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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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년06월]이별 - 이옥선

2019.06.04 18:02

편집실 조회 수:119

이 별

이옥선(성원교회)

 

불모산 이 선생!

우리 부부는 이렇게 호칭을 불렀다.

우리 회장님께서 불모산에서 이 선생을 만나, 운동 나온 이 선생께 수훈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100일 작정을 하고 부부가 함께 근행에 나오게 되었다. 이 선생은 그 당시에 직장암이 재발하여 폐와 간 등 온몸으로 퍼진 상태에서 간이 굳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 부부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다. 건방지게도 정성을 다하면 신님은 기적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드러내놓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기에 밤사이에 기운이 빠졌었다는 얘기들을 간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매일 근행을 나오시고 옥수물을 드렸더니 며칠이 지나 좋은 물을 올리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니 그때부터 옥수물 작정을 하고 떠오셨다.

그리고 조석근행을 봐야 하는데 아침에는 오기 힘드니까 신악가 CD를 틀어놓고 집에서 근행을 올리라고 당부를 드렸다. 이 선생 사모님께서는 옛날 부모님이 하시듯 옥수물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스스로 옥수물을 올려서 남편이 마시는 약(?)으로 쓰셨다.

처음 왔을 때 옥수물과 옥염을 드렸더니 물을 올렸다가 먹는 것이 약이라고 생각하셨다. 이렇게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스스로 알아서 하는 두 분을 보면서 점점 좋아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고성교회 월차제 참배를 권유하였더니 많이 망설이다가 승낙을 하셨다. 왜냐하면,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서 우리 교회에 와서도 비스듬히 누워서 근행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 교조 탄생의 달 월차제라 감화까지 끝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걱정을 많이 했으나, 상급 회장님께서

여태껏 빌려 받은 몸을 고맙게 잘 썼습니다.”

고 생각하라는 말씀과 함께 수훈을 전해주셨다.

상급교회 참배 후 몸이 많이 좋아졌다며 즐거워하셔서 너무나 감사했고, 상급의 리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상급 회장님께 수훈 받는 것이 좋다며 상급에서 수양하고 싶어 했는데, 회장님께서 터전의 교인 자격 강습회의 담임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포기하고 말았다. 월차제날 공교롭게도 감화가 길어서(?) 초신자인 분으로서는 아주 힘드셨는지 감화가 참 길다고 투덜거리셨다. 그리고 진해에 있는 경남교구 월차제 참배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운전을 안 해 봐서 잘 몰랐던 탓에 주차 문제로 조금 불편하셨나 보다. 옆의 진해교회의 웅장한(?) 모습과 강습소가 많이 대비되는 모습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강습을 권유했더니 생각이 없다고 근행이나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전에 합성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함께 딱 하루 한 40분 정도 전도를 함께 했다.

60여 일 근행 오시는 동안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으셨다. 항상 근행 전에 오시고 너무 일찍 오시면 차 안에서 기다리시거나 신전에 오셔서 신전 문을 닫고는 조용히 계시곤 하셨다. 회장님께서 항상 바쁘게 다니시는 것을 알고는 잠깐이라도 쉬라고 소리죽여 계셨다. 근행 15분 전에 나가보면 대부분 미리 와서 기다려 주셨다. 행여 소리라도 낼까 봐 화장실도 우리가 신전에 나오면 가시고는 했다. 이런 배려도 너무나 고마웠다.

함께 전도할 때는 힘차게 잘했었는데 뒷날부터는 그냥 만나는 사람에게만 전도하겠다고 하셨다. 할 수 없어서 몸에 무슨 이상이 온다면 다시 작정하기로 약속하고 계속 근행을 다니셨다.

우리 회장님께서 들고 다니는 우산이 낡았다며 새 우산을 갖다 놓고, 신발이 낡았다며 새 신발을 사 오셨다. 피로하실 때 드시라며 벌꿀을 사 오시고 상처에 좋다며 자기가 아는 약을 아낌없이 가져다주셨다. 잘 드셔야 한다며 수육과 곰국을 사가지고 와서는 따뜻할 때 드시라고 권하기도 하셨다. 뭐든지 들고 오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우리도 작은 것이라도 있으면 나누어 먹는 것이 일상사처럼 되어 오래된 가족처럼 느껴졌다. 월차제 때나 기회가 될 때마다 정성금도 스스로 올리셨다.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 회장님께서는 자나 깨나 도우는 것만 생각하셨는데, 마침 고성교회보에 실린 - 터전에서 으뜸인 리교전 제3장을 읽고 수호받았다는 - 내용에 이제는 수호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면서 이 선생에게 하루에 10번을 읽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냥 앉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글 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겠지만, 똑바로 앉지를 못하기에 다섯 장 분량의 으뜸인 리를 읽기엔 부담이 많이 되었었는지 전화가 와서

제발 회장님께 이것저것 좀 시키지 말아달라 하이소.”

라며 하소연했다.

들은 얘기로는 기운이 없어 운전을 못 해서 부인이 대신 운전을 했다고 한다. 뒷날 근행을 와서는 기운이 없어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해 근행을 마치고 한참을 누워있다가 가셨다.

나는 부담 갖지 마시고 저녁 근행 후 함께 한 번씩만 읽읍시더.”

라고 말씀드리고 함께 읽었다. 그리고 뒷날은 둘째 아드님과 함께 근행을 오셨는데 근행을 마치고는 아들에게도 수훈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그날은 즐겁게 돌아가셨다. 그런데……. 뒷날이 우리 교회 월차제라 준비 중이었는데, 병원에 계셔서 근행에 못 가니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뒷날 월차제를 마치고 우리 회장님께서 가보니 의식이 없는 상태로 호흡기로 숨을 쉬고 계셨고, 한 번씩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신다고 했다. 그래도 놓기가 싫어서 포기가 안 됐다.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셔서 차라리 가시는 것이 본인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셨단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데려가 주십시오.” 하고 기원하고 수훈을 전하셨단다. 꼭 일주일을 병원에 계시다가 출직하셨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교회 곳곳에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린다. 62일을 만나고 68일 만의 이별이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살아갈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만남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헌 옷 벗으시고 새 옷 입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서 어버이신님의 귀염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