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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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년11월]명경지수23 마음의 길내기

2012.06.29 10:11

모모 조회 수:1910

 

마음의 길 내기

 

박지수

 

고성장날에 시장에 나갔다. 시골 5일장이라 건강하고 신선한 좋은 농산물을 싸게 살 수 있다. 길가에서 펴놓고 장날에만 약재를 파는 곳 근처에서 누구를 기다린다고 서 있었다. 어느 중년의 부부가 와서 약재를 파시는 할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손자가 다섯 살인데 아무래도 기침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걱정하면서 무엇이 좋은 약인가를 묻고 있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가 이런저런 처방과 약재를 알려 주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우리에게 물어본다면 저런 경우는 어떻게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생각하며. 혹시나 전할 기회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말을 걸어볼까 망설이다 그 자리를 그냥 떠나고 말았다.

 

어떤 이를 만났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자기 아는 사람이 갑자기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병원에 다녀봐도 백약이 무효이고 지금은 포기상태로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단다. 속으로 어딘지 같이 가 봤으면 좋겠다. 수훈을 전하면 구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와 일들에 지나쳐버렸다. 그러다가 일은 끝나고 그냥 헤어져 오게 되었다.

 

두 가지 일을 하루 이틀 사이에 겪으면서 참으로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날에 본 그 부부에게는 이야기를 걸어서 아이 있는 곳에 가 수훈을 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말을 하다 수훈을 전할 처지가 아니면 가르침이라도 일러주면서 교회에 찾아오라고 전할 수도 있었는 데. 그리고 그 백약이 무효인 사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함께 찾아가서 수훈을 전하고 가르침을 전해야 했다. 혹시 그 분이 거절을 하더라도 용재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후회와 자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어왔을까. 망설이다가 혹은 미루다가 시기를 놓쳐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휴, 아직도 제대로 된 용재가 멀었구나!’ 싶었다. 정말이지 죄송스럽고, 한심했다. 이럴 땐 가볍게 말을 붙이는 능력을 가진 분들이 부럽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으로 무장이 된 선생님들이 부럽다.

 

어느 회장님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쉽고 가볍게 말을 잘 붙이신다고 한다. 무슨 말이라도. 그게 자기 장점이라고 했다. 응하면 좋고,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했다. 전도할 때도 천리교에 한번 와 보이소. 좋아집니다. 도움 받습니다.” 이렇게 쉽게 말씀하신다. 물론 그 말을 듣고 올 사람이야 몇이나 되겠냐만 그래도 혹시 백 명, 천명 중에 한명이라도 그 말에 온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아예 말하지 않으면 한명도 올 가능성이 없는 데 그보다야 몇 배, 몇 십 배나 가능성이 있는 일 아닌가. ‘한마디 말씀도 히노끼싱이라고 했는데 오던 안 오던 그 분은 용재로서 어버이신님께 신용을 얻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가볍게 말을 건네 보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말을 건네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아도 크게 상처받을 것도 없다. 생각에 생각을 하고 심사숙고를 거친 뒤 하는 이야기는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크게 상처를 입거나 화가 나게 된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가볍게 힘든 일이 있으면 천리교에 와 보이소, 좋아집니다. 행복해 지는 길이 있습니다.” 하다보면 상대도 부담스레 받지 않을 테고 인연이 있거나 사정이 생기면 찾아올 수도 있으리라. 그런 저런 생각과 후회를 하면서 우선 마음의 길이라도 먼저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길이라고 하니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지난해 우리 포교소 역사 때 일이다. 역사를 하면 인연이 나오고 마디가 나온다고 해서 상당히 긴장하고 조심하였다. 조심해서 그런지 별로 그렇게 심각한 마디나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몇 가지는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신전 상단을 꾸밀 때 일이다. 기둥을 받치고 있던 굵은 버팀목이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소장이 머리를 크게 맞은 적이 있었다. 그 기둥은 네모나고 한 면의 길이가 약 20센티 정도의 두께이고 무게도 만만치 않은 원목 통나무였다. 놀란 주변사람들이 바로 알러줘서 부엌에서 밥하다 가서 보니 맞은 부위가 이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수훈을 전하고 마음을 담아 손으로 부비며 맛사지를 한 동안 계속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고통도 사라지고 부기도 심하지 않아 히노끼싱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정통으로 맞았다면 크게 다치거나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고 주변에 함께 히노끼싱 하시던 분들이 이야기를 했다. 신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지켜주고 돌봐 주고 있다는 걸 살짝 보여주고 지나가 주셨다. 대난은 소난으로 아니 거의 무난으로 수호해 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이웃집과 마찰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가끔 한번 씩 뭣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써 대는 일이 가끔 있었다. ‘참 별난 사람이구나싶었다. 그래도 그런 대로 우리와는 부딪치는 일이 없이 지냈다. 그런데 역사를 하는 중에는 때때로 와서 자기 땅이 교회 땅에 들어갔느니 어쩌니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욕을 해대기도 했다. 그 집과 관련된 땅 문제는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일이라 그 분은 아마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이 신전 부지를 희사한 신자분이 멀쩡히 살아계시니 금방 탄로나는 억지였다. 하도 억지를 부려서 그러면 원하시는 대로 측량을 합시다. 측량해서 주장대로라면 땅을 돌려드리지요. 대신 그 쪽에서 측량비를 대세요. 측량비가 비싸다는 데 우리는 여유가 없고 측량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했더니 우리 집도 작년에 새로 지어 빚이 있어 어렵고, 교회도 이렇게 큰 공사를 하니 어려울 거니까,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합시다.”하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후 한동안 조용하더니 어느 날 새벽근행이 끝날 즈음 밖이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이제 날 샌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벽에 이게 무슨 소리야?’ 싶어 교복을 벗고 나갔다. 나가니 가관도 아니었다. 아직 문도 달지 않아 어수선한 우리 현관에 퍼질러 앉아서 악을 써대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래요? 이게. 이 새벽에 뭣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와서. ”했더니 교회에 근행보러 오는 아이들이 자기 집에 돌을 던졌다면서 그 조용한 새벽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아이 집에 가서 조용히 항의를 하던지, 주의를 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새벽부터 교회 와서 고함을 질러대고 악을 쓰면 누가 좋아합니까?" 했더니 막무가내로 자기 이야기만 떠들어 대면서 악을 써대는 데. 울컥 했다. '이 아줌마가 지난번에도 억지를 부리고 되도 않는 욕을 퍼 붓더니 이제 집안에까지 쳐들어와서 난리군.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되지 않을까? 가정집도 아니고 신성한 교회에 와서 함부로 악을 써대다니,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야? 교회라고 가만히 참고 있으니 뭘로 보는 거야? 힘이 없어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줄 아나? 여기에 온지도 십 년이 지났으니 이젠 한번쯤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그래야 앞으로도 함부로 시비거는 일이 없겠지.’ 싶어서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래, 교회오는 애들이 돌 던지는 거 봤어요?” 안 봤단다. “보지도 않고 왜 이 난리를 치는 겁니까?” “그래도 여기 공사장에서 온 깨진 벽돌이 증거 아니요!” “꼭 그 애들이 돌을 던졌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 다른 아이들이 던질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벽돌이 교회 거라는 쓰여 있어요?” “그럼 아니라고? 아닌데 내가 거짓말한다고?”하며 막무가내로 악을 써 댄다. “악 쓰지 말고 이야기해요. 여기 귀먹은 사람 있나?” “그럼 경찰서에 내가 이 돌을 들고 갈 거다, 가서 신고할 거다.”란다. “그러세요. 제발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서 밝히세요.” 그러면서 나가라고 밖으로 몰아냈다. “경찰서 지금 당장 가세요. 여기 와서 떠들지 말고 경찰서가세요. 어디 함부로 교회 와서 떠들어요? 당장 가요!”하며 큰소리로 응대하고 밀어서 집밖까지 내 보냈다.

밀려가면서 악을 써대니 근처에 사는 신자분이 무슨 일인가 뛰어왔다. 그러니까 또 우는 소리로 악을 써댄다. 교회에서 사람을 밀친다, 때린다, 어쩐다 하면서. 신자분이 그 이웃집 사람을 데려가고 우리는 들어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작심을 하고 한 일이지만. 정말 얼마 만에 큰소리를 쳐보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큰 소리로 소리칠 일이 살면서 세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도 있었던가. 한 두 번 정도였던가 싶게 생각이 안 나는 데 이날은 정말이지 작심하고 화를 냈다. 신자분이 다시 와서는 내가 달래고 어르고 했으니까, 아마 그 집에서 다시 올 건데 그러면 잘 이야기해서 푸세요.”하시고는 가셨다. 신자라고 제일 먼저 뛰어와서 말려주고 중재해 주시니 참 고마웠다.

들어와서 가만히 있어도 가슴도 벌렁거리고 저절로 몸이 벌벌 떨린다. ‘날벼락이 따로 없구만!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누가 우리 집에 와서 악을 써대는 이런 일은 살면서 처음 겪어본 일이고, 그렇게 대응해 본 적도 난생처음이라 멍했다. ‘도대체 이제 막 무슨 일이 있은 거야? 갑자기 몰아친 회오리 바람에 휩쓸렸던 건가? 이게 꿈인가?’싶게 멍청했다. 한동안 진정이 안 되었다.

 

신전에 엎드려서 가만히 신님, 이게 무슨 일이예요?”하며 한참을 기원드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게 역사를 하면 나온다는 마디인 모양이구나싶었다. 그렇게 순간 판단이 흐려서 맞대응을 한 것도 다 인연이 있어서 그렇겠지. 내 속에 주체하지 못한 화가 있었기도 했겠지. 억지를 부린 일에 못마땅해 하고 있었고, 가끔 악을 써대는 것도 듣기 싫었던 거야.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내가 그랬다고 믿어지질 않았다. ‘내가 이렇게 못된 구석이 있구나. 이렇게 악을 쓸 수 있구나, 악에 바쳐서 고함을 지를 수가 있구나. 내게도.’

어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더라도 용재가 할 짓은 아닌 게 분명하니까 신님께 단노를 못해 죄송하다고 사죄 드렸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신님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답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잘못한 게 없더라도 먼저 사과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길 원하시겠지.

그런데 정말이지 먼저 사과하기는 싫었다. ‘자기가 잘못했지, 내가 뭘 잘못했나? 자기가 사과를 해야지, 새벽부터 가정집도 아닌 교회에 와서 악을 써고 억지를 부려대니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는가.’ 앉아서 거듭 생각하였지만 먼저 사과하기 싫었다. 이 사태를 수습을 하긴 해야겠고, 이것이 넘겨야 할 역사의 마디라는 건 분명히 알겠는데 사과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죽어도 하기 싫다는 마음이 강해서 다시 신전에 엎드렸다.

나는 명색이 용재 아닌가. 누가 잘못하건 잘했건 어쨌든 싸움은 일어났고, 거친 말들이 오고갔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것은 분명하다. 누가 잘못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잖나. 결국 서로 인연에 말려서 그런 거니까 그것을 먼저 깨닫는 사람이 푸는 거지. 어쨌든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대든 건 사실이고, 상대가 어떻게 하든 부드럽게 단노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 내 잘못을 따지자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지.’하는 마음으로 수습이 될 때까지도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마음뿐이지 정말 행동으로 사과하기는 싫었다. 사과는 해야겠는 데 도저히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이웃집 사람이 다시 오기 전에 어떻든 내 마음을 평화롭게 수습해 놓아야 하고, 사과를 할 마음으로 만들어야 했다. 온갖 생각이 오고 가는 가운데 문득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음의 길을 내는 것이었다. 행동으로 하기 힘든 일을, 먼저 마음으로 하기 쉬운 일로 단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정말 사과하기 싫고 숙이기 싫은 마음을 고개 숙이고 사과하는 상상을 하며 미리 마음으로 길을 내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떠올려 본다. 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대응책을 마음으로 그린다. 어버이신님, 교조님이 바라시는 용재의 모습으로, 자신이 생각할 때도 가장 훌륭한 모습을 영화 보듯이 선명하게 그려본다. 가장 짜릿한 결론으로 사태가 수습되는 전 과정을 생생하게 미리 그려보면서 마음의 길을 닦아 놓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우선 험악한 얼굴로 온다. 그러면 나는 얼굴 표정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여 손을 잡으며 어서 오세요. 우선 좀 들어오세요.”하면서 끌어서 들어오게 한다. 그 다음에 우선 목이나 축이시고 이야기 하면 어떨까요?” 하면서 방석을 내어 앉히고 쥬스를 내놓는다. 그때쯤이면 상대도 조금은 부드러운 얼굴이 된다. 그러면 내가 먼저 우리가 십년 넘게 잘 지냈는데 죄송합니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어른에게 큰소리를 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한다. 그러면 상대도 뭔가 변명같은 이야기를 한다. 잘 들어준다. 그렇게 좋은 말들이 오고가고. 결국 서로 웃으며 앞으로 잘 지냅시다.” “고맙습니다.” 하고는 손을 잡았다가 헤어진다.

 

그런 장면을 수십 번 더 마음으로 그려 보았다. 처음엔 그것조차도 하기 싫었지만 방법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했다. 마음의 길이 나기까지도 여러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마음의 길을 어느 정도 낸 조금 늦은 오후에 찾아오셨다. 마음으로 길을 내고 나니 그대로 하기는 수월했다. 인사를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마음 한구석엔 아직도 얄미운 마음이 올라오고, 싫다는 저항이 있는 걸 느껴졌다. 그러나 그대로 손을 잡고, 들어오게 하고 방석을 꺼내 앉히고 음료수를 내 놓았다. 그리고, 아무런 변명없이 정중히 먼저 사과를 했다. 상대는 내 반응이 예상과 달라서인지 조금 놀란 듯 했다. 자기도 서둘러 사과를 하고 변명을 했다. 이렇게 하여 이웃집과 마찰은 미리 마음에서 내놓은 길의 결론처럼 아주 상쾌하게 해결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무슨 전설이야기 같다. 그래도 그때 수습하기 위해 했던 마음의 길을 내던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서 전도에도 미리 마음의 길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날의 일에선 어떻게 마음의 길을 낼 수 있을까? 우선 말을 건넨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우연히 손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힘드시겠네요!” 하며 위로를 먼저 한다. “그래, 병원에는 가보셨어요? 약도 먹이구요? 증세는 어떠신가요?” 그러면 약간 경계를 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소연처럼 한다. 그러면 맞장구를 치면서 한동안 잘 들어준다. 충분히 들어주다가 기회가 오면 저희는 천리교 용재거든요. 혹시 천리교에 대해서 들어 보셨어요? 천리교에서는 마음씀에 따라 병이 온다고 합니다. 보통 천리교에서는 15살 때까지는 부모의 마음씀에 따라 아이에게 병이 온다고 해요.”하면서 천천히 상황에 따라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기회를 봐서 아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픈 사람에게 전해 드리는 수훈이라는 기도가 있는데 아이에게 전하고 싶네요. 분명히 좋아질 거예요.” 그러면 조금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약간의 희망을 걸고 가자고 한다. 신님께 기원을 하면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수훈을 전한다. 아이는 이내 많이 편안해진다. 아이 부모와 조부모가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3일은 계속 수훈을 전했으면 하는 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흔쾌하게 좋아요. 좋구 말구요.”하며 화답을 한다. 허락을 받아서 3일 동안 수훈을 전하고 아이는 거의 완쾌한다. 가족들은 기뻐하면서 참으로 신통해 한다. 그리고 교회에 사례참배를 하고 신앙의 물이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용재로서 가장 뿌듯한 결말을 마음으로 그리며 길을 낸다. 길은 한번 만에 나지 않는다. 수십 수백 번을 거듭 상상해야 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눈으로 보듯이 선명하게 떠올리며 길을 내다보면 다시 그런 비슷한 순간이 올 때 절대 실수하지 않으리라. 망설임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힘들지 않게 말을 건넬 수 있으리라.

 

몸으로 길이 나지 않는다면 마음으로라도 먼저 길을 선명하게 내고 볼 일이다. 마음의 길은 남의 시선이나 이목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낼 수 있는 일이다.

자책하고 후회한다고 사태가 좋아지지 않는다. 과거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지난 일로 뭔가 깨달음을 얻고 자기를 점검해 보는 계기로 삼으면 충분하다. 좌절하거나 패배의식이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 한 달이 지난 후 어느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안면이 있는 식당 주인이 우연히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훈을 전하게 되었다. 전하자마자 자기 기분에 다 나은 것 같다며 좋아했다. 다음날도 수훈을 전하러 가기 위해 통화를 하니 많이 편안해 졌다고 했다.

친필에

진실한 신이 섭리하게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은 마음 맑아지리라 (5-49)

섭리도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마음 받아들이는 대로 갚아 주리라 (5-50)

이 갚음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멀리 천리나 떨어져 있어도 (5-51)

이것은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받아들이는 대로 곧 갚아 주리라 (5-52)

 

하셨다.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받아주신다는 말씀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수호하신다는 말씀이리라. 그렇다면 마음에 길을 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그래서 오늘도 마음에 좋은 길이 나도록 단련을 시킨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느새 잡초가 자라나 길이 모르게 되니까.

차츰차츰 잡초가 우거져 길을 모르니 속히 본길을 낼 준비를 (4-75)

나날이 마음 용솟음치며 서둘러라 속히 본길을 내게 되면 (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