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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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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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대제 신전강화

 

터전에 마음을 잇는 신한줄기 신앙

 

오대성(웅천교회장)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가 고성교회 춘계대제에 참배하여, 여러분들의 손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솟음치며 올리는 근행에 참배할 수 있어 제 마음은 너무나 기쁩니다.

이 훌륭한 즐거운 근행, 구제근행을 왜 올리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터전의 리를 받아서 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장님을 심으로 하여 여러분 개인의 생각에 따라 올린 게 아니라, 즐거운 삶을 바라시는 어버이신님의 마음을 나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진지하게 올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칫하면, 터전의 리를 가볍게 생각하고, 단단히 감로대를 바라보지 않는 신앙적 분위기에, 작년 7월 26일 저녁, 감로대에 대한 너무나 놀라고 슬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감로대가 넘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큰 마디를 당하고서 내통령 선생님께서는 ‘천리시보’를 통하여 어버이신님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림과 동시에 터전에 단단히 마음을 잇는 신한줄기의 신앙을 하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참배한 기회에 비록 부족하나마 터전, 감로대로부터 받고 있는 어버이마음, 즉, 터전에 마음을 잇는 신한줄기 신앙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잠시 동안 잘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박)

 

터전 한줄기

 

여러분께서 터전에 돌아오셨을 때는 마치 자신의 진짜 부모님을 대하듯, 하루에 몇 번이라도 신전에 찾아 근행을 올리는 그러한 모습에서,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존엄한 모습을 비춰주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께서 그렇게도 흠모하고 계시는 터전, 감로대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친필에서는

거기서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그 터전에서 창조한 거야 17-7

이 집터에 감로대를 세우는 것은

인간을 창조해 낸 증거 10-79

라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월일 어버이신님께서 진좌하시는 터전은 인간이 잉태된 근본 되는 장소이며 모든 수호의 근원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단단히 터전·감로대를 향해 보면서 신앙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어버이의 슬하로 돌아와서 기쁜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기도 하고, 부탁이나 상담할 일 등 무엇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터전·감로대에 계시는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기 위해서는, 어버이마음 즉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해 나갈 때 자신도 구제받고 남도 구제받게 할 수 있습니다.

선인으로부터 터전에 마음을 잇고 신한줄기 신앙으로 구제받았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도 이 정신이 이어질 수 있다면 구제하고, 구제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드릴까 합니다.

「천리교 교조전일화편」 171편에 ‘보물 산’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큰 강에 교각 없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가면 보물 산에 올라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복판쯤 가면 교각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그래서 중도에서 되돌아오기 때문에 보물을 얻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죽을힘을 다해 떨어지지 않고 건너가면 보물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건만, 도중에 험한 곳이 있다고 거기서 되돌아오기 때문에 보물을 얻지 못하는 거야.”

라고 일러주셨다.

 

우리에게 악인연인 신상·사정의 마디가 왔을 때,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나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고 주춤하거나 주위의 이야기를 듣고 옆길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잘도잘도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진실한 도움이란 이제부터야 (신악가 제3장 넷에)

라고 일러주셨듯이 힘이 들더라도 여기까지 즉, 보물 산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 한 해가 시작되고 올 한 해를 걸어가는 속에서 12월 31일이 ‘여기까지’라면 그때까지 가야 합니다.

교조님께서는 친필에

지금까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라도

하룻밤 사이에도 마음을 바꿔라 17-14

진실로 마음 깨끗이 바꾸면

그것도 월일이 곧 받아들인다 17-15

라며 부질없이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 놀라지 말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 가운데서 어버이신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마음의 청소와 마음 바꿀 것을 촉구하고 마음작정을 서두르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꿀 것 같으면, 즉시 뚜렷한 수호를 나타낸다고 끝없는 어버이마음을 일러주셨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인간인 자녀들이 구제를 받아서, 고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을 본래의 즐거운 삶의 세계로 바꾸는 길을 가르치려고, 어버이이기 때문에 겪으신 황송하고도 고마운 모본의 발자취를 남겨 주셨습니다.

진흙바다와 같은 무미한, 맛이 없는 생활이 아니라, 매일 매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어떠한 일을 하는 속에서도,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생활(삶)의 즐거운 맛을 느끼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시고 리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창조의 어버이며, 정에 있어서도 피가 통하는 육친의 어버이이신 어버이신님 교조님께서도 같이 즐거움을 가지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심은 터전, 감로대, 어버이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항상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며 왔는지 되짚어봐야 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터전 한줄기로 터전에 마음을 기울여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터전이 보물 산이고 터전 한줄기가 될 때 터전으로부터 보물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86년 6월, 모로이 구니사부로는 넷째 딸 히데(秀)가 세 살에 출직했을 때, 너무 슬퍼 터전으로 돌아와서 “뭔가 틀린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교조님께서는

“자아 자아, 어린아이, 세 살도 한평생, 평생 세 살 아이와 같은 마음.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여라.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면 사방으로 뿌리가 뻗는다. 사방에 뿌리가 뻗으면 한 쪽이 떠내려가도 세 쪽이 남는다. 두 쪽이 떠내려가도 두 쪽이 남는다. 굵은 싹이 트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교조전일화편 187, 터전 하나에)

 

즐거운 삶이라는 도도히 흐르는 물결 위에 요란스러운 잔물결과 같은 악인연이라는 마디를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님의 노고 속에 셋째 따님 오하루의 42세 출직, 교조님 옥고 중 다섯째 따님 고칸의 39세 출직, 부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한 분밖에 없는 아드님 슈지의 61세 출직, 교조님 출소 후 다음날 6세 된 다마에를 남겨두고 며느님 마쓰에의 32세 출직, 85세 된 할머니가 6세 된 손녀를 돌보아야 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어버이의 아픈 상처를 교조님께서는 먼저 겪으시며, 이 세상에 나쁜 인연을 가진 자녀들에게 단노하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보물 산에 도착하려면 인연자각과 단노로 이와 같은 큰 마디 속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노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인연자각이 따라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잊고 있었던 결과로 나타난 원인을 찾아야만 나 자신을 즐겁게 다스릴 수 있는 단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단노는 덕 중에 최고의 덕입니다. 빌려 받은 몸을 가지고 히노끼싱으로 덕을 쌓고, 빌려 받은 돈으로 덕을 쌓을 수 있고, 빌려 받은 입을 가지고 한마디의 말씀을 통해서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노는 빌린 것이 아니라 내 것인 마음을 다스린 것으로 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단노를 하게 되면 여덟가지 티끌 중 ‘분노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저희 초대회장님께서 남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한평생 성 안내는 공부를 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단노를 할 수 있는 가장 밑바탕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단노의 마음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노의 마음으로 다스려야만 마음자리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단노가 되지 않으면 출발점이 없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화가 나고, 미워하고, 부족을 쌓는 등 모든 것이 단노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교조님께서는 여러 자녀를 잃는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교조님께서는 태초에 잉태한 자녀수와 같은 연한이 지나면 신으로 예배 받게 해주겠다는 순각한의 인연에 의해 나타나셨습니다. 교조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은 우리 인류 자녀들이 쉽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모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신앙이 4, 50년 되었다고 해도 자녀가 하나, 둘 혹은 셋이 출직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앙하시겠습니까? 아마, 주위에서도 천리교 신앙을 비웃으며 자기가 하는 다른 신앙으로 바꾸자고 하면, 그렇게 따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조님께서는 모든 자녀를 잃었지만, 이 세상에 최고의 안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교조님께서 먼저 겪으시면서 보여주신 겁니다. 교조모본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교조모본의 핵심입니다. 말만으로 이렇게 하라 하고 시키신 것이 아니라, 순산시험에서부터 모든 것을 직접 겪으시면서 단노하는 법을 일러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항상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만드는 신한줄기 마음이 될 때, 세 살 때 마음, 즉 순직한 마음으로,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면 어떤 마디에서도 뿌리가 뻗고 굵은 싹이 튼다는 가르침 하나하나에 교조님의 모본, 발자취대로 실천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님께서 단노하셨다면 우리도 단노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신앙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환생하는 곳이 본고장 터전입니다. 살아서 마음을 바꿔서 환생할 수 있는 곳이 터전입니다. 만약에 내가 40까지밖에 못 산다고 한다면 내 마음이 바뀐다면 터전에서 어버이신님으로부터 살려질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터전에서 마음이 바뀌어 환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뀐 모습을 보고 어버이신님께서 수호해주시는 것입니다.

 

덕만 있다면

 

여러분, 터전이 이렇게 번창 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이렇게 번창하게 했습니까? 터전에는 천리왕님, 교조님이 계시고 어버이마음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교리라고 하면 그것은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이 바로 어버이신님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몸소 실천으로 교조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열이라면 아홉의, 천리교의 가르침이 아닌 좋은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세상의 가르침을 가지고 번창하게 만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원리로서 만들어 가는지 교조님 일화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메타니 시로베가 어느 때, 교조님 곁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별안간 “지금 도톤보리(道頓堀)에서 대단히 좋은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만...” 하고 세상 이야기를 여쭈었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나는 41세 때부터 오늘까지 세상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이 집터는 말이야, 신한줄기의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신님의 말씀인 거야.”

라고 훈계하셨다.

(교조전일화편 159, 신한줄기의 집터)

 

교조님께서는 어버이신 천리왕님의 마음인 가르침만으로 번창 된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말씀만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세 살 때 마음만으로, 순직한 마음으로 교조님께서 하셨던 그대로 왔기에 이러한 번창 된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심이 되는 본고장을 만들어왔습니다.

여러분 가르침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교회도 가르침만으로 번창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포교소도 가르침만으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가르침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성인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세상의 가르침을 초월하는 최고의 가르침, 완성의 가르침입니다.

고산구제를 위해 오야마토신사의 마디 때 신직자들은 “천리교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학문은 거짓인가?”라고 반문하자, 교조님께서는 “학문에 없는 옛날 9억9만6천 년간의 일을 세상에 가르치고 싶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직자들은 기가 차서 “또 오겠다.” 하고 물러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도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엄마가 아파서 교회에 가려 하니까 “엄마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교회에 가느냐.”라고 자녀들이 기가 차서 되받았을 때, 가슴이 콱 막혀 답변도 못 하는 우리 자신들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의약은 결과를 치료(수리, 거름)하지만, 가르침은 원인, 뿌리를 제거하는 가르침으로써 의약이 할 수 없는 처방인 근행과 수훈으로써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질병의 뿌리를 끊고,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앓지 않고,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진기하고도 진실한 구제를 한다는 확신을 나 자신도 가지고, 자녀들에게도, 남에게도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믿음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77년, 이부리(飯降) 요시에가 12세 때의 어느 날, 손가락 끝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교조님께 가서 여쭈었더니,

“월금을 배워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곧 그럴 마음을 정했으나, 당시 이치노모토 마을의 다카시나(高品)에는 월금을 가르쳐 주는 데가 없었다. 요시에가 “고리야마로 배우러 갈까요?”라고 여쭙자, 교조님께서는

“배우러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가르치러 오게 하지도 않을 거야. 이 집터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야. 세상에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집터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리가 있는 거야.”

라고 하시며, 친히 손을 잡고 근행의 월금을 직접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교조전일화편 53, 이 집터에서)

 

라는 일화를 통해서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친필에

나날이 신의 이야기 차츰차츰

듣고 즐거워하라 고오끼인 거야 3-149

라고 “나날이 진실한 어버이신님의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하라. 이 이야기야말로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영원히 전해질 세계구제의 가르침인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오끼 말씀에

“신님은 가르침만으로서 인간의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거야.”라고 가르침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대학을 나오고 취직을 해서 직업을 얻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연을 닦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골프를 해서 우승을 하고, 가수가 되어 춤을 추면서 한류스타가 되었을 때 그것이 최종의 목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인생행로를 걸어가면서 겪어야 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처할 수 있는, 버틸 수 있는 해답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길의 가르침입니다.

“9가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이 안에는 해답이 없다. 이 안에서 가르쳐서 세상 밖으로 가르쳐 나갈 것이다.”

이것이 교조님의 가르침인 최후 구극의 가르침, 완성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선인들께서는 순직한 마음에서 출발하였지만, 힘이 들었고, 힘이 드는 속에서도 이 가르침을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터전에서 가르침으로서 보물을 얻었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신앙하고 있지만, 단명의 인연이 있으면 자녀가 출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도 괴로움도 슬픈 사연들도 생겨나옵니다. 그러나 자나 깨나 변함없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르침만으로 질병의 뿌리, 액운의 뿌리를 끊는 구제를 받아 가야 합니다. 특히, 교회, 포교소에서는 철저히 가르침(신님의 말씀)이 이야기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사교신앙이 아닌 신한줄기의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교회, 포교소가 되어 내용이 충실한 교회로서, 구제장소로서 제 몫을 해야 합니다. 노래가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에 가고, 옷이 사고 싶으면 옷가게에 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침을 가지고 즐거움을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포교소가 해야 할 몫입니다.

교조님께서는 이처럼 터전에서 우리들의 신한줄기의 마음가짐을 일러주고 계십니다.

 

교조님께서는 마스이 기쿠에게

“이 집터는 좋은 것 먹고 싶다, 좋은 것 입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낼 수 없는 곳이야.

좋은 것 먹고 싶다, 좋은 것 입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고만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자유하지 않는 집터야. 이것이 세상의 부자 집터인 거야.”

라고 들려주셨다.

(교조전일화편 78, 부자집터)

 

교조님께서는 터전에서부터 인생행로의 고난에 대처하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많은 자녀가 구제받기 위해서 터전으로 여쭈러 왔고, 터전에서부터 구제받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터전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또 따라가는 과정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어느 때, 기타 지로키치에게

“많이 모여 오는, 돌아오는 자녀들 가운데는, 짐을 꾸려 수레로 싣고 가는 사람도 있는 거야. 또 보따리로 싸서 짊어지고 가는 사람도 있지. 그런가 하면, 해진 보따리에 가득 채워 들고 가는 사람도 있어. 그래서 집에 닿기도 전에 깡그리 없애 버리는 사람도 있는 거야.”

라고 들려주셨다.

(교조전일화편 79, 돌아오는 자녀들)

 

터전에 돌아갔다 올 때, 신님에게서 많은 것을 받아서 싸 들고 오는 사람, 받기는 받았는데 집에 오면서 다 흘려서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버이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으로 선물을 주시지만 받을 덕이 없다면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터전에 희망을 품고 갔지만, 돌아와서는 너무나 실망스럽기도 하고 심지어는 왜 갔는지 의구심까지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친필에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신한줄기로서 이것은 자신의 일이야 1-50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라 생각 말라

모두 각자의 집안 이야기야 7-31

라고 하시며 자기 일, 집안의 이야기를 통한 구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거나, 보고 있지 않거나. 또, 주위에 신앙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오직 자신과 신님, 교조님과의 관계로써 구제의 길이 열려옵니다.

지금 우리들 주위에는 인간 중심으로, 사교신앙에 젖어들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앞날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처음에는 정으로 즐거울지 몰라도 시간이 흘러 되돌아볼 때 이미 신한줄기의 길에서 벗어나 시순을 놓쳐 구제받을 수 없는 옆길(응법)로 나와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이것을 응법신앙이라고도 지적하고 계십니다. 신한줄기에서 반대되는 길입니다.

교조님 재세시 ‘스케조의 이단 사건’에서 보듯이 눈병으로 구제받았다가 터전을 부정하는 행위에서 훗날 시각장애인으로 더 큰 악인연을 받아 출직한 좋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파를 만들고 이단의 길로 걸어가 끝내는 구제받았던 으뜸을 잃고 더 큰 마디를 맞아 돌이킬 수 없는 악인연을 다시 갖고, 내생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이번에야 세상사람들

잘도잘도 씨앗을 뿌리러왔다 (신악가 제7장 열로)

이 터전은 신님의 전답이므로

뿌려놓은 씨앗은 모두 싹튼다 (신악가 제7장 여덟에)

라는 가르침이 무색해질 때가 있습니다.

터전에 무엇하러 돌아왔는지를 잊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일에만 눈을 돌려 중요한 리에 눈길을 두지 않기 때문에 모처럼 터전에 돌아와서도 어버이의 자애를 입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점은 우리들이 주의를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충분히 덕을 심고 덕을 받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교조님께서는 어느 때, 야마나카 고이소에게

“눈에 보이는 덕을 바라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덕을 바라는가. 어느 쪽인가?”

라고 말씀하셨다.

그에 대해 고이소는 “형태가 있는 물건은 잃기도 하고 도둑맞기도 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덕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조전일화편 63, 눈에 보이지 않는 덕)

 

그동안 우리들이 힘껏 노력해왔던 길. 올해도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덕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간절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터전에 귀참하고 터전에서 돌아올 때는 수레에 싣고 오는 덕을 받기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시 저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비 오는 날 강습소에 강의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좀 늦어서 택시를 타게 됐습니다. 우산을 쓰고 갔는데, 그 우산은 10년 동안 썼던 우산입니다. 그 우산을 택시에 두고 내렸습니다. 아주 작고 가벼워서 좋았는데 다시 사야 했습니다. 참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습니다. 환자를 보러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기사님이 1년 전에 잃어버렸던 우산을 제게 돌려주는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기했습니다.

“이게 제 것이 맞는데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1년 전에 두고 내리신 것을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의 인상이 너무 좋아서 기억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다시 자기의 택시를 탈 것 아닌가 싶어서 그 우산을 잘 말려서 비닐봉지에 담아 택시 트렁크에 보관하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맙게 되돌려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돌려받은 우산을 지금까지 10년을 더 써서 20년째 같은 우산을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덕이라는 것을 이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것이 되려고 하면 신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되돌려주시는구나!’ 빌려주셔야만 내 것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강의하러 나갔는데 와이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단추가 작아서 찾을 수도 없습니다. 단추 찾는 것은 포기하고 다음 날 다른 와이셔츠를 입고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신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강습소 마당 저편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난히 반짝이는 게 신기해서 갔더니, 전날 잃어버렸던 와이셔츠 단추가 햇빛에 반사돼서 반짝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와이셔츠 단추를 찾을 수 있게 된 일이 있습니다.

‘신님께서는 이렇게 돌봐주시고 계시는구나, 내가 가져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빌려주시는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어쨌든 물건을 아껴 써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됐습니다.

형태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선가 내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필요할 때 내 것으로 가질 수 있고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조님께서는 “덕을 쌓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창조한 어버이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인간인 자녀에게 모든 것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는 집을 수 있고, 덕이 없는 자는 집을 수 없는 것이야.”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덕만 있다면, ‘오늘 내가 오렌지를 먹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누군가 집에 오렌지를 사서 옵니다. 친구 결혼식에 ‘새 옷을 하나 입고 싶다.’ 하고 생각하면, 집사람이나 남편이 사줄 것입니다. 덕자는 마음만 먹으면 신님이 쓸 수 있도록 빌려주시는 겁니다. 창조한 어버이는 아무 필요 없다. 인간인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빌려주시고 있는 겁니다.

오늘 과일 하나를 신님께 헌공했다 하더라도 이 과일 하나는 남을 위해서 쓰이고 있는 겁니다. 덕이라는 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살리어지는 은혜를 알고 사람의 은혜를 알고 보답하고 실천하는 것이 덕자의 마음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덕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덕의 마음을 가질 때 내 것인 덕의 마음이 빌려진 이 몸을 통해서 쓰여져 나가는 것입니다. “덕을 쌓아라. 덕을 쌓아라.” 하는 것은 덕의 마음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을 통해서 한마디 말씀으로, 물질이나 돈으로도 무엇으로도 덕의 마음에서 쓰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덕이 심어질 때 어버이신님께서 필요할 때 쓸 수 있게 해주시는 겁니다. 앞에서 일화편을 통해 말씀드렸듯이 형체, 돈을 가지고 있으면 남이 가져갈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내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필요할 때 그 돈이 생겨서 써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들 포교소, 교회를 비우실 때 문 안 잠그고 다니시죠? 덕이 있다면 집에 좋은 것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불안하게 장롱 안에 무언가를 숨겨두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교조님께서도 “무거운 짐만 덜 수 있다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면 언제까지나 즐겁게 걸어갈 수 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집착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려하고, 모으려 하는 바람에 즐거움을 잊게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덕을 얻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26일 터전의 춘계대제에 귀참하시는 분이나, 하시지 않는 분이나 터전에 마음을 기울이는 신앙이 바탕이 될 때 언제나 보이지 않는 덕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터전의 리, 어버이의 의도를 완전히 세우며, 터전에 진실을 완전히 모으고 따르는 신한줄기의 신앙으로 열심히 노력해가는 마음작정이 교조님께서 가르쳐주신 본길이며 나 자신이 구제받고, 남도 구제받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다 함께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올해에도 어버이신님의 많은 수호 입으시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고성교회 춘계대제를 기해 오늘의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교회장님과 경청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제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4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