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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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년05월]마음의 청소 - 이상봉

2018.05.30 15:58

편집실 조회 수:115

교조탄생의 달 월차제 신전강화

 

마음의 청소

    

이상봉(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교조 탄생의 달 월차제에 참배하시고 함께 즐겁게 근행을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잠깐 한 말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

 

가슴속 청소

 

올해는 교조님께서 탄생하신 지 220회 되는 해입니다. 지난 418일에 터전에서는 교조님 탄생제를 올렸습니다. 천리교를 신앙하는 우리들은 교조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워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조님은 가슴속의 청소, 마음의 청소를 해서 마음의 역사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주셨습니다.

마음의 청소라고 하면 무엇일까요? 집이나 어디든지 청소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더러워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대로 두면 저절로 더러워집니다. 특히 사람은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행동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어버이신님은 우리에게 육체를 빌려주시고 마음의 자유를 줬는데, 사람이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흔히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 가정의 문제를 살펴보면 마음의 자유를 잘못된 방향으로 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속 청소는 입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한다는 것은 어떤 얘기를 듣든지 속마음으로 걸러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한다는 것은 말로써 상대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억압하거나 티끌을 쌓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갑질이라는 행위가 있습니다. 유명 대기업 총수 일가들의 일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폭언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부모들이 했던 것을 답습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마음에 억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자녀도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푸는 방향이 부모를 향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반항하고, 달려들고, 말 안 듣고,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거기서 못 풀면 자기 배우자나 자식들에게 푸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가 한번 억압당하면 어디엔가 풀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마음의 자유를 잃은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나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그런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악가에도 가혹한 마음이라는 구절의 손춤이 누르는 동작으로 표현됩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돈이나 권력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고 낮춰보는 것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렇게 억압당하고 나면 그 반동이 표출됩니다. 억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한번 터져 나오면 물밀 듯이 거기에 대해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투사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겪은 경험에 비춰서요.

사회의 문제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라고 합니다. 일본에 많은 사회현상입니다. 우리말로 은둔형 외톨이라고 합니다. 사회에 나가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직장도 없이 집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대개가 억압당하는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자라면서 많이 듣는 말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랍니다.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나라에도 층간 소음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싸우다가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일본 같으면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얘기가 나오면 무조건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합니다. 자라면서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이 위층에서 조금 시끄럽게 하는 것을 배려해주지 못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음을 억압당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은둔형 외톨이의 형태로 표출되는 겁니다. , 자기 뜻대로 안 되는데 가정이나 사회에서 그것을 강요했을 때 그걸 해소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음의 병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볼 때 우리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억압당하는 것을 풀 줄도 알고 청소도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데 그런 건 필요 없이 잘했네! 못했네, 열심히 했네 안 했네! 이런 것만 가지고 사람을 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이런 문제는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엮여있습니다. 한 사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 연관이 되어있는 겁니다. 부모, 자식, 형제 모두요. 주위에 있는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청소라고 하는 것은 비단 천리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이야기하는 데가 많습니다. 사람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이상, 보고 듣는 것에 대해 우리 마음이 밀접한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해서 듣는다고 했을 때, 흔히 말하는 가요의 노랫말을 보면 대부분이 사랑 노래입니다. 이런 것을 계속 듣고 있으면 사람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사랑해서 떠나보내고 부여잡고 하는 식의 가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사람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노래는 예사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까지 변화를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낙천적인 노래를 듣게 되면 사람의 마음도 거기에 따라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뀝니다. 듣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마음을 지배할 수도 있는 겁니다.

또 어떤 걸 보느냐에 따라서도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희 아이들은 게임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걸 많이 하게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 같은 것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도둑을 대하는 마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이 더럽혀지면 우선 자기 자신이 싫어집니다. 남을 증오하고, 원망하고,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이 자기 마음이 더럽혀진 상태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청소해야 하는가? 어떤 물건처럼 꺼내놓고 연마를 하는 식으로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청소를 하면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가르치는 데도 있습니다. 보이는 주위가 마음에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지럽고 불안정한 사람은 그 사람의 집에 가보면 청소를 하지 않고 다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책상에도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고 온갖 물건들이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어지러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청소를 열심히 해서 정리정돈을 잘 해야 합니다. 또 더러워진 것을 보면 청소를 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특히, 남들이 더럽다고 싫어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리교에서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님은 화장실에서 난다.’라고도 말합니다. 신님은 항상 깨끗한 곳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남들이 더러워하고 싫어하는 곳에 계신다는 겁니다. 화장실 청소를 잘하면 신님을 만나볼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서 마음도 닮아간다고 합니다.

보고 듣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천리교교조전일화편에 보면.

39 더욱 좋았을 텐데

1874년의 일이었다. 니시우라 야헤이(西浦彌平)의 장남 나라조(당시 2)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의사도 손을 떼고 이제 틀렸다고 여기고 있을 때, 같은 마을의 무라타 고시로(村田幸四郞)의 어머니 고요로부터 신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터에 부탁을 했더니, 곧 나카타 기사부로가 구제하러 와 주어 신기한 구제를 받았다.

야헤이는 곧 나라조를 데리고 사례참배를 하고, 그 후 열심히 신앙을 계속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집터에서 돌아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마루 밑에서 달가닥달가닥 소리가 났다. 야헤이가 이상하다고 여겨 가만히 일어나 살펴보니, 한 사나이가 놀라 뛰쳐나와 어둠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귀중한 물건을 싼 커다란 보따리가 남아 있었다.

야헤이는 대단히 기뻐서 이튿날 아침 일찍 참배하러 가서 덕택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하고 교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갖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라고 말씀하셨다. 야헤이는 그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앞의 말씀은 집에 들어온 도둑을 우연히 발견해서 도난을 면한 니시우라 씨가 감사 인사를 올리니 교조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이 더 좋았을 일일까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일만을 좋아해서는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단노를 하지 못하니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수호라는 것은 상식적 판단을 넘은 차원의 깨닫는 법으로써 개인의 구제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구제라는 넓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습니다.

 

도둑을 맞은 것이 왜 좋은 일인가 그것은 도둑을 기쁘게 했기 때문일까요?

도둑질은 욕심의 티끌로써 없애야 할 대상입니다.

정문유운집에 도적이 들어왔을 때의 깨우침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사람 중에서 좋아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핍해서 어쩔 수 없어 훔치는 것이겠지. 참 안된 일이야. 먼저 물건을 도둑질 당한 사람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누가 훔쳐갔다는 것은 뭔가 훔쳐갈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좋아해야 된다. 사람은 전생에 어떠한 빚이 있을지, 전생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으니, 물건을 도둑맞았을 때는 전생에서 빌린 것을 돌려줬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억울한 일은 없다. 또 하늘의 길은 다 꿰뚫어보고 있어서 만약 돌려준 것 아니라 빌려준 것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교조님의 깨우침은 첫째 도둑맞을 물질이 있다는 것을 먼저 기쁘게 생각할 것.

둘째로 도둑을 맞는 것은 전생의 인연으로 생각해보면 전생의 빚을 갚은 것이 되는 것이고, 전생에 쌓았던 하늘의 빚을 청산하는 일이다.

셋째로 전생의 빚이 없었을 때는 도둑한테 빌려준 것이 되어 장래에 이자를 쳐서 돌려받는다.

이와 같이 도난의 마디를 만났을 때, 교조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교조님은 도둑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시고, 마디를 만나게 된 당사자에게 스스로 참회하고 전생 인연을 깨닫게 해서 반성함으로써 구제한줄기의 마음이 되어 참된 의미로써 단노, 즐거운 삶이 가능하게 된 것을 더욱 고맙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교조님의 가르침을 보면 누가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비난하고 질책하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살려주고 세워주고 계십니다.

마디를 만나게 된 당사자에게 스스로 참회해서 전생 인연을 깨닫게 해서, 반성해서 이 사람도 교조님 말씀에 따라 구제한줄기의 마음이 되어서 참으로 단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단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안 좋은 일이라도 전생 인연을 갚은 것으로 생각하면 단노가 되는데 도저히 못 받아들이고 납득을 못해서 억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단노가 될 수 없습니다.

 

좋아 좋아

 

 

다음에 일화편 21 좋아, 좋아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조님의 처음 신자라고 불리는 야마나까 추우시찌 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 먹을 것이 없는 중에도 쌀을 한 되, 두 되씩 가지고 매일 일참을 하기도 하신 분입니다. 교조님께서도 이 분의 집에 세 번씩이나 찾아가 체재하시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씨앗의 수호를 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길을 가면 영원히 고생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씨앗을 주신 것입니다.

 

21 좋아, 좋아

18685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그것은 야마나카 주시치가 입신하고 5년 뒤의 일이었는데, 날마다 큰비가 계속 내려 여기저기서 개울이 넘치고 전답과 집들이 떠내려가는 큰 홍수가 났다. 주시치도 자기 소유의 산이 무너져서 큰 나무들이 일시에 매몰되고, 또 전답이 1정보나 토사(土砂)에 묻혀 버리는 등, 대단한 피해를 입었다.

그때 앞서부터 주시치의 신앙을 비웃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 꼴 좀 봐. 바보 같은 녀석이야.” 하며 나오는 대로 욕을 퍼부었다. 그 소리를 들은 주시치는 상심한 나머지 곧 집터로 돌아와 교조님께 여쭈었더니, 교조님께서는

자아 자아, 좋아, 좋아. 바다 밑바닥까지 떠내려갔으니 장차는 좋을 거야. 신앙을 하고 있는데 왜 전답도 산도 떠내려가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단노하라, 단노하라. 장차는 두고두고 좋을 거야.”

라고 타이르셨다. 주시치는 대난을 소난으로 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어버이신님께 감사드렸다.

 

교조님은 야마나까 추우시찌 씨의 산이 홍수로 인해 무너지고 전답이 토사에 묻혀버리는 큰 마디에 대해서 바다 밑바닥까지 떠내려갔으니 장차는 좋을 거야.”라고 하십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장차는 좋을 거라는 말씀에서 나중에 고맙게 되는가. 그래서 단노하라는 말은 지금 참고 견디라는 말이 되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도말씀에서는 감내한다(참고 견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은 정성 하나의 리, 하늘의 리라고 깨우쳐 둔다. 참고 견디는 리를 작정한다면 넓고 큰 리이다. 마음에 참고 견디며 지낸다면 맑은 하늘과 같다. 하나이 길이라고 깨우쳐둔다. (1893. 7. 12)

 

참고 견디는 것은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지만, 단노의 전 단계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내 형편에 맞춰서 좋은 일이다, 안 좋은 일이다. 괴로운 일이다, 기쁜 일이다. 하는 식으로 순간으로 판단을 해서 마음을 요동치게 하지 말고 참고 견딘다는 것도 하나의 리라고 했으니 이 과정을 거쳐서 단노를 할 수 있는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천리교 교전에 어떠한 신상과 장애도, 사정도 어버이신님이 빗자루가 되어 각자의 가슴을 청소하시는 두터운 어버이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야마나까 씨의 큰 마디가 마음의 티끌을 터는 어버이마음의 나타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라고 깨달을 수도 있다. 마디를 만나서 티끌이 털리고 나중에는 더욱 고맙게 되어 온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다 밑바닥까지 떠내려갔다.’라는 것은 토사나 큰 나무만이 아니라 그것들에 붙어 있던 마음의 티끌도 떠내려갔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산을 잃어버렸다고 불행하거나 부족스럽게 생각하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도난의 마디에 대해서도 물건을 도둑맞아서 잃어버리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라 그것에 붙어 있던 마음의 티끌도 포함해서 전생의 빚을 갚는다.’라는 말씀의 뜻이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생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마음의 티끌이 많다는 뜻이고, 빌린 것을 갚는다는 것은 마음의 티끌을 없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도 어버이신님의 빗자루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마음의 청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난의 마디는 티끌이 털려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티끌의 청소는 구제한줄기의 길입니다. 근행과 수훈에 의해서만 없앨 수 있습니다. 어버이신님은 우리들을 마음 청소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세계 일렬들의 마음의 청소를 하고 계십니다.

지도말씀에

자아, 청소야. 빗자루가 필요해. 많이 필요해. 써 보고 쓰기 좋은 건 언제까지나 쓸 거야. 써 보고 쓰기 불편한 건, 한 번뿐이니라.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는 거야. (1887. 3. 15)

 

빠짐없이 좋은 도구만을 갖추어도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도구도 나쁜 도구도 다 있어야 된다. 나날의 일을 통해 알게 된다. 잘 분간하라. (1901. 6. 14)

 

실상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좋은 일입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쓰기 좋은 도구라는 것은 교조님의 도구들로써 구제한줄기에 나서는 용재들이고, 나쁜 도구들은 상대의 티끌을 털어주지만, 그 티끌을 자기가 쌓는 도둑과 같은 남을 괴롭히고, 곤란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들은 용재로서 좋은 도구 이상으로 어버이신님이 볼 때 나쁜 도구의 티끌을 털어 주는 도구로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모본을 믿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이 길을 걸어서 신앙하는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마음의 청소, 역사라고 하지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속으로 즐겁지 못하고 부족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마음의 청소를 게을리 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청소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신전강화를 마치고자 합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