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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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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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탈을 쓴 여시

남상우(구만교회장)

 

하늘 향해 나팔 솜씨 뽐내는 살구색 능소화가 허드레 지게 핀 여름날, 호랑이와 여우가 마주쳤습니다. 몇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호랑이는 날렵한 턱선을 뽐내며 여우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어흥하는 호랑이 입을 두 발(?)로 틀어막으며 말했습니다.

그래그래, 알았어. 어차피 도망갈 데도 없으니 내 이야기나 들어보고서 먹든지 말든지 해. 짐승들 잡아먹느라 바빠서 산중 뉴스에 어둡겠지만, 얼마 전에 천리왕님의 명으로 내가 산속의 왕이 되었는데 들어는 봤니? 그래서 말인데 니가 나를 잡아먹었다는 말이 천리왕님의 귀에 흘러 들어가는 날에는 네놈도 죽음을 면치 못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 니가 산속의 왕? 웃기고 있네. 이번에도 니 꾀에 내가 속을 줄 알고.”

호랑이는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이 눈알을 부라렸습니다. 다급해진 여우는

산속의 왕이 되었다는 내 말을 정히 못 믿겠거든, 그럼 내 뒤를 한번 따라와 봐. 나를 보고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짐승이 있는지 어떤지 니 눈으로 확인해보면 될 거 아냐?”

하며 여우는 호랑이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용맹하기만 할 뿐 어리숙해서 매번 손아귀에서 여우를 놓쳤던 호랑이는 이번에도 행여나 놓칠세라 껌딱지처럼 여우 뒤에 빠짝 붙어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온갖 짐승들이 여우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하며 물러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호랑이는 천리왕님이 두려워 이번에도 여우를 눈앞에서 순순히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짐승들이 호랑이 자신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호가호위는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 부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 고사성어를 접한 대부분 사람들은 어리석은 호랑이를 비웃거나, 거짓말로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는 여우에게 엄지를 치켜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호랑이가 왜 여우를 뒤따르는지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줄행랑을 쳤던 백수(百獸)를 답답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첩첩산중에만 호랑이, 여우, 백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속세에도 그들은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람자체보다는 그가 가진 것을 보고서 유불리(有不利)를 따져 대우하고 속단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부분은 가 아닌 내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치장하는 데 오랜 시간 공을 들입니다. 여우가 호랑이를 가지고 자기과시를 한 것처럼 말이죠. 또 때로는 내 것(호랑이)’을 내 옆에 오래 붙잡아두고자 거짓과 아첨, 추종(追從)도 불사합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버젓이 호랑이가 있는데도 왕 노릇을 하려 드는 여우가 있는가 하면,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자신이 호랑이인 줄 착각하는 호랑이탈을 쓴 여시(?)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복 날, 겨우내 고생했을 온돌아궁이를 손보면서 간만에 내 것(假我)’을 살며시 내려놓고 참나(眞我)’를 살펴봅니다. 무릇 내 것이라 하는 것도 내 안에서 그다지 오래 머물러주지 않습니다. ‘내 것은 한쪽에 오롯이 제쳐두고서 참나로써 온전히 나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누구도 행복을 지니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고스란히 나를 만족(단노)하는 자만이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사욕이 없는자는 없을것이나 신님의 앞에서는 사욕이없다(신악가 5장 넷)

가혹한 마음을랑 털어버리고 인자로운 마음으로 되어오너라(신악가 5장 여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