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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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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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연성회 인사말씀

 

구제받는 토대는 교조님의 모본에서 비롯된다

 

 

    

이상봉(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용재연성회에 참가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지금부터 잠깐 구제받는 근본 토대는 교조님의 모본에서 비롯된다.’라는 내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어버이가 대신하여

 

천리교교조전일화편 162, 어버이가 대신하여 편에

교조님께서는 평소 밖에 잘 나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가 피로할 리는 없을 터인데도, 이따금

다리가 뻐근하다.”

든가,

힘들구나.”

라고 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날은 반드시 이 길의 자녀 누군가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입을 모아 ! 고맙다. 이처럼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는데도 조금도 피로하지가 않다니.”라며 모두들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조님께서 집터에서 자녀들을 위해 피로를 대신해 주신 덕택이었던 것이다. 신한줄기의 이 집터로 돌아오는 자녀가 귀여운 나머지, 교조님께서는 어버이로서 그들을 위해 피로를 대신해 주셨던 것이다.

어느 때, 무라타 이에가 며칠 동안 집터의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매일 고된 일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팔도 허리도 아프지 않을 뿐더러,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처럼 힘든 일을 했는데도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 하겠습니다.”라고 여쭙자, 교조님께서는

그런가. 나는 매일매일 다리가 뻐근해서 못 견디겠어. 자네가 아플 것이 모두 나한테 온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위 일화편은 교조님이 집터에서 자녀를 대신해서 부모로서 자녀의 몫을 짊어지고 걷거나 일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남을 위해서 대신 한다는 것은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그 이유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못 박혀 죽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인류의 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죄를 예수님이 혼자 짊어지고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예수님 혼자서 죄를 짊어졌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못 박혀 죽었다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하는 과정에서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했으면 그것을 다시 변상하거나 현실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 없고,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고 참회하는 것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입니다.

대신 죄를 짊어지고 사한다는 것에 대해 속죄한다고 합니다. 속죄한다는 것은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갚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을 없애려고 하면 보통 선한 일을 행해서 과거의 죄를 상쇄시키거나, 죄를 없앨만한 공덕을 쌓는다든지 해야 합니다. 돈이나 물질로서 대신 죄의 보상을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라고 믿는 것에서부터 기독교의 신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죄라고 하는 것은 죄악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거기서 오는 죄책감, 죄가 마치 짐처럼 우리를 매달고 있어서 항상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죄를 한다든지 죄를 사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죄를 지었다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거기서 해방되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기독교에서의 죄는 영혼에서 지은 죄를 얘기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구제라고 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영혼이 짊어지고 있는 죄악감이나 짐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천리교의 구제와 다른 것은 교조님께서는 앓지 않고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 즉 건강하게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조님께 가면 수명이 늘어나는 수호를 받았는데 이것이 구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정성으로 쌓은 덕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는 티끌, 인연을 지으면서 삽니다. 덕이 좋은 것, 플러스라고 한다면 좋지 않은 티끌, 인연이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러스마이너스를 계산했을 때 플러스가 많은 사람이 많겠습니까, 마이너스가 많은 사람이 많겠습니까? 거의 다 마이너스가 많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플러스가 많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의 생에서 플러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생이 있고, 전 전생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조님께서는 전생을 훤히 알게 되면 백주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렇게 좋은 모습으로 산다고 해도 뻐기거나 잘난 체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전생, 전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얼마나 마이너스인 체로 살았는가. 얼마나 하늘에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어버이신님이 하늘의 자를 갖다 대서 전 전생부터 전부 계산을 해서 우리에게 들이대면 전부 마이너스로 나올 것은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판해서 계산대로 살면 금생에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도움을 받아서 각자가 가진 티끌이나 인연보다는 혜택받은 삶을 나날이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모습이 우리 천리교는 교조님 한 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믿는 데서부터 신앙의 토대가 시작된다면, 우리 천리교는 모든 어려움이나 괴로움에 대해서는 교조님이 대신 짊어지고 가신 덕택으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조님은 하늘의 리가 알지 못하는 티끌투성이인 인간 자녀들을 대신해서 50년간 고난의 길을 걸어주신 것입니다. 교조님 50년간 모본의 길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몇 대에 걸쳐서 짊어지고 온 하늘에 대한 빚을 다 갚기에는 힘든 일들을 대신해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갚아주신 겁니다. 그런 길을 걸어가신 겁니다.

 

구제받았다는 것의 의미

 

구제하고 싶다는 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은 교조님의 모본의 길에 나와 있습니다. 어떻든 돕고 싶다는 것은 인간인 자녀의 고통과 어려움, 번민을 부모가 받아들여서 간다는 것이 교조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화편에

 

16. 자식이 부모를 위해

마스이 이사부로의 어머니 기쿠가 병이 들어 점점 용태가 위독해지자, 이사부로는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 못해 이즈시치조(伊豆七條) 마을을 출발하여 약 15리 길을 걸어 집터로 돌아와서 교조님을 뵙고 어머님의 병환을 부디 구제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교조님께서는

이사부로야, 모처럼의 부탁이지만 병환은 구제받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교조님의 말씀인지라, 이사부로는 그렇습니까.” 하고 그대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여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생각이 달라져서, ‘, 어떻게 해서라도 구제받게 해 드리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다시 집터에 돌아와, “부디 소원입니다. 어렵겠지만,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하자, 교조님께서는 거듭

이사부로야, 가엾은 일이지만 구제받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교조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듣자 이사부로는, ‘아아, 어쩔 수 없구나.’라며 체념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몹시 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자식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시 15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밤이 이슥했다. 이사부로는 교조님께서 이미 주무신다는 말을 듣고서도, “어려우시겠지만 어떻게든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다시 간청했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구제받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구제받게 하려고 자식이 부모를 위해 애쓰는 마음, 그것이 진실이야. 진실은 신이 받아들인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고마운 말씀을 듣고 기쿠는 죽을 목숨을 구제받아 88세까지 장수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 세 번이나 왕복한 진실을 신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어버이신님이 하늘의 잣대를 대서 어머니의 티끌과 인연 그리고 쌓아온 공덕을 계산해본다면, 플러스라서 도와줬을까요, 마이너스였을까요? 마이너스였을 것임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교조님이 대신 짊어진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세 번을 되돌아왔다고 해서 그 공덕으로 신상을 도움받는 수호를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부 교조님이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수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교조님이 정명을 25년 줄이신 것도 이런 것들과 관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목숨이 연장되는 수호를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대한 빚이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 대가로써 한 일은 없을 겁니다.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에 교조님께서 대신해주신 것뿐이지 하늘에 대한 빚은 도리어 더 늘어난 것뿐입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병이 낫고, 낫지 않고, 목숨을 도움받거나 덧없이 그냥 가게 되는 것도 하늘에 진 빚의 잣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대로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억지로 낫거나 수명이 연장돼서 빚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은 만큼 빚을 졌기 때문에,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신님의 구제하는 도구가 되어 그 빚을 갚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은 그것을 다른 말로 빚을 갚는다는 말보다는 은혜보답의 길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은혜보답의 길인 것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빚을 갚아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보답이라고 하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빚이라고 하면 안 갚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빚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하늘의 빚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인연, 쌓이고 쌓인 마음의 티끌로써, 티끌을 털어버리지 않는 한에는 구제를 받았다고 얘기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구제를 받을 때마다 하늘의 빚이 갚아지고 티끌이 털리는 것은 아닙니다.

친필에

구제라 해도 질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진기한 구제를 꾀하고 있으므로 17-52

이 구제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앓지 않고 죽지 않고 쇠하지 않도록 17-53

구제에도 신기한 구제와 진기한 구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쌓은 티끌이나 인연보다 수명을 늘리는 것이 신기한 구제라고 하면 진기한 구제는 우리 마음의 티끌이 털려 나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친필에

차츰차츰 신의 마음은

신기함을 나타내어 구제를 서두른다 3-104

진기한 구제는 마음의 티끌이 완전히 털리고 하늘의 빛이 비친 상태입니다. 우리는 진기한 구제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신기한 구제를 통해서 진기한 구제로 가는 상태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모본의 길을 걷지 않으면 모본은 필요 없다. 모본의 길 외에는 길이 없는 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어버이신님의 활동의 토대를 전제로 교조님의 몸을 기초로 해서 50년간 고난의 길을 걸어주신 것, 근행과 수훈을 중심으로 한 구제한줄기의 마음을 정해서 실행하는 것이 위에서 몇 대에 걸쳐 환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하늘의 빚이 조금씩 털려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은 1대로써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몇 대든 지 거듭해서 조금씩 털려 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다리가 뻐근하다거나 피곤해하신 것은 그야말로 교조님이 존명의 리로서 활동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티끌이 털려 나가는 것, 즉 성인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들의 이번 생뿐만 아니라 전생이나 전 전생, 또한 영의 세계에도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만큼 교조님께 걱정이나 고생을 끼쳐드리고 교조님이 해주신 구제에 의지해서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 교조님께 고생을 끼쳤다는 것을 아는 것, 교조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정명을 25년 줄이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조님은 지금도 존명의 리로서 얼마나 짐을 지워주면서 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성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티끌이 얼마나 많은지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반성하고 교조님 앞에 나서면 항상 죄송하다는 마음과 하늘에 빚진 것을 대신 갚아주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받는 수호는 항상 교조님이 존명의 리로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30일이라고 말해도 50일 앞서가서 수호를 해주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조님께서 앞서서 구제한줄기의 길의 선두에 서서 우리들을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하루라도 빨리 구제한줄기의 마음이 되는 것을 재촉하고 계십니다.

친필에

지금까지는 온 세상이 한결같이

각자 제 생각만 하고 있지만 12-89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을 할지라도

남을 구제할 마음이 없으므로 12-90

라는 구절이 바로 이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기한 구제

 

교조님이 월일의 현신이 되기 전, 31세 때 아이를 맡아서 기른 적이 있었습니다.

옆집 아이가 젖이 없어서 대신 맡아서 기른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마마병에 걸려서 회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천리교교조전에 나와 있습니다.

교조님께서 정토종 신앙을 하고 계셨을 때인데, 마마에 걸린 아이를 위해서 나라에 있는 웬만한 절은 다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나라에 있는 동대사에 가면 법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절의 법당은 재미있는 것이 1월당부터 12월당까지 있습니다. 1월당, 2월당, 3월당 .... 하는 식으로 12월당까지 있습니다. 그중에 2월당이라고 하는 곳은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나라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경치 좋은 곳입니다. 이곳을 교조님께서 다 찾아다니면서 아이를 위해 기원을 올리셨습니다. 나라에 약사지라고 하는 큰 절이 있습니다. 여기도 찾아가서 기원을 올리셨다고 합니다. 교조님의 심성은 남의 어려움은 어떻게든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맡아 기르던 아이는 내가 책임을 지고 도와야 하겠다.’라는 마음이 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먼 절까지 찾아다니면서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이의 병이 차도가 없자 부처뿐만 아니라 전통 신까지 찾아다니면서 아이를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아이를 도와주신다면 그 목숨값으로 저의 두 아이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저의 목숨까지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런 구절을 보고 생각해본다면, 이런 식의 기도는 극히 비상식적인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조님의 모본을 걷는다고 했을 때, 남의 자식을 위해서 자기의 자식 둘의 목숨과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것은 안 해도 되는 신앙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조님이 혼자 짊어지셨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이런 식의 기도를 올린다고 해도 자기 자식이 죽거나 자기의 수명이 줄어드는 일도 없이 다 도와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교조님이 다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구제받는 근본이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우리 같은 경우에 과연 자식의 수명을 몇 년 줄이는 정도의 기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목숨을 바칠 만큼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지도말씀도 있습니다.

인간 자기 자식까지도 생명을 바쳐 남을 도운 것은 제일 깊은 리(), 이것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 자기 자식 귀여움도 무시하고 도움 받고 싶다, 돕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세계에 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이것 말해 두지 않을 수 없다. (1899. 2. 2)

그것이 교조님이 걸어오신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마음만 내서 돕고자 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데서 존명의 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도움받은 애가 72세까지 살았습니다. 반면에 교조님의 자식들은 그 아이가 도움을 받고 나서 출직을 하게 됩니다. 그 아이가 마마병을 도움받고 2년 후에 차녀인 오야스가 4살에 출직을 하고, 4년 뒤인 4녀인 쯔네가 태어나 2년 뒤에 출직을 하게 됩니다. 4녀가 출직한 후 2년 뒤에 막내딸 고깡이 태어납니다. 뒤에 이 부분에 대해 자식 둘을 한 번에 데려가기는 가엾기 때문에 고깡의 혼을 두 번 출직시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2살에 죽을 운명이었던 아이가 72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70살의 수명을 신기하게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연장한 것이 아니라, 교조님이 대신 짊어지고 가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공짜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대신 보낸 교조님의 자식 둘의 줄어든 수명을 합쳐보면 그 정도의 연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도 구제할 때, 내 수명을 10년 줄여서 상대의 수명을 10년 늘려달라고 기도를 해도 상대는 도움받을 수 있을지언정 내 수명이 10년 줄어드는 일은 없습니다. 그게 다 교조님이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교조님 모본의 길 50년 전부를 걸으라고 하지 않는 것도 우리가 마음, 정성을 내는 것에 의해서 수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신앙의 수호는 교조님의 모본이 토대가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쏟는다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교조님이 걸어오신 모본의 공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뛰어나거나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구제를 받는 본바탕은 교조님의 모본에서 비롯된다고 철저하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원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속죄를 대신해서 갔다고 철저하게 믿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들도 교조님의 모본의 길이 있어서 구제받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이나 공덕에 의해서 돕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뛰어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천리교의 용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교조님의 모본의 토대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조님의 도구가 되어

 

도구에도 쓰기 좋은 도구도 있고 그렇지 않은 도구도 있습니다. 매일 쓰는 도구도 있고, 일 년에 한 번 쓰는 도구, 평생에 한 번 밖에 못 쓰는 도구 등 다양하게 갖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효율이 나쁜 도구라도 함부로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교조님을 의지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조님께서 월일의 현신이 된 이래 근행과 수훈에 의해서 구제한줄기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옆집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자식 둘의 목숨을 바쳤던 심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수행해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근행과 수훈에 의해서 구제한줄기의 길을 가르쳐주시게 됩니다.

교조님이 현신으로 계셨을 때는 수훈의 리를 직접 내려주셨지만 자녀 귀엽기 때문에 어버이의 수명을 25년 줄여서 지금부터 구제하는 거야.’라고 하시며 은신하신 후에는 현실의 세계인 몸을 떠나서 혼이 활동하시는 존명의 시대가 왔습니다. 더 넓은 세계, 공간적, 시간적인 제약이 없는 곳에서 교조님이 구제의 어버이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이라는 마음을 굳게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시 소수의 사람만 받을 수 있었던 수훈의 리를 지금까지는 자녀에게 잘 주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차츰차츰 리를 내려주마.’라고 하시고, 별석말씀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수훈의 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훈의 리를 받은 용재들에 의해 이 길이 뻗어 나가고 이 길은 근행과 수훈을 통해서 목숨을 연장받고, 모본을 토대로 해서 구제와 신앙생활의 심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그런 걸 보면, 요 며칠 사이에 수훈의 리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훈의 리를 내려주시는 진주님 몸에 신상이 왔기 때문입니다.

천리교를 신앙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리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소, 사람, 시간의 인연입니다. 장소는 집터의 인연이고, 사람은 교조님 혼의 인연이고, 시간은 순각한의 인연입니다. 그 리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명칭의 리를 받을 때는 장소의 허락을 받게 됩니다. 고성교회의 경우,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162번지에 신님의 목표를 진좌하고 근행을 본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사람은 교회장은 누구로 한다는 것입니다. 월차제는 20일로 한다는 시간의 허락을 받습니다.

사람이 바뀔 때는 장소에 대한 리의 허락은 받지 않지만, 사람에 대한 허락을 계속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리가 틀림이 없이 교회가 돌아가고 있을 때 교회로서의 기본적인 모습을 유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탈이 생기면 사정교회라고 합니다. 정해진 사람이 근행을 못 올린다거나, 명칭의 리를 받은 장소가 마음대로 옮겨져서 근행을 올린다거나 하는 것이 탈이 난 상태입니다.

본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감로대의 장소가 있고, 진주님이라는 사람과 26일에 올리는 월차제가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변고가 생긴다거나 하는 것은 리의 흐름에서 보면 같은 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수훈의 리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신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선에서 열심히 포교하시는 분들은 어떤 잘못이나 뉘우침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의 신상이라는 것은 높은 곳에서 보고 생각하는 부분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즐겁고 순직하게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잘했든 못했든 노력하는 사람들은 진주님의 신상에 대해 우리 용재들이 열심히 안 해서 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걸 보면 누구나 교조님의 모본을 토대로 구제를 받고 있고 그 빚을 갚고 있습니다. 그 빚을 갚는 데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실히 은혜보답을 하시는 분들, 일선에서 전도하고 고생을 하시는 구제를 위해 노력을 하시는 분들도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골짜기에 있든, 산 위에 있든 우리가 인연이 있어 용재로서 이 길에 들어온 이상 하늘의 은혜, 빚을 갚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지 않았나 각자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고 각자가 느끼는 겁니다. 이 길은 가슴속에서 느끼고 반성해야 수호를 받는 길이지 남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각자가 깨달아 가는 길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어둡거나 무겁게 가질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보답을 위해서 남을 구제하는 길에, 교조님이 이끌어주시고 노고를 해주신 모본의 길을 토대로 삼아서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수훈의 리를 내려주시는 근행의 심이신 진주님께서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근행을 볼 때마다 기원을 드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인사말씀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

 

* 본 인사말씀은 교회보 홈페이지(www.tenrikyo.kr), 유튜브를 통해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