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명경지수 80

 

맑히거나, 티끌을 쌓거나

 

박지수

 

3년 전부터 천리향이라는 전도모임을 만들어 거기에 집중하여 활동하고 있다.

모임을 하다 보면 분란을 일으키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뭔가 못마땅해서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는 사람, 그 안에서 이간질하는 사람, 밖으로 마구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찬물을 끼얹는 사람, 자기를 특별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앞에서는 칭찬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험담하는 사람은 더 많다. 마치 세간에서 ‘대통령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욕한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떤 모임이든, 어느 교회나 조직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 어딜 가도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이길의 용재로서, 어떻게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고, 대해야 할 것인가는 늘 고민이 된다.

 

천리향 모임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이 함께 활동하다 보니 때때로 분란이 일거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조치를 취한다. 그래도 안 되면 강제로 정리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사 어디에나 그렇듯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 누군가 티끌을 일으키고, 거기에 따라 늘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난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생기면 덩달아 다른 사람들 마음에 서운함, 배신감, 혹은 원망, 분노, 미움이 생겨난다. 그들이 일으킨 티끌로 다른 사람들 마음에도 티끌이 쌓이고, 방치해 두면 점점 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어두워진다. 그리고 모임 자체가 어느새 티끌투성이가 된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티끌 일으킨 사람들도 함께 손잡고 가면서,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노심초사한다.

과연, 어버이신님께서 이런 사람을 보내, 문제를 보여주시는 의도는 무엇일까를 깨닫기 위해 기원을 드린다.


단편교화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S 씨는 매일 교회에 참배 온다. 그러나 푸념, 부족이 많고 즐거울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남에게 낱낱이 털어놓으므로 우리는 질려버렸다. 가령, 새 신자가 교회에 와서 신님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음도 밝고 용솟음치며 걸음걸이도 가볍게 다닐 즈음이면, 이런 사람을 잡고 S 씨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리금을 세우면 호주머니가 비고, 아무리 신앙을 해도 즐거운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등등 누구에게나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남의 마음을 흐리게 하여 신앙의 걸음걸이를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들도 S 씨에게 변을 당했다. 모처럼 정성껏 노력한 사람들의 마음을 즐거움의 절정에서 나락의 밑바닥으로 떠밀어 버리는 것이다. 헛된 노력은 아니지만 쌓으면 허물고 또 쌓으면 무너뜨리는 한심스러운 사람이라고 속을 끓이기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오늘은 한번 S 씨를 야단쳐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였다.
그때, 종종 들리는 아내의 백모님이 교회에 참배하러 왔었고, 우리들의 포교의 실상을 견문하시면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여러 가지 유익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셨다.

여러 가지의 이야기 끝에 “오늘은 아무 선물도 못 가져왔는데 이것을 놓고 간다”고 하시면서 한 장의 종잇조각에 남겨준 것이 「자식과 씨름, 지고 즐거워하는 어버이마음」이라는 글귀였다. 우리 부부는 이 글귀를 보고 아연했다. 이제까지 S 씨는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여 곧 책망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참다운 어버이는 자식의 방종을 용서하고 큰마음으로 감싸고, 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넓디넓은 어버이마음이 아닌가.
백모님이 우리들의 마음을 내다보고 계시는 듯해서 우리들의 좁은 마음이 부끄러웠으며, 단노의 마음이 부족한 것을 참회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던 후 S 씨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밝고 용솟음치는 마음으로 매일의 근행에 참배하는 것과 더불어, 남을 즐겁게 하는 말과 행위로써 신자를 대하게 되었다. 남을 돕는 데는 뭐라 해도 이 어버이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단편교화, 미찌노토모사엮음, 김현술 옮김, 130페이지)

 

지난 20일, 고성교회 추계대제 신전강화 때 고성교회장님이 말씀해 주신 오마사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교조님의 첫째 딸 오마사님이 있는 데, 성격이 괄괄하고 모가 나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많은 이들이 싫어했다. 그래서 교조님께 여쭈어보니 교조님께서는 “오마사는 10개 가운데 9가지는 안 좋은 점이 있지만, 한 가지는 쓸모가 있다. 어버이신님 일에는 그 괄괄한 입이 쓸모가 있다. 오마사의 그 말에 부족을 느끼고 신앙을 그만두는 사람은 체에 걸러진 사람이다. 오마사의 말에 부족 없이 신앙을 계속하는 사람은 남은 알맹이들이다. 오마사의 입이 거르는 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마사는 남한테 부족을 사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써 사람들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사람마다 신님 일에 다 필요한 역할이 있다. 그 좋은 점을 살려서 남을 돕는 능력을 살려 쓰도록 하자’고 하셨다.

 

지난 5월 말에 전국포교소장 연성회에서 혼시바 후사 교회장님이신 타니자와 시게오선생의 강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이 감화를 듣고 많은 분이 ‘뜨끔하다’고 반성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혼시바 후사교회 용재인 ‘T 군’에 대한 이야기를 실례로 들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젊은 사람의 육성은 현장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젊은이를 정말 성가시게 여기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버이신님께서는 그 젊은이 성가신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결코 성가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잘 아시는 지도말씀으로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 성가시다. 세계에서 보면 성가시다. 그러나 이길에서는 성가시지 않다. 이길에서 충분히 중요하다. 이길은 멀어진다 해도 말하지 않는다. 구제한줄기라 한다. 이것 잘 분간하라, 열 가지 가운데 아홉 가지 반을 열심히 하고 남은 반은 하지 않는다. 열가지 가운데 반의 리가 아홉가지 반마저 없앤다. (중략) 나가서 구제하는 것도 안에서 구제하는 것도 같은 리, 나이가 아직 안 되는 자, 자기 자녀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얼마나 큰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인가, 나날이라 한다. 말 하나 라고 한다. 이것 잘 분간해 들어라. (1893.6.19)

 

세상에서 보면 분명히 '성가신 사람, 그런 젊은이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는 성가신 것이 아니다. 이 길에서는 그런 성가신 사람도 충분히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자식보다 소중하게 여겨달라. 그렇게 되면 그 젊은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지도말씀입니다.
정말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버이신님의 한없는 어버이 마음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거기에 젊은 사람들을 키워 나가는 방법에 대한 답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도말씀에

귀찮다 귀찮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면 귀찮은 리가 나타나게 된다. (1892.8.8)

는 말씀도 있다.

이런 이야기와 말씀을 듣고 읽으면 곤란한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교조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 같다. 성가시게 하는 신자들, 용재들, 그리고 주변에 티끌이 일게 만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르쳐 주신다.

 

내 몸과 주변에 나타나는 모든 일은 내 마음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신님께서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성가시게 하는 사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역시 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신님의 수호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오마사님의 경우처럼 알맹이와 쭉정이를 체로 거르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는 신님에게 각자 마음의 자유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는 상대의 자유로운 마음씀씀이를 가지게 되고, 나는 나대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자유로 부여받은 상대 마음을 내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 된다. 나 역시 마음의 자유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일으키는 티끌을 보고, 그 티끌을 뒤집어쓰거나, 맑히거나 두 가지 마음을 다 쓸 수 있다. 어느 마음을 선택하든 마음의 자유를 가진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보통은 상대방을 탓하기 쉽지만, 남이 내 선택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무슨 티끌을 일으키든 그것은 상대 마음의 자유지만, 내가 그 티끌을 받아서 미움, 원망, 분노 같은 티끌로 자신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일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다. 남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더라도, 내 마음은 내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데 티끌을 스스로 쌓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남이 일으키는 티끌을 뒤집어쓰는 쪽으로 마음의 자유를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티끌을 여기저기로 옮기니 전체가 온통 티끌에 휩싸이게 되는 일이 생긴다. 용재라면 나날이 근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쌓이는 티끌을 하루하루 털어내며 맑히는 일이 기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잘 알면서도 나 역시 어버이신님께서 주신 마음의 자유를, 부정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서로 도와 즐겁게 사는 일에 쓰지 않고, 남을 비난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일에 많이 쓰고 있다. 내 마음에서 ‘저런 인간,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싹 지워버리거나 잘라버린다. 하지만 이런 무시와 미워하는 마음이 자신도 편안하지 않다.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은 당연히 신님의 뜻에 맞는 것은 아닌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란을 조금 일으켰다고 마음에서 먼저 잘라버리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무엇이든 서로 돕기’라고 하신 가르침에 어긋날 뿐 아니라, 즐거워지는 행위는 더더구나 아니다. 이길에서는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먼저 상대를 잘라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연이 다했으면 내가 자르지 않아도 천연자연으로 끊어진다. 내가 자르면 더 큰 분란이 일고 서로 상처를 받게 된다.

설사 상대가 먼저 싫다며 끊고 떠나간다 하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끊어서는 안 된다. 그와 함께했던 고맙고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른 일일 것이다. 그에게 줬던 배려, 도움, 애정을 생각하며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서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의 삶이 진실로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축원하며 어버이신님께 기원근행을 올린다. 실제로 해 보면 이것이 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길임을 곧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어이구~ 저래서야 하겠나? 쯧쯧! 저러니 문제다. 저러니 되는 게 없지. 저래서야 어디 용재라 하겠나. 남 부끄럽다. 상대하지 말고 무시하자.' 하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무시, 경멸하고, 미워하는 내 마음이 자신의 영혼을 더럽힌다. 그뿐만 아니라, 그 상대에게 그대로 비쳐서 엇박자 내는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결국 나는 이중삼중으로 티끌을 뒤집어쓰는 꼴이다. 상대는 거울,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으니, 엇박자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그에게는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훌륭한 점도 많은 사람이다. 저 사람의 훌륭한 면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지 살펴서, 격려하는 게 좋겠지. 그이의 훌륭함을 일깨워주고 그것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차가운 눈으로 보지 말고, 큰마음, 따스한 마음으로 포용하는 일이다. 어떤 이라도 그가 가진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펼쳐나가도록 믿고 기다리고, 격려해 주면 누구라도 훌륭한 용재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남을 격려하고 키워주려는 노력이 곧 내 그릇을 키우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임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성인 시키고, 모두 다 같이 행복해지는 길임도 틀림없다.

 

이번에 집안사람들 모두 큰마음이 되라. 뭔가 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쓰지 마라. 큰마음으로 되어다오. 이것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뒤는 큰 것으로 된다. 무엇도 마음으로 걸 필요는 없어. 모두 모두 돌봐주라, 돌봐주라. 돌보아주는 것은 즐거움의 씨앗, 일립만배라는 것은 이미 이전부터 깨우쳐 둔 것이니. (1905. 12. 4)

 

우리는 어버이신님, 교조님의 길을 따르는 용재로써 형제 중의 형제이다. 나와 뜻이 조금 다른 것을 보고, 내 마음속에 티끌을 쌓는 일은 정말로 삼가야겠다.

이 길을 함께 가는 우리가 큰마음이 되어, 서로 돌봐주며 이 좋은 길을 즐겁게 걸어가야지. 그러면 내 앞에 즐거운 삶의 세계가 더 빨리 다가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