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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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2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 과정 1

 

이시중

 

1. 여는 말

 

이번에 제가 풀어나가고 싶은 주제는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 과정입니다. 그간에 이 길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개하여 발전 혹은 퇴보하며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그만큼 크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오늘을 이해하게 하고, 내일을 내다보게 합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종교 어디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서 사고할 수 있다면 그만큼 유익한 것은 드물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천리교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역사에 관해서 서술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도 극히 빈약한 자료지만 더듬어 가며 공부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 역사 왜곡 현실과 경제전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되돌아보고,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하지만, 천리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씨앗이 뿌려지고 싹트고 꽃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흥망성쇠를 함께 공부해 봤으면 합니다. 이 기회로 앞으로 이 길의 지나간 역사를 더 깊이 공부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조선말 시대 상황

 

우선 천리교가 탄생하고 이후 이 땅에 씨앗이 뿌려질 즈음 세계정세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공정으로 인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이 점차 유럽 각지로 번져 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할 것 없이 전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중에 넘쳐나는 생산품을 처리하는 것이 큰일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에 시장 확보가 지상명령이 되어 산업화가 먼저 일어난 서구 여러 나라는 이웃 나라를 넘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작된 일이 식민지 개척입니다. 발달한 항해기술과 앞선 기술로 발전시킨 총과 포를 앞세워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한 손엔 무기를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었습니다. 무력시위를 하면서 공포감을 조장하여 굴복시키고, 각종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고, 성경을 앞세워 토착문화를 말살하면서 한 나라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갔습니다. 세계 전 지역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공산품은 식민지에 비싸게 팔고, 그 지역 농산물이나 생산품은 싸게 사들이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이득을 취하면서 그들의 부를 늘려갔습니다. 이것이 식민지 개척 역사의 시작입니다. 서구 선진국 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경로를 거쳐서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개척은 처음에는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고 마지막으로 조선, 중국이 있는 동아시아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가 각축을 벌였고, 여기다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를 시작한 일본이 가세하는 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이 우세를 점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을 반식민지로 만들며, 토착민들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게 하였습니다. 아시아에 수많은 나라 중에 식민지가 되지 않는 나라는 단 세 나라뿐이었습니다. 일본, 중국, 태국입니다. 일본은 이미 제국이었고, 중국은 반식민지였고,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립지대로 독립 국가였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지구상에서 식민지가 사라졌지만, 이제는 더 교활한 방법으로 경제침략과 분쟁과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초기의 포교 활동 모습

 

18754월에 일본이 운양호(雲陽號)를 비롯한 군함 3척을 앞세워 부산항에 들어옵니다. 자기네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입니다. 불법으로 군인들이 부산에 상륙하더니 온갖 행패를 부리며 무례한 짓들을 합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무력으로 시위를 하며 위협하더니 1876227일에 치욕적인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병자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여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도록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마음껏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땅이나 가옥 따위를 제공하고, 일본 상품을 무관세로 들어오게 하고, 일본 화폐를 유통하게 하고, 치외법권을 적용하여 일본인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하더라도 조선 법으로 다스릴 수 없도록 하고, 경제활동에 특권을 누리도록 해나갔습니다.

결국, 1910822일에는 치욕적인 한일합방을 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부산은 조선의 제1 관문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부산은 조선 침략의 첫 발판이면서 만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부산은 일본인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일본 정부가 정략적으로 들어오게 하는 관료나 경찰 군인도 있고, 이민자나 종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유랑인, 몰락한 무사, 실패한 상인들, 혹은 불평분자나 도피자도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천리교도 부산을 통해서 처음으로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기록상 한국에서 최초의 포교사로 알려진 사람은 고지(高知)계통에 사토미찌다로(里見治太郞)입니다. 이때가 189212월경으로 부산을 통해 밀입국합니다. 그 외 알려지지 않은 포교사나 신자들도 있을 테니까 천리교의 한국 전래는 그 이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당시 한국으로 오는 포교사나 신자들은 대부분 밀항선을 타고 들어옵니다. 정식 절차를 밟지 못하고 몰래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개인 자격으로 왔지 어떠한 비호나 지원은 전혀 없이 조선 포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뜻만 있지, 쉽게 포교의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풍속이나 생활습관까지 다를 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고지분교회에서도 조선 포교에 관한 관심을 가집니다. 조선에서 포교하려면 조선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포교사 양성을 위해 조선어를 가르치는 조선어숙을 고지분교회에서 열었습니다. 천리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친 최초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1894.8.1-1895.4.17)을 일으키자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이 생겼고, 거기다가 일본 국내에서는 천리교가 크게 탄압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세가 위축되고,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포교 활동 자체가 침체하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천리교는 교조님 최후의 노고를 겪게 되는 1년 전인 1885523신도 직할 6등 교회가 되고, 은신 1년 후인 1888410일에 신도 직할 천리교회설치 인가를 동경 부지사로부터 받아 동경에 본부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그 본부를 723일에 터전 쪽으로 옮깁니다. 18895월에는 신도본국 직할 3등 교회로 승격되고, 1891416일에 신도본국 직할 1등 교회로 됩니다. 그리고 19081127일에 가서야 천리교가 일파로써 독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신도직할 천리교회 본부라고 쓰던 것을 천리교 교회 본부라고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메이지(明治) 정부의 종교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국가 신도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모든 종교나 토착 민간신앙을 모두 신도 범주에 넣어 관리하였습니다. 그것도 등수를 매겨 관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천리교라도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신불 접촉결합이라 하여 불교와 신도가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분리해 낸 것이 메이지 시대입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도와 불교가 같이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누렸던 불교의 재산이나 지위를 없애고, 신도를 더 강화하면서 불교를 약화합니다. 정치 권력자들은 신도를 종교가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도덕이며 의례체계라는 것입니다. 국가는 그 어떤 가치보다도 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국가 창세신화와 천황제를 뒷받침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있습니다.

신도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국가 신도입니다. 신사 신도라고도 합니다. 신직자들은 포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국가 신도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의이기 때문에 더는 설교조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례의식만 있지 다른 교설이 없습니다. 신사 유지비용은 모두 국가에서 지원하고 모든 것을 관리합니다. 국가 신도는 1945815일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사라집니다.

다음은 교파 신도입니다. 종파 신도, 종교 신도, 교조 신도라고도 합니다. 대부분 신흥종교가 여기에 속합니다. 자체적인 교의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경비를 자체적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교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허가 단계에서부터 본래 교조의 가르침을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변질하기 마련입니다. 교조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하는 복원이라는 숙제를 늘 안고 있습니다. 천리교가 일파로써 독립했다는 것은 교파신도로써 천리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은 일반 신도입니다. 국가 신도와 교파 신도에 속하지 않는 모든 토착 신앙과 종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 외 불교 신도, 유교 신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신도에 속하지 않는 민간신앙, 종교가 없었던 셈입니다.

메이지 정부가 민간신앙이나 종교를 간섭 통제하게 된 것은 밖으로는 서구열강들의 포진 속에 식민지가 되느냐 아니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는 강한 나라가 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서구열강처럼 제국이 되고 강한 열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천리교는 631등 식으로 조직체계로서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갑니다. 그러니 천리교로서는 그전과 달리 우선 마음 놓고 포교를 할 수 있었고, 그 자신감으로 활발하게 포교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아 엄청나게 신도들이 불어나게 됩니다. 교조님 은신 이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신도가 3백만이 넘어섭니다. 이에 깜짝 놀란 정부 당국은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거기다가 다른 종교들의 시기 질투가 겹쳐 결국 정부에서는 천리교를 말살하려는 비밀훈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이 189646일에 있었던 비밀훈령 갑 제12호입니다.

탄압 이유로 신도들이 남녀가 섞여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며 풍속을 어지럽게 한다, 의료행위를 방해한다, 기부를 강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천리교를 음란하고 사기가 농후한 집단으로 규정하여 전국 경찰서와 경찰 분서에 천리교를 철저히 단속하라고 하달합니다. 그리하여 천리교 확산을 막기 위해서 온갖 탄압을 가해왔습니다. 이러한 압박은 그만큼 천리교가 크게 신장하며 발전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천리교가 가진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단속과 억압을 피해 조선으로 밀입국하는 열정적인 포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비밀훈령이 내린 이듬해인 1897년 후반기부터 조선에서 천리교 포교가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식적인 포교사 자격증도 없었고, 여권도 가지고 있지 못한 밀입국자였습니다. 그러니 숨어서 포교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정한 잠자리도 없었고, 굶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때로는 단속에 걸려 강제로 추방당하는 포교사들도 생겨났습니다. 추방당했다가 다시 밀입국하고, 또 단속에 걸려 추방당했다가 또다시 밀입국하고. 포교사들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정말로 어려운 가운데 포교를 이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종교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대부분 기독교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할 초기에는 불교를 이용했습니다. 그중에 진종(眞宗) 대곡파(大谷派)인 동본원사(東本願寺)를 이용했습니다. 차츰 일련종, 정토종도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불교를 이용한 것은 다른 종교보다 다루기 쉬웠고, 오랫동안 정권과 유착관계도 있었기에 믿을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불교는 오랫동안 억압을 받아왔습니다. 불교는 산중으로 쫓겨났고, 승려들은 최하층 계급으로 취급받았으며, 도성 출입이나 포교도 엄격히 금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불교를 앞세우게 되면 조선 민중들이 볼 때는 불교를 해방해준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좋았습니다.

사실 조선에서 불교는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저변 민중까지 이미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단지 여러 여건상 대 놓고 신앙하기 어려웠을 뿐이지요. 그런데 일본이 불교를 앞세워주니 얼씨구나 좋다고 했던 부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만큼 불교를 이용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 외의 종교는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선의 어떠한 종교나 민간신앙도 무시하거나 미신이라 하여 타파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기독교는 서구열강들의 종교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계 종교들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천리교 포교를 하던 초기에는 일본당국의 어떠한 비호나 협조나 이해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단속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당국의 눈길을 피해 숨어서 숨어서 포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인 역시 그동안 여러 가지로 일본인들에게 많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 건너온 천리교에 대해 쉽게 호감을 느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천리교 포교는 쉽지가 않았고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포교를 전개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일본 거류민들을 대상으로 포교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점차 조선인에게도 퍼져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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