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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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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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4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3

 

 

이시중

 

5. 3·1 독립운동 전후부터 1945년 광복 전후까지(1)

 

천리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189646일에 발포되었던 내무성 훈령 갑 제12호는 19161026일 즈음에 완화가 됩니다. 실로 20년 만의 일입니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신악가 1악한 것을 제거하고 도와주소서 천리왕님이시여라는 근행의 지가는 이때 비로소 부활이 되고, 규제도 많이 풀려 포교도 더욱 활성화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통제가 완전히 풀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여전히 국가신도 체제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교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그것이 바다 건너 조선에서도 놀라운 발전이 일어납니다.

천리교는 이미 한국에서 1916년에 공식적으로 31개소의 포교소와 73명의 교직자가 있었고, ‘천리교조선교의강습소1916년에 개설합니다. 그리고 1917127일에는 교규규정을 변경하여 조선인 신도에게도 포교사 자격을 부여하는 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1918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천리교 신도는 일본인 14,772, 조선인 7,764(실제로는 그 1/10700~800명 선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천리교는 일본계 종교 중에서 가장 흥성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91931일에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3·1 독립운동은 일본의 강압적인 철권통치에 대항하여 조선 민중들이 떨치고 일어난 대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가 4개월간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 당국은 무자비한 총칼을 앞세워 탄압하였습니다. 7,500명이 죽고, 15,9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6,900명이 투옥되고, 그중에 9,458명이 기소되었습니다.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위를 겨우 막아냈지만, 예전과 같은 무단정치로서는 한계에 봉착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상자를 낸 악랄한 탄압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자 대내외적으로 여론도 악화하였습니다.

모처럼 활성화되어가던 천리교의 포교 활동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조선 민중 속에 널리 퍼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리교와 천리교를 신앙하는 조선인 신자들에 대한 반감과 비난, 질타가 이어졌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떠나가는 신자들도 생기고, 왜놈종교라 하여 손가락질을 하니 새로운 신자들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천리교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국가권력의 억압이나 통제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조선에서는 거기다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 흐르는 민족 감정까지 더해져서 이중 삼중으로 고충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여러 가지 모순들이 첨예하게 드러나자 일본 정부로서는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합니다. 총독을 바꾸고, 헌병 경찰제도를 없애고, 일본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도 완화하고, 언론출판에 대한 자유를 조금 보장하고, 종교와 교육에 대한 간섭도 조금 줄입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조선어 장려 규정을 만들어 총독부 중앙관리와 경찰관들도 조선어를 익히도록 하고, 각 도와 지소에도 강습소를 마련하여 조선어를 보급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한국이 더 잘 동화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일파 양성 교육을 강화합니다. 교육의 목표는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고, 일본의 우월함과 조선의 열등함을 심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친일파 조선인을 앞잡이로 삼아 통치하려는 체제를 구축해 갑니다.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종교정책에 대한 방침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19158월에 공포한 포교 규칙이 19204월에 개정되면서 여태 교회 설치에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을 신고만 해도 되도록 바꿉니다. 이것을 계기로 포교 활동도 조금 더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독부 측면에서 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종교들이 좀 더 활발하게 활동해 주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계 종교 중에서 천리교는 이미 이전부터 민중 속에 파고드는 저력이 다른 여타 일본계 종교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천리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래 천리교의 근본 가르침은 군국주의 국가 시책과는 달랐고, 신도를 모으는 세력 확장성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이것을 예전부터 보아온 일본 정부로서는 천리교가 늘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억압과 탄압을 하는 가운데서도 식민정책에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교회본부에서도 해외 포교에 관한 관심이 날로 높아져 갔습니다.

 

천리교조선교의강습소1916년에 개설되었지만, 정식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191010일에 가서야 정식으로 개설하고, 19203월에 비로소 제1기 졸업생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강습소 본래 취지대로 192910월부터는 조선인만을 위한 강습이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천리교 교의를 알면서 일본어를 아는 인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서서히 한국인 포교사에 의한 천리교 포교도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습소에 조선인 최초의 강사는 최정현(崔禎鉉)이었는데, 조선어 강사 겸 통역을 맡았습니다. 최정현 강사가 교의강습소에서 발행하는 니오이가케 4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남기고 있습니다. 간추려 보면

천리교에 행하는 여러 의식이나 태도들이 조선의 무당과 흡사하다. 조선인 신도는 구습(舊習)의 부녀자들이 대부분이고 남자나 신식 여자들은 거의 없다. 천리교의 교의나 의식은 일본문화가 짙게 배여 있다. 세계 일렬을 구제한다면서 특정한 민족문화로 돌아가는 듯하여 안타깝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최정현은 천리교가 한국의 무속신앙과 닮았다 하여, 일반 저층 민중에게 파고드는 장점을 밝히면서도 남자와 신식 여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세계 종교로서 지향해야 할 천리교가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을 밝히면서 이를 바로잡아 나갈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한편 교회본부에서 거행하는 교조40년제(1926115, 20, 253회에 걸쳐 집행됨)를 앞두고, 191920년대부터 천리교 내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교회본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미치노토모에 실린 기사가 이를 대변해 줍니다.

어버이신의 도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직접 느끼고 있는 신자들이여, 오랜 인내와 침묵에서 깨어나, 지치고 방황하고 고민하고 울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않겠는가.

존귀한 신님의 손발이 된 자가 멸시당하고 조소를 받는 것은 교조님 재세시만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 천리교 신자도 교조님처럼 일반의 이해를 초월할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졌으므로 어떠한 고생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신님께 다가가려 하고, 신한줄기로 나아가려 하는 자가 거리에 나섬으로써 받게 되는 조소는 실로 고귀한 것이다. (중략) 거리에 나서라. 번화한 거리로 나가라, 그 소리 높여 천리왕님의 이름을 외쳐라.” (‘미치노토모’ 192010월호)

거리로 나가라, 번화한 거리로 나가라는 외침은 비단 일본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로까지 메아리쳐 갔고, 1921년부터는 교세 배가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포교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활동 덕분으로 교회와 신도 수도 불어났고, 40년제에 터전 귀참자가 65만에 헤아렸으니까 대단한 열기를 뿜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도 천리교를 음사사교라 하여 수없이 신문 기사에서 험담했지만 40년제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19211026일에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김선장(金善長)이 마산에서 미선(美鮮)선교소를 설립합니다. 포교는 이미 2년 전부터 했지만 교회본부의 윤허를 받아 정식으로 선교소를 개설한 것은 이때입니다. 1926310일에 미선교회로 승격합니다. 김선장은 원래 창원 출신으로 가정과 처자를 버리고 술과 계집질, 그리고 노름으로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집안의 재산을 헛되이 날리고 불효까지 예사로 저질렀습니다. 어쩌다 전라도 목포까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여름 어느 날 친구들과 야외 놀러 가는 길에 참외를 깎아 먹다가 그 칼에 그만 왼쪽 팔목에 혈관을 건드리는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인근 병원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는 더 깊어지고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생명이라도 건지려면 팔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기미대교회 소속 후쿠노(北濃)분교회 출신 사와무라 요시로(澤村芳郞)선생의 인도를 받아 천리교에 입신합니다. 사와무라 요시로는 꽤 유능한 포교사로서 1910년에 이미 한국인 최초로 이우문, 엄익상, 장희승을 천리교교(天理敎校)에 유학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사와무라 선생은 아주 명쾌한 인연 개유로 선장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선장의 가슴에 심어주어 참 신앙인으로 이끌어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모르면 안 된다. 이 몸을 내 것으로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야.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하고 또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아. 이 팔목만 해도 내가 자르고 싶다고 자르고, 낫게 하고 싶다고 해서 낫게 하는 것이 아니야. 이 몸은 어버이신님께서 빌려주신 것이고, 우리는 빌려 받아 쓰고 있는 거야. 일체 만물을 만들어주시고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다 어버이신님이 하시는 일이야. 그러니 빌려준 몸을 함부로 쓰지 말고, 빌려준 의도대로 잘 써야 해. 이제까지 내 멋대로 살았던 높은 마음은 버리고, 이 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돼. 지금부터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반성 참회하고, 인간구제를 위해 전도에 전념하다 보면 악인연은 어느새 납소가 되어 대난은 소난, 소난은 무난으로 수호받게 되는 거야.”

이러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김선장은 목포에서 생활을 청산하고 마산으로 넘어와 포교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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