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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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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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90

 

천리교 가르침의 뿌리, 으뜸인 리 30

 

이 시 중

 

 

즐거운 삶(신인화락) - 인간 생활의 목표이자 이상

 

月日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에 14-25

세상에서는 이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모두들 어디까지나 침울할 뿐이야 14-26

앞으로는 온 세상 사람들 누구나

모두 즐거움이 넘치도록 할 테다 10-103

라고 말씀하셨다.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이것을 실현코자 즐거운근행을 가르쳐 구제한줄기의 길을 여신 것이다. 즐거운근행의 리는 참으로 이 태초의 진실에 기인한다.

 

잠깐 이야기 천신의 말을 들어다오

그릇된 말은 아닐것이니

이 세상 땅과 하늘의 본을 받아서

부부를 점지하여 왔었으므로

이것이 이세상의 시초이니라

 

이렇게 하여 교전 제3장 으뜸인 리는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목표이며 이상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어떠한 입장이나 처지, 삶의 과정에 놓여 있더라도 궁극에는 즐거운 삶이며,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의 기준, 판단의 기준, 행동의 기준이 즐거운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평소의 생각, 판단, 행동이 바른지 그른지를 아는 매우 강력한 기준은 다름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따져 볼까요?

나는 재미있고 즐거운데 남은 재미없고 괴롭다면? 해서는 안 되겠지요. 남을 도와야 내가 도와지게 되는데, 남을 괴롭혀서야 어디 그 재미와 즐거움이 오래 가겠습니까? 그러니 남이 재미없고 괴롭다면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 자기 티끌 때문에 재미없고 괴롭다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하면 됩니다. 남 눈치 볼 것 없습니다.

반대로 남은 재미있고 즐거운데 나는 재미없고 괴롭다면? 당연히 할 필요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남 비위 맞추며 질질 끌려다닐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재미없고 괴롭다고 여긴 일들이 의외로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존심이 꾸겨지고 체면이 상하더라도 당장 해야지요. 하다 보면 어느새 재미가 생기고 마음도 즐거워지니까요.

우리는 즐거운데 교조님, 어버이신님께서 즐거워해 주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즐거움을 교조님, 어버이신님도 즐거워 해 주시는지 아닌지를 늘 반문하며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즐거워 해 주실 것 같으면 과감하게 하면 되고, 즐거워 해 주시지 않을 것 같으면 아무런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리면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괴로워 죽겠는데 교조님, 어버이신님이 즐거워하신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냥 하면 됩니다. 설마 우리들의 어버이신 신님께서 우리가 잘못될 일을 하라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그 괴로움이 크고, 깊고, 쓰라리고, 아프더라도 해야지요. 괴로움과 고통을 주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장래 즐거움을 위한 씨앗이 되고, 거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괴로움이 더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 무엇으로도 자기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그냥 즐겁게 하게 됩니다. 남의 이해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게 되고, 시기 질투 방해를 받더라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비방 조롱이나 비난 험담을 받더라도 하게 됩니다. 설사 총칼에 억압 탄압을 받게 되더라도 하게 됩니다. 교조님께서 걸어주신 50년간 모본의 길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고 따라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따르고 싶은 모본의 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즐거운데 나중에 괴롭다? 당연히 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중독(, 게임, 도박)에 빠지는 것, 일시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 욕심내어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것, 지금 지금의 귀찮음이나 어려움을 피하려 하는 것, 좋은 게 좋다고 분위기에 편승하여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을 따라 하는 것. 다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지금은 즐거운데 나중에 더 힘들고 더 괴롭고 더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에 취하는 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자기만이 아닙니다. 가정이 망가지고, 사회가 망가지고, 온 지구가 망가지게 됩니다.

한편 지금은 괴로운데 나중에는 즐겁다? 망설일 것 없습니다. 바로 해야지요.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 무엇도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고생을 낙으로 삼으라 하지 않습니까. 고생 끝에 낙이 있습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괴로움도 아니고, 고생도 고생이 아닙니다. 이미 그 속에 즐거움이 내장되어 있으니까요.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해 영원한 즐거움을 버리겠는가? 아니면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일시적인 즐거움을 버리겠는가? 이것을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물음을 묻지 않고서는 바른길,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없을 테니까요. 삶은 매 순간 이런 물음 앞에서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길 아닌 길,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에 십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생각하는 중심, 판단하는 중심, 행동하는 중심에 즐거움이 과연 얼마만큼 자리 잡고 있을까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자존심, 주도권, 이윤, 명예, 권위, 권력 같은 것들이 중심가치로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오락가락하든지요.

그래서 부부 사이에 자존심을 중심에 두고 서로 싸웁니다.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는 주도권을 중심에 두고 티끌만큼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기업들은 이윤을 중심에 두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부모 자식, 윗사람 아랫사람 사이에는 권위를 중심에 두고 서로 억압하거나 저항합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권력을 중심에 두고 서로 피 튀기며 투쟁합니다. 나라 사이에도 국가 이익을 중심에 두고 밀고 당기면서 조약을 체결하거나 파괴하곤 합니다.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사합니다.

과연 여기에 즐거운 삶이 중심가치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까? 즐거운 삶이 아니라 자존심, 주도권, 이윤, 명예, 권위, 권력이 터줏대감처럼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늘 싸움이고, 분쟁이고,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판을 뒤집고 부수는 모반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세계 곳곳에 모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환경도 갈수록 파괴되어 이상 기후에 천년 빙하가 사라지고, 생활의 근거마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함께 여는 즐거운 삶이 우리 생활에 중심에 놓이지 않으니까 각자의 삶에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세계정세에도 침울한 전망이 전염병처럼 번져갑니다.

그래서 친필에서는 月日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에 (14-25) 세상에서는 이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모두 어디까지나 침울할 뿐이야 (14-26)’고 명확히 일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 판단 행동의 기준에 늘 즐거운 놀이가 중심가치로 자리 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지금 내 마음이 침울하다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고,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아닌 전혀 다른 기준이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아니면 여러 가치로 뒤죽박죽이 되어 오락가락하든지요.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어떤 가족이나 모임,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삶은 인간 창조의 이유이고, 교조님께서 천계를 받은 이유이고, 극빈에 빠지신 이유이고, 근행을 가르쳐주신 이유입니다. 세계구제란 모든 인간의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삶은 태초 이래 오늘날까지 유구한 세월 동안 관통하는 진리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즐거운 삶이 중심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나를 보고, 내 가족을 보고, 주변을 보고, 나라를 보고,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와 혼란들은 결국 중심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중심이 없거나, 중심이 둘 이상이거나, 중심을 잘못 세워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짙게 깔리는 모든 우울한 그림자와 침울한 전망을 물리칠 수 있는 핵심은 즐거운 놀이를 각자의 삶에 단단한 중심기둥으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터전 감로대에 담긴 뜻이고, 우리가 매일 같이 올리는 근행에 담긴 속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터전과 감로대를 어느 곳 어느 물건 그 자체에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터전은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곳인 으뜸 장소이고, 감로대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단 하나의 보물이지만, 내 몸이 24시간 터전에 머물 수 없고, 감로대 또한 24시간 내 눈앞에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담겨 있는 상징성, 즉 인간창조의 섭리, 어버이신님의 정성, 어버이신님의 마음과 의도를 고스란히 우리 삶의 중심가치로 단단하게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신한줄기며, 구제한줄기이며, 즐거운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신님, 교조님, 터전, 감로대, 근행, 신한줄기, 구제한줄기, 즐거운 삶은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것을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말거나, 내 삶의 중심으로 바로 잡게 해야 합니다. 교조님께서는 50년간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모본을 남겨주시고, 친필을 남겨주시고, 즐거운근행을 남겨주신 것도 바로 이 즐거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근행에는 이 태초의 진실이 다 담겨 있고, 즐거운 삶의 원리가 다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누구나 모두 즐거움이 넘치도록 할 테다(10-103)’고 하신 친필 말씀은 이 근행을 통해서 즐거운 삶에 이르도록 해 주시겠다는 틀림없는 약속입니다.

 

잠깐 이야기 천신의 말을 들어다오

그릇된 말은 아닐것이니

이 세상 땅과 하늘의 본을 받아서

부부를 점지하여 왔었으므로

이것이 이세상의 시초이니라

 

땅과 하늘의 본을 받아서 부부를 점지하여 왔었으므로 이것이 이 세상의 시초이니라이것은 즐거운근행의 핵심주제이자 즐거운 삶의 실현을 위한 핵심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릅니다. 해와 달처럼 다르고, 물과 불처럼 다르고, 남자와 여자처럼 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의존하고 도우면서 하나가 되어 만물을 탄생시키고 만물을 키우면서 즐거운 삶에 이르게 합니다.

부부는 각각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금슬이 좋은 잉꼬부부라 해도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부터 열 가지 같은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신체 조건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고 사이가 좋은 것은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잘하는 것은 살려주고, 부족한 것은 기꺼이 서로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땅보고 하늘처럼 되라 하지 않고, 해가 달 보고 해처럼 되라 하지 않고, 물이 불더러 물처럼 되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입니다. 단지 하늘이 못하는 것을 땅이 하고, 땅이 못하는 것을 하늘이 하면서 둘이 하나가 되어 공존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부부의 이치고, 내 몸 내 주변 이 지구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처음부터 영원히 관통하는 즐거운 삶의 이치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상반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음과 양, 리와 정, 차가움과 따스함, 수직과 수평, 나아감과 물러남,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수와 진보, 자율과 종속, 이론과 실천....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르다고 해서 스스로 포기하거나 상대를 포기시키면서 하나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같이 가는 것이지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을 배제하거나 차별하거나 소외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에서는 악마 악당 악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천사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편 갈라놓고 네 편 내 편이니, 혹은 아군 적군이니 하며 상대를 규정짓는 논리가 없습니다. 싸움의 대상이 없고, 경쟁의 대상이 없고, 비교할 대상도 없습니다. 각각 다를 뿐입니다. 각자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므로 제 나름의 특성을 살리고,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고, 호응하고, 서로 도우면서 55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갑니다. 바로 여기에 즐거운 삶이 있습니다. 이것이 둘 하나의 이치고 천리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매일 부르고 있는 이 신악가 노래가 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행은 어떤 장소에 한정된 의례의식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형식만 남고, 일상의 삶과는 괴리가 생기고 말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근행이 의무가 되고, 짐이 되고, 형식이 되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고, 감흥도 일어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근행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내 삶의 중심으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물론 향내풍기기고, 전도고, 포교구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여전히 근행의 뜻인 즐거운 놀이를 내 삶의 중심기둥으로 세우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존심을 앞세우고, 이익을 좇고, 명예를 추구하고, 권위의식이나 권력욕에 물들어 버린다면 어떡하겠습니까. 향내풍기기고 전도고 포교구제고 즐거운 삶이 될 턱이 없겠지요. 흉내는 낼지 모르지만 아무런 실속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자나 깨나 무엇을 하더라도 빈틈없이 즐거운 놀이가 내 가슴에 내 삶에 단단한 중심가치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온갖 우울한 마음과 침울한 상황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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