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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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08월]으뜸 하루 2 - 우영옥

2017.08.31 07:16

편집실 조회 수:102

으뜸 하루 2

 

우영옥(진해교회, 경남포교소장)

 

어린 마음속의 천리교

 

그 덕에 저도 천리교를 따라다니면서 신앙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근행을 따라보는데, 어린 마음에 천리교 교리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너무 쉬운 내용이 좋았습니다. 옛날 신악가는 ‘일망무제 너른 세상’, ‘유구한 온갖 세상’ 등 한자표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뜻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성당에 다니다 잘 안 다니게 됐을 때도 저는 개신교 교회를 열심히 다녔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엄마, 아빠가 천리교에 가게 되어 천리교를 따라다니게 됐던 겁니다.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도 천리교 교리가 진짜 맞는 것이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리교를 열심히 다녀야겠다.’

하고 마음먹게 됐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길에서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요즘에 왜 교회에 안 오느냐 하면서 말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말이

“목사님, 저희 엄마, 아빠가 천리교를 가는데 저도 따라서 천리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저만 기독교를 다니게 되면 그게 불효이기 때문에 저도 천리교 다니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기독교를 못 다니게 됐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얘기했을 정도였습니다.

‘악한 것을 제거하고...’ 하는 그 교리에 제가 푹 빠져버린 겁니다.

세월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제가 어려서 누워있을 때 천리교 선생님들이 전도했던 그 씨앗이 자라면서 제 영혼이 알아듣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도 신님 말씀을 - 꼭 신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하기보다도 생활 가운데서 신님 말씀을 - 자꾸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제가 자라면서, 또 포교하면서 더 깊게 깨닫게 됐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100일 작정을 해서 열심히 근행을 보던 차에 100일을 보름 정도 남겨두고, 집에 있는 50관쯤 되는 씨암퇘지가 갑자기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죽게 됐습니다. 옛날에 집안에 돼지 한 마리 하면 온 살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천리교에 가서 그 얘기를 하니 선생님이 옥수하고 옥염을 가지고 와서 돼지한테 수훈을 전했습니다. 원래 동물한테는 수훈을 전하면 안 되지만, 그 선생님 마음으로는 이 아픈 돼지가 나아야 이 집안이 신앙을 더 열심히 하겠다 싶으셔서 얼마나 간절히 신님에게 기원했겠습니까. 그렇게 수훈을 받자마자 돼지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죽을 먹는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천리교에 뿅 가게 된 겁니다. 그 앞에는 이미 동생도 다리가 다 나아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데다 이런 일까지 겹쳐서 생기니 안 그랬겠습니까.

아버지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진해교회에 갔다가 초대회장님에게 그 자랑을 했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우리 돼지가 그렇게 수훈을 받고 다 죽다가 나았습니다.”

하고 말이죠. 그 말을 듣고 진해 초대회장님이

“좋다고 웃지 말고, 안 좋다고 울지 마라. 집안에 사람에게 올 큰 액운이 동물에게 와서 인연 마중하라고 보여주고 가려던 것이었다. 그 돼짓값이 얼마인가? 그 돼짓값의 절반을 신님 앞에 액운 값으로 치러서 올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던 아버지가 액운 값으로 돈 내놓으라는 그 말씀에

“아! 이 천리교는 방귀만 뀌어도 돈, 뭐만 어찌해도 돈이라더니만...”

하면서 부족이 잔뜩 나게 됐습니다.

그 길로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씀이

“우리 이제는 천리교 이치를 깨달았으니까. 앞으로 천리 이치대로 살고, 백일 작정을 해서 마치게 되면 무슨 인연이 하나 끊어져도 끊어진다고 하니 그건 아까우니까 거기까지만 하고 다시 천주교 성당으로 가자.”

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천리교에 이래저래 올린 돈이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 그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싶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딱 바뀐 상태로 100일 작정을 채운다는 명목으로 근행을 보러 가긴 했는데, 전처럼 마음이 즐겁지는 않았을 것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근행도 보고 아침이 되어 저도 학교에 가고 막내도 학교에 간다고 갔는데 막내가 다시 돌아오더랍니다. 엄마 생각에는

‘저 아이가 무슨 학용품을 놔두고 가서 가지러 되돌아 왔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동생이

“엄마 다리가 아프다.”

하더랍니다. 엄마는 지금껏 잘 다니고 있던 것이 무슨 다리가 아프다고 하느냐 하면서 꾀병 부리지 말라고 하면서 호통을 쳐서 그냥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렇게 갔다가 다시 펑펑 울면서 다리가 아프다면서 되돌아왔습니다. 엄마가 이상하다 싶어서 한번 걸어보라 하니까, 전에는 별 이상 없이 걸었는데, 걷는 모습을 보니 한쪽 다리를 몸을 돌려 던져서 엉덩이로 다리를 끌면서 걷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은 죄가 있어서 가슴이 철렁해서 당장에 이웃에서 돈을 빌려서 포교소로 쫓아가서 ‘다시는 신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서약서를 신전에 올리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9일 밤근행 작정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동생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있더랍니다. 그 뒤로는 재발 없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지금 그 막냇동생이 56살인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전도청에서 감화를 하러 갔다가 그 동생에게 ‘잘 지내느냐?’고 문자를 넣었더니,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누나도 건강하게 잘 지내라.’라고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 은혜와 신님의 은혜는 잊으면 안 된다.’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포교하면서 수호받은 이야기

 

어린 시절에 어머니 쫓아서 근행도 보고 감화를 들으면서 선생님들이 “다릿병 환자들은 수호를 받고 나면 잘 도망간다.”라고 하시는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신님에게 수호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 왜 도망을 가노?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에도 친구들에게 천리교 이야기를 많이 해줬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한다고 종교를 조사하곤 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천리교를 믿는데도 잘 안 쓰고 했지만, 저는 종교란에 ‘천리교’라고 떳떳이 쓰곤 했습니다. 또 동생이 수호받은 얘기를 자랑삼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손춤도 정확히 알고 싶고, 교리 공부도 해서 말씀을 전할 때 잘 전하고 싶어서 자진해서 강습소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포교 작정을 했습니다. 나름 인연자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리는 상체를 받쳐서 걸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아닙니까. 윗사람을 받들어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목발 없이는 상체를 받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 윗사람을 못 받드는 이치, 불효 인연이 많은 것입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저놈의 자식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방에 들여앉혀서 밥을 갖다 주는 한이 있더라도 제발 좀 애 안 먹이고 엉뚱한 길로 안 갔으면 좋겠다.” 하는 말이 신님 말씀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우친 것이 ‘아, 그래 내가 전생에, 전 전생에 얼마나 다니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부모 속을 썩였으면 신님께서 나에게 이런 다리의 신상을 주셨을까’ 하고 크게 인연자각을 했습니다. ‘그래 맞다. 내가 가야 할 길은 포교의 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우리 집이 신앙을 시작한 지가 10년 될 무렵이었는데 제가 더불어 작정하기를 ‘제가 앞으로 10년을 포교하는데 신자가 한 명도 안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포교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어버이신님께 이렇게 깨우쳐주셔서 감사하고 용솟음치는 마음이 생겨서 강습소에서 얼마나 많이 감사와 참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3개월 강습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한 길을 가르쳐주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포교 나갈 거라고 말씀드리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말도 안 붙이기도 했습니다. 포교를 나가려면 상급에 가서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해서 그 길로 진해교회에 입주했습니다. 입주를 해서 만 2년 동안 히노끼싱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한의원 선생님께서 다리 수술을 하면 좋아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저와 어머니는 귀가 솔깃해서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수에 있는 어디 병원에 가면 좋아져서 온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 수술을 하러 갔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23살 무렵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해서 긴 쪽 다리를 좀 잘라냈습니다. 제가 포교 작정을 할 때, 부산 동삼동 원남성교회에 있는 강습소에 가서 재강습을 하고 포교를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었습니다. 수술하고 와서 회복도 다 안 된 상태에서 포교를 빨리하고 싶어서 부산수강원에 갔습니다. 가서 강습을 3개월 마치고 창원으로 포교를 나갔습니다.

진해 초대회장님께서 걱정을 하면서 포교를 내 보내줬습니다.

그렇게 포교를 시작했는데 포교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점심은 아예 먹을 생각도 않고, 쌀이 있긴 했는데도 쌀밥 먹을 생각도 없이 그 쌀은 다 상급에 올리고 국수를 1인분만큼씩 삶아서 먹고 나가서 점심은 먹지도 않고, 저녁에 들어오면서 즐겁게 포교를 했습니다. 포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용솟음치며 포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용솟음치면서 전도를 한다고 다니는데, 항상 잠이 부족하다 보니 목발을 짚고 졸면서 걷곤 했습니다. 그러다 ‘신님 내일은 좀 쉬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바라면, 다음 날엔 새벽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비를 맞고 전도를 한 바퀴 하고 돌아와서 집에서 도우지를 보면서 몸을 쉴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 어려웠던 점, 의문스러웠던 점이 있으면 도우지를 꺼내서 아무 데나 펴보면 거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우지를 참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포교 중에 생리가 나오는 것도 귀찮아서 ‘신님! 포교 중에는 생리도 좀 안 하게 해주면 안 됩니까?’ 하고 바라면, 그것도 그다음 달부터 나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바라던 대로 단독포교 11개월 동안 생리를 안 했습니다. 그렇게 용솟음치면서 포교를 했습니다.

제가 아무도 안 와도 포교를 즐겁게 하겠다고 작정을 했는데도, 혼자서 근행을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라도 항상 같이 근행을 봤습니다.

한번은 어떤 남자분이 줄곧 같이 근행을 보곤 했는데, 그날은 근행이 다 끝났는데도 안 가고 그냥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근행이 다 끝났으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하기도 했습니다. 진해교회에 갔다가 초대회장님께 그 얘기를 했더니 진해 회장님께서

“아이고 이런 생때같은 처녀를 버리면 안 되겠다. 엄마 집에 가 있어라.”

라고 하셔서 저는 엄마 집에 잠시 가 있었는데, 그사이에 진해 초대회장님이 제가 포교 나간 집에 가서 신님을 싸 들고 와버렸습니다. 저하고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생각에 ‘포교라는 것이 예사 덕이 없이는 힘든 것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 스스로 해결을 해야지 하는 작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진해교회에 입주했습니다. 입주해서 전도도 하고 하던 차에 재차 포교를 나갔습니다.

포교 나갔다 수호받은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여자분을 만났는데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침 그분이 집도 없이 있다고 하기에, 포교소에 데리고 와서 근행을 보고 수훈을 전하고 나니까 몸에 멍이 다 없어지는 수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가 선생님께 은혜를 해야 할 텐데 돈이 없어서 돈을 벌러 가야 되겠다.”

하기에, 제가

“돈 벌지 말고 상급 진해교회에 입주해서 천리교 신앙을 하이소.”

했는데도 말을 안 듣고 자꾸 돈을 벌러 간답니다. 그분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전도를 같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돈이 벌고 싶어서 안달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분이 나가서 안 보였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찾아보니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간질 환자였는데, 우리 포교소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발작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는 발작이 나서 입원을 하고 난리가 났답니다. 제가 찾아가서

“그러지 말고 다시 포교소에 와 계세요.”

해도 자기는 미안해서라도 못 오겠다고 하면서 결국 그렇게 가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