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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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년02월]상냥한 마음 - 이상봉

2019.01.31 18:05

편집실 조회 수:104

춘계대제 신전강화

 

상냥한 마음

 

 

이상봉(교회장)

 

(4) 반갑습니다. 오늘 고성교회 입교 182년 춘계대제 근행을 즐겁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참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잠시 한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유순한 마음

 

1월에 올리는 춘계대제는 교조님이 은신하신 것을 기리기 위해서 올리는 근행입니다. 교조님께서 인간은 정명 115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셨는데 90세에 몸을 감추시게 되었습니다. 25년이나 일찍 몸을 감추신 겁니다. 자녀들의 성인을 위해서 정명을 25년 줄여서 몸을 감추신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조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성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조전일화편에 나와 있는 구절을 통해서 마음성인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교조전일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의 대략적인 공통점은 유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을 도와야 한다. 나쁜 성품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순한 마음으로 남을 도웁고 나쁜 성품을 고치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유순한 마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일본어로는 야사시이 고꼬로(しい)라는 말입니다. 야사시이는 유순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신악가에는 인자롭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순하다. 인자롭다.’ 입니다. , ‘상냥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그 의미가 서로 통하는 말입니다.

상냥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의 인간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유대관계를 맺지 않으면 상냥한 사람이 되기 어렵답니다.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상냥한 사람이 되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랍니다.

어린아이가 공을 던지면서 놀고 있으면 부모가 너는 지금 공을 던지고 싶구나.’ 하며 같이 공을 던지며 놀아주는 겁니다. ,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너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구나.’ 하고 받아주는 겁니다. 이런 게 상냥하게 아이를 키우는 방법입니다. 남에 대해서 공감을 하고 배려하는 능력이 키워지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놀고 있을 때, 귀찮다고 저리 가서 놀아라.” 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으면 남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태도가 키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가 싸우고 있으면 아이가 상당한 불안감을 느껴서 사람과의 관계에 굉장히 좋지 않은 경험을 쌓게 된다고 합니다. 아이가 보는 데서 부부싸움을 하는 것이 제일 안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교조전일화편에 나오는 상냥함은 이런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9 먼 데서 자녀들이

18834, 5월경(음력 3)의 어느 날, 신자 한 사람이 떡을 바치러 왔다. 그래서 시중드는 사람이 그것을 교조님께 보여드리자, 교조님께서는

오늘은 먼 데서 돌아오는 자녀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게.”

라고 말씀하셨다. 시중드는 사람들은 대체 누가 돌아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분부대로 그 떡을 남겨 두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나절, 엔슈(遠州) 지방으로 포교하러 갔던 다카이, 미야모리, 이즈쓰, 다치바나 등, 네 사람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네 사람은 그날 낮쯤 이가우에노(伊賀上野)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터전에 돌아오려고 참아 가면서 왔기 때문에 다리도 아팠거니와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네 사람은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이 가득 담긴 떡을 받고, 너무 고마워 목이 메었다고 한다.

 

이게 교조님께서 보여주신 상냥한 마음, 유순한 마음, 인자로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상냥하고 유순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에 대해 배려를 하는 사람이 유순한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먹을 것이 있어도 내가 배가 고프다고 다 먹어버리면 그건 상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는데 맛있다고 나 혼자 다 먹어버리면 다음 사람이 못 먹게 됩니다.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먹는 것 하나로도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상냥하다고 하는 것은 교조님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노자는 사람이 가져야 할 보물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상냥해지면 용감해질 수 있다. 유순하고 상냥하다는 것은 부드러운 이미지입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사람이 되면 강해지고 용감해질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겸허해져라입니다. 겸허해지면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남들 앞에 나서지 말도록 해라. 그러면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짜 힘은 부드러움과 유순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기술이나 경제 등을 축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강한 것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계발을 하고, 플러스 사고를 해야 한다는 등, 세계가 빨리 변하는 데 힘차게 노력하면서 거기에 발맞춰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는 것을 못 따라가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의 유순함을 가져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사람을 만날 때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려운 싸움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어려운 고생을 하고 있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힘든 큰일입니다.

 

인연이 닿아서 알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만나는 사람에게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든, 화가 나 있든,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해야 합니다. 화가 나서 불쾌한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런 사람에게도 상냥한 마음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이 사람도 분명히 어려운 길을 걷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상냥한 마음으로 대해주면 얼마나 밝은 기분이 드는지 모릅니다.

다른 여러 사람도 남을 대할 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게 어렸을 때부터 키워지지 않은 성향이라면 그렇게 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조전일화편을 읽고, 교조님 모본대로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면 남들은 안 되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성격을 고치는 것이 안 된다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병원에 갔다가 피검사를 했는데 알레르기 반응이 많이 나왔습니다. 집 먼지, 과일 등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이거 고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절대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니 평생 함께하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성형한다고 사람이 바뀝니까?” 하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성격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의 성격이 바뀌지는 않지만, 교조님 모본을 따라 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것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겁니다.

 

나쁜 성품

 

다음은 나쁜 성품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일본어로는 쿠세()’라고 합니다. 편향된 경향이나 성질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성깔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속담에 없어도 일곱 가지가 있는 것이 성깔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나쁜 버릇이 일곱 가지는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없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어도 남이 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눈치 못 채는 작은 버릇이라도 남들이 보면 아주 싫어할 수 있는 버릇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만 모르는 겁니다. 설령 알아차린다고 해도 고치기는 아주 힘듭니다.

이런 버릇이나 성품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성격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근행을 볼 때, 손춤을 잘 추는 방법은 옆 사람을 보며 추는 것입니다. 남들이 틀리는 것을 보면 나는 안 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자기가 손춤을 출 때 더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안 보게 되면 옆 사람이 틀린 줄도 모르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옆 사람을 보며 손춤을 추면 손춤을 잘할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이 하는 잘못된 성품이나 버릇을 보면 나도 고쳐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거울을 통해 자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길에서는 상대는 나의 거울이다.’라고 합니다. 상대가 잘못된 행동이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보고 나의 잘못을 생각하고 고칠 가능성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남들에게 거울로서 보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겠지요. 손춤을 출 때 옆 사람이 손도 흐느적거리고 손가락도 벌려서 추는 모습을 보면 나도 그렇게 손가락이 떨어져 있는지 보고 고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나의 모습도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고 의식하게 되면 손춤을 바르게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교조전일화편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23 사람이 목표인가

교조님께서는 입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우메타니 시로베에게

유순한 마음을 갖도록 하게. 남을 구제하게. 나쁜 버릇, 나쁜 성품을 없애게.”

라고 깨우쳐 주셨다. 본래 시로베는 성미가 급한 편이었다.

1883, 시로베는 휴식소 역사를 할 때, 벽 바르기 히노끼싱을 하고 있었는데, “오사카에서 밥줄이 끊긴 미장이가 야마토 지방까지 일하러 왔군.”이라는 험담을 듣고 격분한 나머지, 한밤중에 살며시 짐을 챙겨 오사카로 돌아가려고 했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중남의 문간채를 나오려 할 때, 교조님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 교조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발이 멈춰지고 화도 풀려 버렸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교조님께서 나오셔서

시로베 씨, 사람이 목표인가, 신이 목표인가? 신이 목표인 거야.”

라고 하셨다.

 

목표(目標)’의 한자를 보면 눈으로 표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목표인가 신이 목표인가.’라는 말 그대로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신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야 한다는 깨우침입니다.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해도 개의치 않고 신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고, 남에게 칭찬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신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남에게 칭찬받고 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사실 상당히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칭찬받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누가 뭐라고 하든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명확한 기준이 되는 것을 신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로지 신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힘들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여유로운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나쁜 성품을 고쳐나가는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나쁜 성품을 고쳐야 한다.’라는 말에 사로잡혀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순한 마음을 가진다든지, 남을 돕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나쁜 성품을 고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결점이나 단점을 비난하거나 좀처럼 그것에 신경이 쓰여서 나쁜 성품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쁜 성품을 고친다는 것은 자기의 단점을 고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말이라면 교조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 말씀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성격 고치기가 이렇게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든데 내 결점이나 단점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나쁜 성품을 고칠 수 있는가. 그것은 모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서예에 보면 임서(臨書)’라는 것이 있습니다. 글씨체를 하나 배우려고 하면 본보기가 되는 글씨체를 옆에 두고 흉내 내서 따라 쓰는 것입니다. 똑같이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합니다. 프로 서예가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 하나의 글씨체를 완성합니다. 그것을 임사(臨寫)라고도 하고 임서라고도 합니다. 서예 고전을 보고 글씨본을 보고 똑같이 쓸 수 있도록 따라 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글씨본 전체를 따라 해보다가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자기 글씨와의 차이점을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에는 글씨본 그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 자기 버릇 때문에 똑같이 못쓰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자기만의 버릇을 고칠 수 있게 되고 결국 똑같은 글씨체를 완성하게 됩니다.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자기만의 개성이 들어간 글씨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연습할 때는 자기 버릇 때문에 실수가 나옵니다.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모범이 되는 글씨본을 목표로 연습했기 때문에 개성을 살려서 자기만의 글씨체로 쓸 수 있게 됩니다.

교조님 모본도 이런 임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본을 의지해서 한마음으로 사는 가운데 자연히 우리의 나쁜 성품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조전일화편을 곁에 두고 어쨌든 많이 읽어봐야 합니다. 교조님께서 남을 구제하는 것에 관한 것, 인자롭게 남을 대하는 것, 나쁜 성품을 어떻게 고쳐나가는가에 대한 것들이 교조전일화편을 읽어보면 많이 나옵니다. 교조전일화편을 가까이하며 따라 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나쁜 성품을 고쳐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가 나거나, 초조해지거나,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내 뜻대로 안 풀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우리가 어디 놀러 가려고 계획했다가 비가 오게 돼서 그 계획을 포기하게 됐을 때, 하늘에 대고 욕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날씨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마음을 접고 맙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남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화가 나고,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교조님과는 시대도 나라도 환경도 연령도 다릅니다. 교조님 살아가는 방법을 의지한다고 해도 교조님과는 모든 조건이 달라져 있습니다. 달라져서 주어진 조건이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고 시대와 장소와 성별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교조님의 삶을 따라 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그런 유순한 마음을 가지는 것, 남을 돕는 것, 나쁜 성품을 없애는 것들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몸에 배서 교조님이 바라시는 마음성인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이룬 지혜로써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교조님일화편에 나오는 모본을 따라 하려는 실천을 하는 데 부지런히 노력해야겠습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4)

 

* 이 달 신전강화는 교회보 홈페이지(www.tenrikyo.kr)와 유튜브(youtube.com)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