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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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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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22

 

얏호! 드디어 마침내!!!

 

                                                                                   박지수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개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사노라면이다.

지난 913, 우리 포교소 월차제에 전도청장님께서 드디어 순교를 오셨다. 이거야말로 쥐구멍에 볕들 날, 사노라면 언젠가는 있다는 좋은 날이 온 것이다. 이렇게 교세도 없는 작은 포교소에서 어떻게 감히 청장님을 모시게 된 것일까?

 

데라다 전도청장님이 부임하시고 나서 터전에서 리받은 교회부터 순교를 다니신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하셨다. 그 때 주위 여러 교회에서 청장님을 모시는 일에 분주하게 정성을 쓰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존경하는 전도청장님을 가까이 모시는 수호를 받을 수 있을까?

 

데라다 전도청장님을 존경하게 된 사연이 있다. 다 아시다시피 청장님이 170630일에 취임 봉고제를 하셨다. 그 해 여름, 전도청장님으로서는 첫 공식행사인 어린이 터전귀참 때 일이다. 그 때 포교소의 아이들 6명을 데리고 터전귀참을 하였다.

조카 녀석들 4명에다 신자 자녀 2명이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생까지였다. 터전에 돌아간 다음날 어린이 터전귀참 한국단이 모여서 전도청장님과 함께 근행을 올리고 단체사진을 찍으려 할 때 우리 포교소의 한 녀석이 아팠다.

해서 청장님께 말씀드려 바로 신전에 들어가서 수훈을 받을 수 있었다. 청장님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어보시고 3일간 수훈을 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대교회 숙소로 직접 찾아오셨다. 숙소에는 주임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교회장님들, 용재선생님들이 미리 연락을 받고 입구에 서서 전도청장님을 맞이하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황송스럽고, 고마웠다. ‘우리 아이를 위해 이렇게 직접 오시는 구나. 나 같으면 신전으로 오라고 해서 감로대 앞에서 수훈을 전할 것 같은데. 이렇게 낮은 마음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구제하는 용재의 자세인가 보다싶어 존경스러웠다.

수훈을 전하시고는 어공을 주셨는데 이건 아주 귀한 거란다. 우리 집사람이 교조전에서 히노끼싱해서 얻은 거야. 미수가루 어공이야.”하시며 주시는 데 나도 처음 보았다.

 

미수가루 어공이 옛날에 있었다고 들었지만 눈으로 보긴 처음이었다. 너무나 흔감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아이는 그것이 뭔지,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는 채 흔감해 하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설명을 하니 그럼 이 어공 오백만원 주고 살 수 있어요?”한다. “아니, 일억이라도 몇 억이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 선생님도 처음 보는 걸, 이 걸 받은 사람은 아주 드물 거야. 이걸 먹고 나면 교조님께서 도와 주셔서 반드시 건강해질 거야했더니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닌다. 다들 나도 조금 먹어보았으면하고 부러워한다. 그 다음날도 시간을 내서 수훈을 전해 주셨다. 그 일을 겪으며 , 구제란 저렇게 하는 거구나하는 걸 내 마음에 확실히 새겨 졌다. 아이는 그렇게 수훈을 받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돌아왔다.

그런 아이가 다음해에는 고적대 대원으로 다시 터전귀참을 했는데 이번에는 손가락을 다쳐서 또 세 번의 수훈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터전의 본부원 선생님들은 다 그렇게 수훈을 전하신다며 당연시 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분들 입장에서는 교조님의 도구로서 당연할지 몰라도 내게는 그게 당연하지 않았다. 너무나 본받고 싶고, 존경스런 용재다운 용재의 태도로 보이셨다. 그렇게 전도청장님과는 인연을 맺게 되고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사례인사를 드리러 가기도 하고, 이런 저런 전도청 행사에서 뵙기도 했다.

 

작년부터 그렇게 존경하는 전도청장님을 모시고 싶긴 한데, 언제쯤 모시면 좋을지 내심 계산을 해 보았다. 다른 교회들을 보니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신자분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올 수 있는 날에 주로 청장님을 모시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월차제가 13일인데 13일이 일요일인 달이 언제인가 살펴보니 올해 9월이었다. 그 때쯤이면 순교 다니신 지도 일 년이 지났으니 리받은 교회는 다 순교를 다니셨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포교소에도 순교오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해서 겁도 없이 작년 10월에 작정을 했다.

 

작년 10월이라면 포교소 개축 역사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몇 군데 아직 빚도 남아 있었고, 형편이 많이 쪼달렸다. 그렇긴 해도 포교소를 대표해서 남편인 소장이 터전에 귀참하기로 했다. 역사를 잘 마무리한 일을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보고하고, 넘치는 수호에 대한 은혜보답으로 터전귀참을 한 것이다. 터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남편에게 내년 913일 월차제에 전도청장님을 모실 수 있도록 터전 감로대 앞에서 어버이신님께 기원드리고 오세요.” 하고는 부탁을 했다. 작정을 한 김에 터전귀참하는 소장님께 감로대 앞에서 작정이 잘 이루어지도록 말씀드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소장은 우리 같은 작은 포교소에서 어떻게 모실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나서 23일 터전귀참을 하였지만 고하지 못하고 계속 망설였다고 한다. 26일이 되자, 내일이면 돌아갈 건데 집사람이 고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싶어서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부탁을 드리면서 기원을 했단다.

 

때때로 작년 신전 개수(改修)역사를 하고 낙성봉고제를 할 때 느꼈던 그 즐겁고 흔감하던 기쁨이 생각났다. 몇 명 되지 않은 신자들이지만 모두 정성을 모아 최선을 다해 봉고제를 준비하고 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할 수는 없을까?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교회에 모두 오게 해서 근행을 올리게 할 방법은 없을까? 일년에 한 번이라도, 모든 신자들이 모여서 신앙하는 기쁨과 모든 악기를 갖추고 제대로 된 근행을 올리는 수호를 받을 수는 없을까? 단 한번이라도~!! 고민하던 차에 전도청장님을 모시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이거야 말로 일석삼조로 전도청장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신자들과 우리들은 조금 더 마음 성인할 기회가 되고, 신자 자녀분들에게는 조금 더 신앙으로 이어지도록 이끄는 길이 아니겠나? 일년에 한번이라면 부탁을 할 수도 있고, 애원이라도 해서 교회에 찾아오게 만들고, 그러다 보면 신님의 신기로운 수호를 받지 않겠나? 결국 즐겁게 사는 삶으로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뭔가 일을 만들어야 자연스레 교회에 발길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해마다 한번은 어떻게 해서라도 악기를 갖추고 제대로 근행을 올려야겠다는 작정을 했다.

 

그렇게 하고도 여러 달 동안 마음으로 많이 망설여졌다. 작정은 한 것이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가 있을까? 월차제 오는 신자라곤 한명이 될까 말까하고, 상급에서 오시는 교회장님 순교비는 고사하고, 월차제 제물비도 없어 쩔쩔매고 있는 판국에다, 아직 역사 빚도 남았는데. 무거운 마음이었다. 게다가 아직 리받은 교회도 순교를 마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런데 친필을 읽을 때마다 다음 구절에서 마음이 자꾸만 걸렸다.

이 일을 다른 것이라 생각 말라 근행의 악기가 빨리 필요해 14-85

이 근행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악기 넣어서 인원 준비를 15-52

자 부탁한다 무엇을 부탁한다 생각하는가 빨리 악기 갖추어서 익히도록 15-72

어서 어서 악기라도 갖추도록 하라 근행만을 서두르고 있으므로 15-90

친필에서는 이렇게 악기라도 갖추라고, 근행을 서두르고 계시는 어버이신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말씀이 마치 작정한 것을 빨리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된 근행, 악기를 갖추어서 일 년에 한번이라도 제대로 근행을 올려라!’고 친필을 읽을 때마다 어버이신님이 당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전도청장님이 순교 다니시는데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돌았다. 개중에는 부담스럽고 귀찮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청장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닐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정도 알아야 하고, 이길의 발전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노라 하신 처음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기도 할 터이다.

 각 교회에서도 큰 어른을 맞이하는 입장으로 정성과 진실을 다하다 보면 마음성인을 이루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연세도 70을 넘긴 고령이고, 건강도 좋지 않는 상태라 개개 교회를 구태여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임 청장님들은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그토록 열심히 순교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러다가 청장님 최측근에 계시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순교 사례로 받는 것은 단 한 푼도 개인 용도로 쓰시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전도청 교육문화회관 역사 빚 갚는데 쓰신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건네 받은 게 교육문화회관 부채였다고 한다. 역사가 끝난 지 몇 년이 지나 다 갚았다고 다들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거의 1억엔 이상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본부가 보증을 서서 빌린 은행 빚 아닌가. 얼마나 어깨가 무거우셨을까? 몸도 건강하시지도 않고 젊지도 않으신 연세에. 내색은 하지 않고 그래서 더욱 무리하게 순교 다니신 건 아닐까.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우리도 적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고 싶었다. ‘순교 와 달라고 청해서 우리도 나름대로 정성을 보태자.’ 하는 마음이 예전에 한 작정을 실천하도록 부채질 하였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포교소지만 모시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용기가 났다. ‘말씀이라도 드려보자. 그 다음 일은 신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래서 지난 718일 전도청 월차제를 마치고 틈을 보아 청장님을 만나 부탁을 드려 보았다. 청장님께서는 건강이 허락해서 그 때도 살아있다면 가겠다.’고 기쁘게 말씀하셨다. ‘살아있다면 가겠다.’고 하셨다. 가슴에 찡한 울림이 왔다. 우리는 자신있게 청장님을 모시고 싶은 열망이 커기 때문에 반드시 그때까지 건강하실 것이라고 화답을 했다. 이어서 청장님은 웃으시며 먼저 고성회장님께 허락을 얻어라하셨다.

며칠 후 상급회장님께 여쭈어 보니 회장님도 흔쾌히 오케이 하셨다. 우리가 오래 망설이고 기원드린 것에 비해서 너무 쉽게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데 막막하다. 이렇게 큰 어른을 모시는 일은 난생 처음이다. 전도청은 터전의 한국 출장소이고 청장님은 결국 진주님의 대리 아닌가. 우리는 작은 포교소이니 대교회장님이나 전도청장님을 모실 기회가 전혀 없다. 그러니 모든 게 부족하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큰 손님을 맞이해 본 일이 없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있을 건가? 어른 모시는 걸 본 일이라곤 상급교회에서 몇 번 있고, 다른 교회에서 어른 모실 때 도와서 어깨 너머로 본 적이 손꼽을 만큼이었다. 상급회장님이나, 이길 밖에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모신 적은 있지만 이렇게 어렵고 큰 어른은 정말이지 어떻게 모셔야 하는 지, 혹시 몰라서 실수나 결례를 하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이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미리 이리 저리 알아 볼 수 있는 건 다 알아보았다.

 

전도청장님이 순교오실 거라고 소식을 들은 어떤 가까운 용재분께서는 세세하게 물어보셨다. 그 분은 어른을 모신 경험이 많은 분이셨다. “준비된 건 뭔지? 물수건은 충분히(열 개 정도) 있는지? 물수건 받침대도 그만큼 있는지? 수저받침은? 상과 상보는 서너개 필요한 데 있나? 순교사례비를 싸서 드릴 보자기는 네 개 있나? 접대할 그릇은? 찻잔은? 물잔은? 어른이 앉으실 앉은개는 준비했나? 음식은 뭘로? 근행 봉사자는? 교복은? 어른이 앉으실 방석은? 순교 사례비와, 준비할 돈은?” 그 분이 물어보는 모든 것이 없었다. 아무 것도 흔쾌히 있다할 게 없었다.

사람도, 물질도, 필요한 물품도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가난한 포교사 살림에 뭐가 있겠나. 대답을 채 듣다 말고 아이구~! 내 머리가 아프다. 이 일을 어찌 할래?”하신다. 과연 그 이야기에 내 마음도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휴유~!, 그냥 모시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구나.’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내 머리도 터지고 말겠다!’ 그래도 움츠려 드는 마음을 애써 추스린다. 어차피 결정된 것이고 터전 감로대 앞에서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심호흡 한번 하여 가슴을 펴고, “우린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우리 실정에 맞게 할 거예요. 결례가 되지 않은 선에서 우리 식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같은 작은 포교소에서 큰 교회 흉내낼 수도 없잖아요. 그냥 우리 식대로 할래요. 수저받침요? 그건 앞 바닷가에 가서 예쁜 돌을 주워오면 되죠!” 했다. 그 분은 기가 차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조언과 걱정을 해 주시고 고맙게도 자신이 챙겨주실 수 있는 것들을 다 챙겨주셨다. 그 외 주변에 많은 분들이 흔쾌히 도와주셨다. 이글을 쓰면서 새삼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우리 포교소만의 수저받침을 주우러 바다에 갔다. 적당해 보이는 돌을 여러 개 모아서 왔다. 실제로 받쳐보니 너무 높아서 제대로 받쳐지지 않고, 너무 동그래서 안 되고, 바닥이 조금 뒤뚱하니 넘어져 버리고. 시험 삼아 끼니때마다 이것저것 놓고서 먹어 보며 어느 게 보기에도, 사용하기에도 좋은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선별을 하고 수저받침은 오케이!”하며 둘이서 하이파이브로 기뻐했다. 나중에 보니 [효재처럼]이란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 걸 알았다. ‘이 아이디어가 내 머리에서 나왔지만 내가 완전 처음은 아니네.’ 싶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작년 역사 때도 어느 것 하나 준비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신님은 신기한 수호, 선명한 수호, 쏟아지는 수호를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당연히 수호를 보여주실 거야.’ 스스로 위로하며 다시 생각해 본다. 신님 일인데 당연히 수호해 주시지 않겠나. 엉뚱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전도청장님을 모시고 한 번이라도 악기 다 갖추어서 신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근행을 올리고 싶다는 데 어찌 외면하시겠나?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열심히 기원하면 당연히, 당연히 잘 되게 해 주실 거야. 결국 이 일은 내 신앙을 테스트하는 또 하나의 시험대인 거야.’하는 확신이 절로 들었다.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믿지 못함이리라. 믿음이 강해서 틈이 없다면 어디서 걱정이나 불안이나 염려하는 마음이 스며들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내 믿음이 약해서이지. 걱정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어두워질 때마다 , 정말 신님을 못 믿는 거야?’하며 다음 친필말씀을 외우고 또 외워 새겼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마음에 따라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13-117

월일은 무엇이든 이뤄지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아

모두가 각자의 마음 나름이야 13-120

 

청장님을 모시는 일이 우리 수준에 너무나 버겁고 무리한 일이긴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즐겁고 기쁘게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행복하고, 그 날 월차제에 오시는 모든 분들도 기쁘고 용솟음치도록 해드리자는 마음으로 나날을 가득 채우며 노력했다.

그래도 순간순간 마음이 어두워지고 힘이 들 때도 있었다. 막막하고 암담해지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어버이신님 앞에 엎드린다. “어떻게 해요?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데. 어버이신님, 교조님! 제발 도와주세요.”하고 하소연하고 기원하였다. 그러면 어느새 다시 힘을 얻게 된다.

날이 점점 다가오자 부부간에 사소하게 다투는 일이 자주 생겼다. 둘 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나름대로 긴장을 하고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평소와는 달리 작은 일에도 의견충돌과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생기니 마음이 침울해진다. 생각대로 정성금도 모이지 않고, 수월치 않은 일들 속에서 즐겁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또 남편인 소장이 일주일 전에는 발가락을 다치기도 했다. 수훈을 전하며 신님은 대난은 소난으로 수호해 주신다고 듣고 있죠. 우리 포교소에 청장님 순교라는 이렇게 큰 마디에서 작은 신상으로 넘어가 주시니 감사한 일이예요. 그리고 우리 둘이서 조금 트러블이 있는 게 낫지, 혹시 신자분들과 그랬으면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하니 정말 그렇다!”고 잘 받아들여 주었다. 발가락은 처음에는 통증도 심하고 시퍼렇다 못해 검게 멍이 들었다. 수훈을 받고 차츰 좋아져서 월차제 쯤에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청장님께서는 근행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니 2주 전부터 모여서 근행연습을 하고 역할을 정했다. 주말마다, 그리고 또 매일 연습하기로 했는데 다른 사정으로 아무도 오지 않아서 서운하고 애가 타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미리 짜둔 근행봉사자도 올 거라고 약속해놓고도 다른 일로 못 온다고 하니 맥 빠지기도 했다. ‘근행봉사자를 미리 짜서 신님께 고하고 꼭 그렇게 해달라고 애걸복걸 했는데 역시 정성이 부족했던 걸까? 아님 덕에 넘치는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일까?’ 마음을 끓이며 근행을 올렸다.

그러다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버이신님이 수호해 주시는 대로 그냥 받겠습니다. 너무 용쓰지 않겠습니다. 정성을 들여 기원을 드리는 것까지가 제 몫이고, 결과는 신님이 알아서 하실 거니까 저는 마음을 그냥 내려 놓겠습니다.!’하고. 이런 생각으로 고하고 나자 마음이 편안하게 놓아졌다.

 

한편, 화단은 어중간한 계절이라 볼품없었다. 봄과 여름에 예뻤던 마가렛, 초롱꽃, 도라지가 지고, 채송화도 한창 때를 지나 시들시들했다. 디데이 2주 전, 화단에는 그나마 가장 볼만한 백일홍과 몇 송이 안 되는 아네모네, 채송화가 간간히 피고, 오후에 피었다가 아침에 입을 오므리는 분꽃이 있었다. 아직 해바라기는 피지 않았고, 코스모스도 어린나무처럼 무성하기만 할 뿐 꽃 필 기색도 없었다. 우린 애가 탔다. 꽃을 사다 심을 형편도 아닌데 저 녀석들이 좀 피어주면 좋으련만! 해서 날마다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어루만지며 부탁을 했다. “코스모스야, 해바라기야, 우리가 존경하는 전도청장님이 생전 처음 순교 오신단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니? 니네들도 최선을 다해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줘. 부탁이야. 이제 2주 남았단다. 913일이거든, 꼭 부탁해.”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칠 때마다 꼭꼭 부탁을 했다. 그래서인지 해바라기는 사흘 전부터 한 송이씩 피어나서 마침내 그날은 모두가 만발했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역부족이었다. 청장님 오시는 그날 아침에 보니 간신히 꽃봉오리를 맺기는 했는데 힘겨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참 안쓰러웠다. “미안해. 우리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구나. 그냥 네가 피고 싶을 때 피어라. 괜찮아. 최선을 다해 줘서 고마워!”하며 코스모스를 위로했다. 코스모스는 결국 청장님이 왔다 가신 지 이틀 뒤에나 아름답게 피기 시작하더니 이후에 오신 손님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준비 과정 중에 다른 교회 사모님들께 이런 저런 경험담을 들었다. 다들 날이 다가오면 잠도 안 오고 입안이 다 헐어서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도 할 테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용을 쓰야 하니까. 한데 그런 교회들은 짜낼 젖 먹던 힘이 많겠지만 우린 그 힘도 너무나 미약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당신은 잠 못 자지도 않고, 입안이 헐지도 않을 걸! 물론 준비하느라 잠을 두 세 시간 밖에 못 잘지는 모르지만.” 하고 웃는다. “그래요, 내가 좀 간이 크니까.” 함께 웃었다. 몸이 고단하고 조금은 긴장한 상태이긴 해도 몸살이 나지도 않았고, 잠이 부족했지만 설치지도 않았다. 입안도 멀쩡했다. 이 모든 것을 신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절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랬을까. 당일 새벽까지 음식을 준비하고 자기 전에 마지막 기원을 드리니 마음이 탁 놓이며 차분해 진다. “어버이신님, 아시다시피 이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결과는 신님이 알아서 수호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되어지는 대로, 수호하시는 대로 감사히 다 받겠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새벽에 눈을 뜨니 둘 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긴장하고 있나 봐요. 오늘 오후에 보면 모든 게 잘 되었다!로 되어 있을 거니까, 마음 편안히 즐겁게 준비합시다. 아자아자 화이팅!!” 하며 일어났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다]는 말을 다시 되 뇌이며. 그리고 새벽근행 후 근처 산 아래서 어른상과 감화대를 장식할 꽃과 풀잎들을 따러갔다. 꽃과 풀잎을 따기 전에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청장님 오시는데 쓰일 것이라며 허락을 얻고 땄다. 딴 후에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전했다. 당일 아침, 바쁜 와중에도 이런 것을 따러 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스스로 고마웠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청장님 내외분께서 도착하셨다. 벌초 때라 차가 많이 밀려 늦게 도착하셨지만 표정이 밝아 기분이 좋았다. 들어서시면서 현관에 붙여놓은 환영하는 글을 보시고 밝게 웃으셨다.

 

근행에는 6살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아이들 5명이 좌근부터 12장 끝날 때까지 계속 근행봉사자로 올라갔다. 6살짜리 나림이는 자기도 뭔가를 하려고 우겨서 박자목을 잡은 아빠 옆에서 제금을 치게 했더니 맞다가 틀리다가 했지만 나름 진지했다. 그리고 전반, 후반 때는 악기를 치는 아빠와 엄마 옆에서 졸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인 성수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북을 치면서 장단 맞춰 북채를 돌리며 장난을 치다가도 틀리지 않게 잘 맞춰 쳐서 기특했다. 그리고 언제 끝나요? 아이고, 팔 아프다!”며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어리광을 부려서 모두를 웃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승훈이는 피리를 불다가 6장 쯤 되니 너무 힘들어서 팔족상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너무 힘들면 좀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분발했다. 그 전에 청장님께 여러 번 수훈을 받아 포교소 후계자로 점 찍힌 초등학교 6학년인 승민이는 피리, 손춤 그리고 후반에는 박자까지 쳤다. 중학교 1학년인 부경이는 3번 연습을 했을 뿐이지만 좌근에서 어려운 해금을 쳤고, 전반에는 어깨너머로 본 손춤을 눈치껏 따라하고, 후반에는 피리를 부르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다했다. 그런 모습을 웃으시며 다 지켜보신 청장님께서는 무척 대견해 하셨다.

 

근행이 끝나고 청장님 신전강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화창한 날씨 속에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근행을 올려서 감사하다. 저 아이들이 10년 후에는 얼마나 훌륭한 용재로 자라겠는가. 희망이 가득하다.”고 하시면서 내내 아주 즐거워하셨다. 평소에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천방지축인 아이들이 청장님이 신전강화하시는 50분 가까운 시간 동안에는 장난 한번 치지 않고 숨죽여 열심히 듣는 모습을 보고 다들 놀라워하였다. ‘전도청장님은 역시 리가 다르시구나.’하며 신기해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청장님은 따로 아이들을 불러서 칭찬과 격려를 하시며 좋은 말씀도 해 주셨다. 아이들 역시 잊지 못할 신앙생활의 즐거운 한 장면으로 추억되지 않을까?

 

살아가는 모든 순간 순간이 마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마디는 즐거움의 씨앗이기도 하다. 전도청장님이 순교오시는 행복한 마디를 통해 우린 무엇을 얻었을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평소에 가라앉아 있던 흙탕물을 휘저어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은 아닐까. 흙탕물을 휘저으면 티끌이 올라오게 된다. 휘저어야만 티끌이 있는 줄 알고, 그것을 건져낼 수가 있겠지. 물론 그것도 건져낼 노력을 할 때만 의미가 있겠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티끌과 인연들을 건져 내서 조금이라도 마음성인이 되어가는 듯해서 감사하다. 그리고 우리 포교소 전체의 신앙 정도를 체크할 수 있었다. 우린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갈 정도의 어린 신앙이었다. 북을 쳤던 초등학교 1학년 성수처럼 철없기도 하고, 투정도 부리지만 그래도 신악가에 맞춰서 북을 치려고 하는 아이같이. 그래도 좋다. 희망이 있으니까. 장래 나라의 기둥, 이길의 기둥이 될 어린아이니까.

 

이번에는 골짜기에서 자그마한 나무들이 수없이 보인다 7-16

이 나무도 차츰차츰 월일이 손질하여 만들어 키우면 나라의 기둥이야 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