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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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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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5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4

 

 

이시중

 

 

 

192291일에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1923년에 조선인 교포가 약 5,000명이 학살되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지고, 비분강개한 민심은 또다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동요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포교 활동도 잠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19034월에 처음 포교를 시작한 경성선교소는 날로 번창하여 경성(京城)지교회로 성장하고 나중에는 동양척식회사 총재 집을 매수하더니 19241010일에 이전합니다. 이후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117개 소속 교회를 만들게 되어 1940123일 혼지마분교회에서 분리하여 경성대교회로 승격하는 인허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설립된 유일무이한 최초의 대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혼지마분교회도 대교회로 함께 승격됩니다.

1928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인이 개설하는 선교소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경성분교회 하용득(河用得)선생이 19281125일에 대구에서 경대포교소를, 부산교회의 김봉의(金鳳儀)선생이 1929426일에 경북 달성군에서 영남선교소를, 19291031일에는 아즈마대교회 동경선교소의 김판순(金判順, 김진조 부인)선생이 경심선교소를 설립합니다.

진주에서 영융교회를 세운 김영준, 김보금 부부는 아예 일본에서 19342월에 전도가 되어 수훈의 리를 받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와서 포교를 시작한 경우입니다. 김영준은 일찍이 직업을 찾아 일본 교토로 건너가 경염휘발수세업(京染揮發水洗業)을 경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얻어 고생하던 중에 게이요(敬陽)선교소 초대 하야시 도라기치(林寅吉)선생의 인도로 입신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건너온 부부는 조선교의강습소에 33, 34기로 나란히 강습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 봄에 경선(敬鮮)포교소를 개설하고,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71215일에 영융선교소로 승격합니다. 이후 교회 제도가 개정되어 해외에 있는 선교소는 모두 교회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영융(永隆)교회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19458월 광복이 되기까지 6개월 과정의 별과에 160여 명의 별과생을 배출할 정도로 김영준 김보금 부부는 아주 치열한 포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영융이라는 뜻은 오래오래 융성하라는 의미로 가와라마치 대교회장님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한편 교육복지사업도 펼쳐졌는데, 조선포교관리소 내에 포교사나 신자 자녀들을 위한 천리학원(天里學園)이 생겼습니다. 함흥에서는 시키시마대교회계 신자 나카니시 헤이사부로(中西平三郞) 부부가 양덕원(養德園)을 만들어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공부도 시키고 생계에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초등학교로 발전합니다. 목포에서는 다케무라(武村)씨가 공생원(共生園)을 만들어 가난한 아이를 모아 공부시키고, 직업을 주어 생계에 도움이 되게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무야분교회에서는 19062, 김해 칠산 일대에 넓은 땅을 확보하여 도사농장을 개설하였고, 이후 혼지학원(混地學園)을 열어 농장관계자와 농장 인근 주민들의 아이들을 모아 교육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6년제 초등학교로 발전합니다.

대구에서는 아즈마()대교회 신자인 시미즈 도요기치(淸水豊吉)부부가 19275월에 동경여숙(同慶女塾)을 엽니다. 이는 동경여학교 혹은 내선동경회라고도 했는데 부녀자들을 모아 교화시키고 직업교육도 했습니다. 훗날 대한천리교를 창설하고 초대 교통이 된 김진조선생과 부인 김판순여사는 이즈음에 입신하게 됩니다. 김진조는 교리가 너무 좋아서 입신한 경우입니다. 김진조는 경북 달성지방에 소문난 부자로서 많은 재산을 기부하면서 시미즈선생을 도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조선에서 활약했던 포교사들과 신도들이 피눈물 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만들어낸 성과였습니다. 교회본부나 상급교회나 어떤 포교센터에서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업들이 점차 발전유지 되어갔다면 한국 내에서 천리교의 위상은 어떠했을까요.

 

19274월에 천리교청년회 조선출장소가 개설되고, 19299월에는 천리교부인회 조선출장소가 개설됩니다. 그리고 19375월에는 김기수(金杞洙, 나중에 혜성교회 초대회장이 되심)선생이 교의강습소 통역 겸 사감으로 취임하는데 한국인으로서 사감은 처음이었고, 다음 해 4월에는 강사로 임명이 됩니다.

1929년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남자 신도는 6,618명이고 여자는 6,859명으로 계 13,477명에 이릅니다. 1935년 말 통계에서는 한인 신도 수가 16,000명으로 늘어납니다. 1943년도에 교세 현황을 보면 포교소 196개소, 포교사 476, 신자 수 31,414명으로 나옵니다.

 

한편 일본 국내 정세는 심각한 불경기로 아무리 정부에서 여러 가지로 대책을 연구해도 경기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라가 위기라고 진단한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군인들은 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획책합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모습의 하나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이후 15년간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고, 1932515일 극우 청년 해군 장교들은 5·15 반란 사건을 일으켜 수상 관저에 난입하여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암살합니다. 이를 거치면서 일본은 점점 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었던 총력전 시대로 돌입해서 갔고, 그 누구도 전쟁과 무관하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 앞서서 1925512일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국정을 비판하거나 국가체제에 도전하고 반대하는 사상과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법률입니다. 이와 다른 교의 교설을 펼치는 종교단체는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 히토노미치교오오모토교(大本敎)’는 결국 해산 명령을 받고 사라지고 맙니다. ‘오오모토교경우 본부의 모든 시설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철저하게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천리교의 근본된 가르침도 정부 이념과 맞지 않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속과 억압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비근한 예로 19351216일에는 탈세 혐의라는 명분으로 나라현 경찰 400명이 한꺼번에 교회본부에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1936226일 일본에서는 2·2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육군의 천황파 젊은 장교들이 부대를 이끌고 수상과 대신들을 습격하고, 도쿄 중심지를 점령합니다. 이 사건으로 결국 군부에 의한 독재 권력이 형성되고 이후 일본과 주변국을 더욱더 깊은 불행으로 몰아갑니다.

19377월에는 선전포고도 없이 중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걷잡을 수가 없게 되자 교회본부에서는 19371026일부터 1128일까지 한 달 동안 집행하려던 입교100년제 제전이 1128일 하루로 축소되어 입교100년제의 열기가 사그라져버렸습니다. 그 대신 10월 추계대제부터 100년제 앞날까지 한 달 동안 매일 아침에 신악근행을 올리면서 세계평화와 즐거운 삶의 실현을 위한 기원근행을 정성스럽게 올렸습니다. 이즈음의 신도는 8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1938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합니다. 언론 사상 통제도 극심해졌습니다. 여전히 중국과의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 길도 더욱더 어둡고 암울한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19389월에는 문부성 종교국 주최로 국민정신 총동원 종교교사강습회를 열어 각 종교의 대표자가 와서 들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진흙바다 고오끼를 근거한 교의와 의식 일부를 개정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에 근거한 신악근행과 12장의 손춤도 그만두라는 식이었습니다. 신악가 노래의 가사도 35장은 일부 수정하라고 했고, 팔수와 천리왕님의 신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2대 진주님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견지했고, 나카야마 다메노부(中山爲信) 본부원은 진주님의 뜻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이해를 시킵니다.

신악근행과 손춤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그만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리교 신자가 800만 명인데 어린아이를 빼놓고 모두 출 수 있는 손춤을 못 추게 하면 전국각지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교회본부로서는 책임을 질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사실 신자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상자라도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이에 설득이 되었는지 결국 정부 당국은 한발 양보하여 절대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교 측에서도 당국의 뜻을 헤아려 한발 양보해서 유달 제8를 통해 교내에 혁신할 사항과 실천할 사항들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교우 신자들이 불경죄에 걸려 곤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당국과 충돌을 미리 피하자는 뜻이었지요. 그 결과 팔수, 3, 5장은 임시로 중단하게 했고, 진흙바다 고오끼에 대한 교설도 삼가기로 했습니다. 1936년에 배부했던 친필, 지도말씀도 1939년부터 강제로 회수합니다. 이것은 194510월 가서야 다시 복원되기 시작합니다.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한발 빠르게 지혜롭게 대처했기 때문에 종교탄압을 덜 받으면서도 교조님의 가르침을 계속 지켜낼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태풍이 휘몰아칠 때는 가만히 엎드려서 기다렸다가 태풍이 다 지나가면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됩니다. 태풍에 맞서다가는 박살 나기에 십상입니다. 국가권력이 광풍으로 휘몰아칠 때는 굴욕을 참으면서 그 시기를 견디고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이 날뛰다가는 아무것도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그 광풍이 1945년까지 계속 휘몰아쳐 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