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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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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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부인회 신전강화

 

공부 못했어도 까딱없다

 

 

김일련(지선교회장)

 

저는 전생 빚이 많고 바보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가만 생각해보면 희한하기만 할 뿐입니다. 간단하게 저의 입신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37살 먹었을 때입니다. 가만히 살다가 신상이 오고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저는 애만 낳으면 죽는 겁니다. 애를 둘을 낳았다가 죽어서 땅에 묻고 세 번째 애를 낳았는데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출직하고 하나는 살았는데 그마저도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아였습니다.

초대회장님께서 너는 포교를 해야지 절대 살림을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초대회장님이 저의 큰 그늘이었습니다. 초대회장님 아니었으면 저는 진작에 땅밑에 들어갔을 겁니다. 마산에서 8년 동안 신앙을 하다가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서울에서 마디가 와서 남편을 강습 보내고 저도 신상의 마디가 왔습니다. 혈압이 올라서 조금만 움직이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원을 했습니다. ‘초대회장님께서 맨날 저에게 포교하라고 시켰는데, 신님 저를 살려주시면 이제 포교를 하겠습니다. 교조님 살려주이소.’ 하고 누워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했습니다. 8년 동안 초대회장님 말을 안 들었는데, 그때 제가 포교하겠다는 작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30분 정도 지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몸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렇게 아파서 눈도 못 뜨고 누워서 죽은 것처럼 되어있는데, 30분 만에 몸이 좋아진 겁니다. 몸이 좋아지긴 했는데 눈이 어두워져서 봉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어버이신님께서 한 번에 수호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해야 하나씩 좋아져서 눈을 보이게 해주실 건가 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서울 김포에서 살았는데 신당동 월차제에 초대회장님이 오시면 가서 뵙고 했습니다. 초대회장님이 네가 포교 작정을 안 하므로 죽다 살아나 봉사가 되고, 불구자식을 낳고 하는 것이다. 빨리 작정을 해서 포교를 시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애를 업고 김포에서 구로동까지 40리 길을 걸어서 전도했습니다. 왕복 80리를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20일을 하고 나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보이게 되니 너무 좋아서 애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그 먼 거리를 매일 걸어서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포교 작정을 했는데 강습을 보낸 남편이 강습소에서 바람이 났습니다. 그렇게 여자를 얻어서 경상도 어디로 도망가서 살게 됐습니다.

, 어버이신님이 나를 포교를 시키려고 남편을 다른 데로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 두 말도 안 하고 포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초대회장님이 포교를 하려면 고성교회로 들어와서 3년간 작정을 하고 포교를 나가라.”라고 했습니다. 막내딸을 하나 더 낳았는데, 그 딸애와 불구 애, 둘을 남편에게 넘겨주고 고성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낳기만 하면 죽고 하는데 이건 내 자식이 아니고 신님 자식이니 어디에 맡겨놔도 걱정될 것은 없었습니다.

 

초대회장님 시키는 대로 고성교회에서 3년 동안 전도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회장님이 한번 순교를 나가면 보름씩 있다 들어오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전도 갔다 오니까 신자의 딸 하나가 다 죽어간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사모님께서 네가 한번 가서 수훈을 전해봐라.” 하시는 겁니다.

그 딸이 뇌막염에 걸려서 다 죽어가는데 병원에서도 안 받아줘서 집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당시 제가 고성교회 전도사로 있다 보니 저를 보낸 겁니다. 가서 보니 목에만 온기가 조금 남아있을 뿐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 손이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수훈을 9번을 전하고 나니 목에서 '' 소리가 나더니 목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났습니다. 다 죽어가던 딸이 살아나니 그 엄마가 좋아서 밤새도록 천리왕님을 불렀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수훈을 전하러 가니까 그 17살 먹은 다 죽어가던 처녀가 말도 하고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많이 좋아졌으니 고성교회에 가서 수양을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성교회로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성교회로 데려왔습니다.

고성교회에 데려왔는데 그날 밤에 다시 죽어가는 겁니다. 새파랗게 질려서 다시 죽게 됐습니다. 교회장님도 안 계신 데 혼자서 얼마나 마음이 졸이고 놀랐겠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신전에 들락거리면서 찬물을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신님께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엄마는 저년이 다 살려놓은 딸을 데려다 놓고 다 죽인다.”고 욕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던지 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살리겠습니까.’ 하고 신님께 빌었습니다.

가만히 깨달아보니 그 아이가 남의 아이가 아니라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원한 것이 그럼 저의 딸을 데리고 가십시오. 제 딸을 바칠 테니 저 아이를 살려주이소.’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기원을 하고 기숙사 방에 가서 다시 수훈을 전했습니다. 수훈을 전하고 나니 발끝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고 난 다음에는 집에 돌아가서 그 엄마도 그렇고 신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뒤에 얘기를 들어보니 시집가서 잘 산다고 합니다.

그 엄마가 왜 그렇게 난리를 폈냐 하니, 그 엄마가 팔이 하나가 없는데 17살 먹은 그 딸이 어디 가서 세차를 해서 돈을 좀 벌어서 땟거리를 사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죽으면 자기도 살길이 막막하니 딸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거라고 난리를 폈던 겁니다.

그렇게 그 딸이 도움을 받아서 시집을 가서 잘살아서 좋긴 했습니다.

 

제가 고성교회로 들어와서 참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마치고 나가려고 하니까 어버이신님께서 신전에서 전도 나가서 입으라고 빨간 옷을 내주셨습니다. 그렇게 꿈에 옷을 받고 포교를 나가게 됐습니다.

초대회장님이 시킨 대로 그렇게 고성교회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저는 죽고, 포교도 못 했을 사람입니다. 초대회장님이 당시에 저의 명이 짧아서 40살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집집이 다니면서 전도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 사택에 있으면서 앉아서 밥을 먹지 말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서서 밥을 먹어야 한다. 라고 시켰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들고나면서 서서 밥을 먹었습니다. 초대회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전도를 하면 많은 사람이 따라왔습니다. 데려다 놓기만 하면 초대회장님이 인연판단도 해주시고, 순교 다녀오셔서 사람들 모아놓으면 얘기를 해주시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초대회장님 덕분에 잘 따라와서 전도가 많이 됐던 겁니다.

이후 포교를 나와서도 많은 수호를 받았습니다. 포교 나가서 9년 만에 딸이 출직을 했습니다. 신님하고 약속했던 그대로 딸이 출직을 했습니다. 저의 딸, 아들이 명이 짧다고 했는데, 이후에 아들도 일찍 출직했습니다. 그마저도 더 짧았던 명이 이어진 덕분이랍니다.

저의 아들 얘기를 잠깐 하면, 강습을 마친 후에 예전 고성교회 2층에 히노끼싱하라고 데려다 놨는데 그 2층에서 떨어져서 죽다 살아났습니다. 제가 나갔다 들어왔는데 당시 2대 교회장님께서 2층에서 떨어져서 다 죽었다가 한참 만에 깨어났다고 전해주셨습니다. 그때 죽었어야 했던 인연을 신님이 보여주시고 지나갔던 겁니다.

그렇게 수호를 받은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됐습니다. 내내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이었는데 32살에 우연히 장가를 가겠다고 해서 결혼하는 수호도 받았습니다. 아들이 좋은 직장도 없이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고 제대로 된 것도 없었던 처지라 누가 우리에게 시집을 오겠느냐?. 결혼한다고 우리 집에 들여다볼 사람도 없다. 라고 했는데 결혼을 하는 수호를 받아서 생긴 손자 셋이 지금은 모두 취직도 잘 되어있고 잘살고 있습니다.

 

제가 나이가 조금 들었지만, 지금껏 전도를 나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님께 은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신님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아서 살고 있는데 그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침 먹고 나면 매일 주차장에 나가서 2시간씩 전도를 합니다. 그렇게 나갔다 오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매일 그 좋은 기분으로 전도를 하러 갑니다. 다리가 좀 아프고 몸이 좀 피곤해도 교조님 오늘도 전도갑니다.”라고 고하고 나가면 2시간 동안 서 있어도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픕니다.

그렇게 주차장에 가면 나이 든 사람이 뭐하러 전도하러 나오느냐?.” 하는 사람도 있고, “고만 해도 된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물어보면 천신님 은혜를 갚으려면 끝이 없는데 이것을 언제 갚고 죽겠는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조건 초대회장님 말만 듣고 지금껏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글도 제대로 모릅니다. 제가 글 배울 시기에 6.25사변이 나서 학교도 3학년 다니다 말았습니다. 초대회장님께 제가 공부도 제대로 못 해서 포교를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무 필요 없다. 공부해도 필요 없고, 공부 못했어도 까딱없다. 고마, 신님 모셔놓고 근행만 보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지금껏 꾸준히 변함없이 어버이신님께 의지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