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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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81

 

삼 세 번

 

박지수

 

어떤 이는 6좌 근행 실천을 자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도보 전도를 잘 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혼자서도 신명나르기를 잘 하고, 가정방문 전도를 잘하는 용재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실천 담을 들으면서 살짝 기가 죽는다. 그에 비교하면 나는 이렇다 할 특별하게 잘 하는 실천이 없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기원근행 정도다. 그렇다고 12장 근행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세 번씩 하는 좌근 기원을 자주 올리는 편이다. 심지어 잠이 오지 않아도 누워서 좌근 기원근행을 올린다. ‘악한 것을 제거하고....’ 하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예전에 ‘도우’지에서 본부 수양과 강사를 하셨던 어느 교회장님의 기사를 읽었다. 하루에 몇 십 번의 좌근 기원근행을 올린다는 기사였다. 수양과 강사를 하면서 수양과 학생들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원을 매일 좌근 기원으로 올린다고 했다. 그때 ‘아~ 꼭 12장 기원근행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구나.’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실천이 약한 나에게 12장 기원근행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는데, 좌근 기원근행이라니 너무나 반가웠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할 수 있지 않은가. ㅋㅋ. 그 이후로 좌근 기원근행을 자주 올리게 되었고,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5년 전, 서울 살던 조카가 우리 포교소에서 들어와 살면서 중학교에 다닐 때 일이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은 통영의 한적한 시골 바닷가라서 저녁 막차가 9시면 끝난다. 시내에서 타려면 8시 반 정도다. 시내에서 볼일을 보거나 조금 어물거리다 보면 막차를 놓치기에 십상인 환경이다. 특히 서울 아이에게 그 시간은 초저녁이고, 한창 놀 시간이니까. 어느 날, 아이가 막차 지나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그 전에 늦는다는 연락이 없었고, 전화를 하니 연락도 되지 않았다. 여기 와서 몇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놀랐고, 두 번째는 걱정되고, 세 번째로는 무서웠다.
마침 소장인 남편은 당직이라 상급교회 머물고 있으니, 아이가 어디 있다 해도 차로 데리러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는 외진 곳이라 밤늦게 택시를 타는 것이 더 위험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앞이 캄캄하였다. 정말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 불안으로 두 근 반 세 근 반하는 가슴을 안고 신전, 어버이신님 앞에 나아갔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좌근 기원근행을 올렸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한번 근행으로는 안정이 안 됐다. 처음 겪는 일인 데다, 뉴스에서 보고 들은 온갖 험한 일들이 떠올랐다. 나를 믿고, 맡겨진 아이인데, 잘못되면 어쩌나.... 계속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연달아 두 번, 세 번 기원근행을 올렸다. 세 번째 기원근행을 올렸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신님께 맡겨지는 마음이 되었고 평화로워졌다.

잠시 후 연락이 왔다. 폰 배터리가 없어서 연락을 못 했다는 것이다. 
“차 시간을 신경 쓰고 있었는데, 친구들이랑 놀다가 어쩌다 보니 막차를 놓쳐버렸어요. 죄송해요. 이모. 지금 친구 집에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란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거기 친구 부모님께 재워달라고 부탁드려봐. 허락해 주시면, 거기서 자고 내일 바로 학교로 가렴.”이라고 했다.
이 경험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바로 좌근 기원근행 3번을 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삼 세 번 기원근행을 올리면 어지간한 일은 모두 다 해결되었다. ㅎㅎㅎ 사람들 사이에도 삼 세 번 부탁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탁도 거의 다 들어주듯....

4년 전쯤에 지혈이 되지 않은 위급한 수술환자를 어떻게든 도움받게 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요청이 왔다. 한쪽으로는 수혈을 계속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피가 계속 빠지는 중이라 급한 연락이 왔다. 최상급 월차제날이라 참배 가던 중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직접 갈 수가 없었다. 나로서도 일상으로 해야 하는 일들과 꽉 짜인 일정 때문에, 할 수 있는 작정이란 ‘좌근 기원근행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라도 세 번 좌근 기원근행을 올렸다. 하지만, 지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마다 기원근행을 올리겠다는 작정을 했다. 그때는 밤새 계속된 기원으로 서른 번쯤 기원근행을 드린 것 같다. 밤늦은 시각에 기원을 드리다 보면 어느새 엎드려 잠들어 있던 때도 있었다. 어쨌든 지혈은 되었고, 혼수상태이던 환자는 살아났다. 이것이 짧은 시간에 올린 가장 많은 횟수의 기원근행이었다.

그때 도움받은 게 좋았던지, 그 뒤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구제요청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3번의 기원근행을 기본으로 하였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수호받을 때까지 계속 기원을 하였다. 한밤중에도 구제요청이 오면 세 번씩 기원 드리다 잠들기도 하고, 누워서도 계속 기원을 드렸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자다가 잠시 깨었을 때도 기원을 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새벽에 깨어날 때도 기원 드리고 있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기원을 드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흔히 참선 수행에서 화두를 들 때 ‘몽중일여’, 즉, ‘꿈속에서도 화두를 잊지 않고 든다’고 하는 데 그런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고, 보통의 경우는 세 번의 기원으로 거의 모든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어느 날은 강습소 강의 갔던 남편이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를 모르게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차를 몰고 집에 오지 못 하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란 나는 자주 드리던 세 번 기원을 떠올렸다. 함께 있던 수정이에게 부탁해서 둘이 세 번의 신상기원근행을 올렸다. 세 번의 기원이 끝나고 전화를 하니 남편은 괜찮아졌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터무니없는 일로, 악다구니하면서 욕을 퍼붓는 사람으로 마음이 괴로웠다. ‘내 기억으로는 이생에서 그렇게 막말로, 누군가에게 악다구니를 한 기억이 없는데 전생에 했던 짓인가 보다.’ 애써 단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워낙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욕과 악담을 해대니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너무 괴로웠다. 

신전으로 나아가 이런 상황이 기막혀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엎드리니 눈물이 쏟아졌다. 하소연하면서, 세 번의 기원근행을 올렸다. 늘 배우고, 이야기하는 대로, 내가 알지 못하는 전생인연을 참회하면서, 어떻게든 상대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기원 드렸다. 상대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역시 세 번 기원을 드리고, 어버이신님께 이 일을 맡기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기원근행을 통해 마음의 티끌을 털고, 전생인연을 반성 참회한다.
기원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얻는다.
기원을 통해 어버이신님께 의지하고, 인간 마음, 걱정하는 마음을 탁 내려놓는다.
기원을 통해 그 일에 대한 어버이신님의 뜻을 여쭙고, 긴요한 일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내 신앙 수준에서는 세 번 기원해야 믿어지나 보나. 단번에 믿어지면 단번에 기원을 끝낼 텐데 말이다. ㅋㅋ.

3번쯤 어버이신님께 기원하며 수호해 달라고 조르면,

‘이 녀석아! 아직도 못 믿냐? 용재라는 사람이 그리 나를 못 믿어? 쯧쯧.... 알겠다. 알겠어. 알았으니 인제 그만 졸라라. 그리 조르면서도 내가 안 믿어지냐?’ 하시는 듯해서 슬그머니 웃음도 나오고, 너무 귀찮게 해 드린 것이 죄송하기도 하다.

이렇게 어떤 고민이나, 괴로운 사정이나 아픈 질병조차도 기원근행 세 번으로 도와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매우 놀랄 일도 안정시켜주면서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다 보면 숱한 일들을 다 겪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평생 몇 십 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까. 그럴 때마다 세 번의 기원근행은 내게 큰 비책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면서 정말 빠른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삼 세 번의 기원근행은 이 길을 걸어온 내게 너무나 큰 고마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