜자는 개신교와 불교였습니다. 원래 미군정청에서는 일본계 종교재산은 그에 상응하는 조선의 기관으로 귀속하기로 했습니다. 즉 일본불교의 재산은 조선불교에, 일본기독교의 재산은 조선기독교에 귀속한다는 방침이지요. 그런데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직접적으로 적산 재산을 처리하는 업무에 깊숙이 관여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적산 재산을 차지하는데 처음부터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계 조합교회뿐만 아니라, 일본 신사 그리고 교파신도계 종교 재산들도 손쉽게 개신교가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불교와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적산 재산 배분에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천주교나 민족종교인 천도교나 대종교, 그리고 유교들은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일본 신흥종교였던 천리교는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포교사들과 한국인 신앙인들이 온갖 어려움을 뚫고 피땀 흘려 이룩한 교회 재산들이 개신교로 고스란히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해방은 일본을 발상지로 하는 천리교에 또 다른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안겨주었습니다. 미군정청(종교담당 책임자는 미첼중위)921일 천리교에 대한 해산 명령을 내립니다. 그 근거로 첫째 천리교는 군국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둘째, 천리교는 일본에서 옛날부터 내려온 신도(神道)로서 국가신도에 속한 종교다. 셋째, 천리교는 천황과 황실의 선조를 제신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 당시는 일본 제국이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모든 종교를 강압적으로 사상 통제를 하고 억압을 하면서 전시체제로 몰아갔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정상적으로 종교를 운영하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종교는 거의 없습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가 그렇고, 민족종교도 그렇고, 일본계 종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든 이런 사유로 천리교에 해산 명령이 내려지고, 925일에는 일본 정부 및 일본인의 재산 접수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에 천리교 지도부는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종교담당 미첼 중위와 긴밀하게 교섭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국인 중심으로 교단 지도부를 재편하고, 명칭도 조선천리교조천교(朝天敎)’라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명칭 변경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이 요구하는 대로 중학교 설립과 병원 설립 따위 필요한 조건을 갖추기로 합니다. 이때 조사단 십 여 명이 나와서 천리교 실태를 세밀하게 조사를 한 후, 미군정청은 19451031, 교단 존속을 위한 승인까지 해 주었습니다. 이 당시 동분서주하며 노력했던 조선포교관리소 소장은 이이다 죠사부로(岩田長三郞)이고, 곁에서 지키며 도운 사람은 김태봉(金太峰, 대구교회 초대회장)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철회하고, 천리교의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한국 개신교로 넘기는 조치에 착수합니다.

당시 서울에는 용산구 동자동 15번지에 천리교 조선관리소를 비롯하여 중구 저동에는 한국 최대 교회였던 경성대교회, 두 번째로 컸던 덕수교회,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세우기에도 충분히 넓었던 삼각지 부지도 있었습니다. 용산구, 충무로, 삼각지, 도동, 북창동, 청운동, 신당동 따위에 천리교 교회와 관련된 재산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조선포교관리소는 조선신학교가 접수하고 그 일부는 나중에 바울교회(지금의 성남교회)에 떼어줍니다. 조선신학교는 지금의 한신대학교 전신입니다. 조선신학교는 그 많은 천리교 재산을 아주 손쉽게 얻어서 학교를 만들고 운영비를 충당하면서 한국 개신교 가운데 정규대학 인가를 받는 최초의 신학대학이 됩니다.

경성대교회는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는 베다니교회로 넘어갑니다. 지금의 영락교회 전신입니다.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기독교들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 최대 규모의 교회로 성장합니다. 한경직은 한때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절대 일인자로 여겨졌으며 한국교회 목사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한경직의 개신교는 철저한 반공주의, 기독교국가주의, 배타주의가 강합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청년조직까지 갖춥니다. 영락교회 신자가 되려면 일종의 정신세탁을 거친다고 합니다. 하나는 반공주의와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입니다. 오늘날 극우단체들이 주도하는 시위대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등장하는 반공친미 극우 기독교의 깊은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덕수교회는 경성대교회 다음으로 큰 교회로서 가와라마치의 후지에세이이치 선생이 조선말과 조선인 행세를 하면서 조선인만을 위한 포교를 하면서 만든 교회였습니다. 이것을 선린형제단’(강원룡, 노명식 포함 22명의 청년)이 접수하여 야보고교회 즉 지금의 경동교회로 성장해 갑니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성남교회는 이렇게 천리교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아 그것을 기반으로 1945122일 정식으로 창립합니다. 다음 해 1월에는 영락교회 내에 여자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이 외에도 누가교회, 요한교회, 이름을 알 수 없는 모 교회(담임 이일선 목사)도 천리교 교회를 접수하여 창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한교회(뒷날 초동교회)는 중구 초동 105번지에 위치한 천리교 약초교회를 접수하여 창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학교로 사용할 만큼 아주 넓은 삼각지 로터리에 있던 건물과 대지는 상명학원(배상명)으로 넘어갑니다. 그 외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천리교의 재산들도 누군가에 의해 몰래 빼돌려지거나 임대 매각 처분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모든 지방에서도 벌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면 대구동부교회, 인천성산교회도 천리교 재산을 인수하여 창립된 개신교 교회들입니다.

 

이미 한국인 천리교 신자들에게 이양이 끝난 재산을 무효화하고, 미군정청의 결정을 뒤집을 정도로 재산 몰수 과정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습니다. 이들 중심에는 미국 유학 경력을 가진 개신교 지도자 김재준, 한경직, 남궁혁 목사가 있었고, 미국인 장로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인 서울시장 윌슨 대령이 있었습니다.

천리교 재산에 대한 접수과정은 19459월부터 11월 사이에 진행됩니다. 9월에 윌슨 시장이 승인하였지만, 천리교인들의 강한 반발이 있어 실제 접수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진통도 있었습니다. 접수는 11월 하순경에 거의 완료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군 인솔 아래 신학대학 교수들과 신학생들이 수십 명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곤봉과 목도(木刀)를 들고 난동을 피우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항의하는 천리교인들을 몰아내는 방법으로는 일본인들에게는 강제송환 압력을 가하고, 한국인들에게는 민족반역자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습니다. 해방정국에서 반대자를 때려잡는 가장 효과적인 말이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였습니다. 이렇게 찍히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대중 앞으로 끌려나가 망신당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당했습니다. 천리교 재산을 약탈하면서 자기 정당화한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박해했다. 둘째, 천리교 신앙인들은 일본종교를 믿으니까 민족반역자다. 그리고 셋째, 천리교는 기독교를 위태롭게 하는 사이비 종교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천리교 재산을 접수하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고, 오히려 종교 승리로 자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리교 재산을 접수해 가는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동자동에 소재하고 있던 조선포교관리소가 접수당하는 모습입니다. 바울교회 정대위 박사의 증언입니다.

 

194510월 중순경 우리들은 동자동 조선천리교 관리본부 돌계단 밑에 집합하여 대열을 정비하였다. 우리 선두에는 방금 지프차에서 내린 구스타프중령이 서고 그 다음에는 정대위 교수가 섰다. 그때 10여 명 신학생이 참여하였는데 이상일, 김재석, 이일선 등이었다. 우리는 비록 미군정의 서울시 부시장 구스타프를 선두에 세우고 돌진하였지만, 그들은 이 모든 천리교 재산은 종교재단이므로 서울시의 관할이 아니라 미군정청 종교과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천리교 관리본부라는 간판까지 커다랗게 써 붙이고, 그 종교과장이란 미군의 싸인이 있는 종이쪽지도 간판에 붙여져 있었다. 나는 박창해 선생을 대동하고 관장을 찾아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공관이 결국 성 바울교회가 되었던 곳이다. 6·25 때 불에 타기 전의 그 건물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건물로 좋은 재목으로 화려하게 지은 굉장한 집이었다. 우리는 일본인 관장에게 안내되었고 박창해 선생은 그 관장 앞에 버티고 섰다. 그 영감 옆에 자기가 한국천리교 관장이라고 소개하는 한 사람이 나서서, 건물과 재산은 우리들의 것이니 어서 속히 철수하지 않으면 미군 헌병을 부르겠다고 하였다. 이때 정대위 교수는 미군 헌병 무척 좋아하는군. 그래,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일본 도깨비를 섬길 작정인가. 민족 반역자란 말이 무섭지 않아!”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부른 미군정청의 종교 재산담당자가 오고, 정대위 목사가 천리교란 일본 신도의 종파로서 우리 땅에서 멸절(滅絶)되어야 할 종교단체라는 일장의 연설을 유창한 영어로 말하여, 결국 동자동과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모든 천리교 재산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천리교 관계자에 대한 연락과 통신을 철저히 봉쇄하고, 활동을 감시하면서, 천리교인끼리 서로 격리해 갔습니다. 118일에는 기독교 측에서 전국 라디오를 통해 천리교 토지 재산은 적재산이므로 전부 기독교 측에 접수하게 되었다.’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개신교가 천리교인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무시하고, 힘이나 편법으로 제압하면서 강탈하다시피 뺏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군정 고위층에 이미 개신교 인맥들이 넓게 줄이 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미군청 고위급 인사들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으로서 서로 의기투합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미국의 절대적 지지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친미 기독교인이기도 했으니 언제나 개신교는 아주 유리한 입장에서 사회의 직·간접 자산들을 먼저 취득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주 좋은 조건으로 천리교의 많은 재산을 차지한 개신교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천리교는 해방 당시 전국에 215개소에 달하는 교회가 있었고, 서울에 40여 개소의 교회와 관련 시설들이 있었지만, 미군정청을 통해 개신교로 대부분 재산이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 일본인 포교사들은 모두 일본으로 물러나고, 그동안 쌓아 올린 천리교의 모든 기반도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20,000명이 넘는 한국인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추는 듯했습니다. (계속)

 

* 위 내용들은 종속과 자율(강인철), 대한천리교사1(정명수), 신종교연구 제9,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Ⅲ》(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신대학 50년사(50년사 편찬위원회), 경동교회

30년사(민경배), 영락교회 35년사(영락교회 35년사 편찬위원회),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허명섭), 녹색평론 160, 녹색평론 172라는 책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 천리교 역사에 관련된 자료가 있으신 분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