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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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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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3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2

 

 

이시중

 

4. 한일협약 전후부터 3·1 독립운동 전후까지

 

1904210일에 일본은 러시아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일으킬 당시는 그 어떤 나라도 일본이 이기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러시아가 패전합니다. (190595일 종전) 이것은 일본이 한국에서 다른 나라를 모두 젖히고 독점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을 대상으로 강압적으로 한일협약(119048/ 219051117-을사늑약)을 맺고, 19051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는 식으로 조선을 더욱 노골적으로 간섭하며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뒤인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라고 알려진 조약을 맺어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아 헌병 경찰 통치를 시작합니다.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경술국치입니다.

한일협약 이후 1906121일에는 일본인 포교사를 대상으로 한 국교선포에 관한 규칙을 시행합니다. 즉 불교 위주의 종교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정책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종교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일본종교를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조선 민족 고유의 신앙과 전래의 풍속과 관습은 모두 미신으로 비하하면서 종교로서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한국 토착 신앙들이 수난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천리교는 러일전쟁 이전에 개인 자격으로 포교를 하던 포교사들이 더러 있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포교소를 개설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밀항자였고,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자였기 때문입니다.

19046월에 가서야 한국 최초의 포교소가 탄생하게 됩니다. 무야분교회 소속 오오미네 진사부로(大峰仁三郞) 부부가 부산포교소(현재 나카쓰대교회 소속 부산교회와는 관계없음)를 설립합니다. 뒷날 부산선교소를 거쳐 부산교회가 됩니다. 부산포교소가 정식으로 개설된 게 1904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활약했던 나카무라 쥰헤이(中村順平)의 열정적인 포교가 그 뿌리였습니다. 나카무라 쥰헤이는 밀항자에다 의약 방해라는 혐의를 받아 여러 차례 추방을 당했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포교하다가 1904년 초에 또다시 강제로 일본으로 송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카무라를 인도한 오오미네 진자부로가 대신 넘어와서 정식으로 부산포교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오미네가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경찰이 교회를 없애고 신자 모임을 엄금시켰기 때문에, 매월 23일 밤 신도식 의례를 하는 것처럼 해서 신자를 집합시켰다. 평소에는 통소매에 앞치마 복장으로 일견 집안사람처럼 보이게 해서 각각의 신자 집을 방문했지만, 관헌의 제지를 면할 수 없는 상태였다. (道乃友1930. 12.)

 

무야분교회에서는 19062, 김해 칠산 일대에 350정보나 되는 땅을 확보하여 도사농장을 개설하고, 흥농회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이민사업을 시행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한 혼지학원(나중에 6년제 소학교가 된다)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091월 부산포교소에서는 일한동심회(日韓同心會)라는 친목 단체를 만듭니다. 여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차별 없이 모두 가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일한동심회는 경조사 따위에 공동으로 협조하고, 봄가을이면 운동회를 가지면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친목을 다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조사는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고, 특히 당시 일반 민중들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많아 상이 나면 장례를 치르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일한동심회를 중심으로 교우들이 서로 힘을 모아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사람 대우를 받는 느낌까지 받게 되어 그 고마움에 차츰차츰 신앙에 젖어 들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 민중들에게 이 길의 신앙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단독 포교사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추위와 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극빈한 신세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포교사들은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베풀었지만, 병자들이 도움을 받으면 이내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은 한국 민중에 심어져 있는 무속신앙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우환이 있어 일시적으로 무당에게 의지하여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과 관계를 청산합니다. 일반적으로 무당은 하류계급 취급하여 친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비친 천리교 포교사들은 마치 주술을 행하는 무당과 비슷했습니다. 천리교 포교사들을 ()무당이라고 할 정도이니 이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질병 때문에 치유수단으로 천리교 포교사에게 잠시 의지하지만, 병이 낫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것이지요. 첫째 일본인이라서 거리를 두게 되고, 무당 같으니까 하대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천리교 포교사를 더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즈음해서 천리교 교회본부 차원에서도 포교사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래서 다카야스 초대 회장인 마쯔무라 기치타로(松村吉太郞)를 한국포교관리자로 통감부에 청원하여 이를 1908924일에 인가를 받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081127일에 천리교가 13개 교파신도 중에 하나로 일파독립을 합니다. 이때부터 본부 차원에서 해외 포교에 더욱 관심을 두고 추진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19094월에 부산에서 한국포교관리소를 설치하여 마쯔무라 기치타로가 초대 한국포교관리자로 취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한국전도청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에 있었던 한국포교관리소는 1911531일에 서울로 이전하면서 조선 포교관리소로 이름을 바꿉니다.

당시 마쯔무라 기치타로의 눈에 비친 한국에서 활동하는 포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교사들이 얼마나 열악한 가운데서 이 땅에 천리교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해 왔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포교사의 집에 가 보면 자신의 의식주조차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같았고, 집 안에 들어가도 변변한 앉을 자리조차 없어서 문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다다미 서너 장 넓이의 방에 신단과 가재도구를 놓고 그곳에서 모든 가족이 주거하고 있었다.

(にほいかけ22, 1924. 10)

 

한편 서울에서는 부산보다 약 10년이 늦은 19034월 가와라마치(河原町)대교회 소속 오오쿠마 마쯔지로(大熊松次郞) 부부와 처남 가타야마 요시죠(片山好造)가 서울 최초로 포교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경성포교소를 설립하고, 나중에는 경성선교소를 거쳐 한국에서 최초로 경성대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일본에 있을 때 천리교에 대한 정부 단속과 관헌의 박해가 심하고, 승려들의 모함과 시기, 지역민들의 비방 때문에 신앙하기가 어려워져 고심하다가 한국으로 넘어온 경우입니다. 처남이 돕고, 상급인 사토 에이샤 선생까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포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목포에서는 1909년 고가(甲賀)대교회 소속 사와무라 요시로(澤村芳郞)씨가 포교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910년에 한국인 세 명(장희승, 엄익상, 이또문)을 교회본부로 보내 6개월 과정의 별과를 수료시키고, 19105월에는 후에 미선교회 초대회장이 되는 김선장을 인도합니다. 김선장은 그때 팔의 신상을 수호받아 입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포교사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여기저기서 포교소, 선교소, 지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191931일에 있었던 3·1독립운동 전까지 한국에 진출한 교회 계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야(撫養), 미나쿠치(水口), 니시(西), 가와라마치(河原町), 아시쓰(芦津), 고가(甲賀), 나카쓰(中津), 하루미치(治道), 다카야스(高安), 고토(湖東), 고치(高知), 기타(), 시키시마(敷島), 헤이신(兵神), 고리야마(郡山), 본부직할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교회 계통에서 포교사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열정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리하여 100200명 심지어 500명이 넘는 선교소도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진출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었지, 특별한 지원을 받으면서 전개해 갔던 것은 아닙니다.

한일협약 이후 일본당국이 천리교에 대한 포교 공인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의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응원을 한다거나 어떠한 지원을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견제와 불신의 눈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런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의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중의 아픔, 괴로움, 어려움을 함께하려는 포교사들의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구제 정신이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성과였습니다.

 

오랫동안 억압과 탄압을 받은 전례가 많은 교회본부 입장에서는 이들 포교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다가 이들 포교사가 무리하여 살벌한 일본당국과 혹 마찰을 일으킬까 봐 노심초사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교사들은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신념을 가지고 한국의 민중들에게 파고 들어갔습니다. 일본계 다른 종교보다도 천리교의 활약상이 더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리교 가르침이 지닌 보편성과 세계성이 일본 정부의 탄압을 받는 식민지 한국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천리교 가르침의 위대한 일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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