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180년07월]으뜸 하루(1) - 우영옥

2017.07.02 07:18

편집실 조회 수:143

6월 부인회 특별초청 신전강화

 

으뜸 하루

 

우영옥(진해교회·경남포교소장)

 

이 높은 자리에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매끄럽지 못하게 말씀을 드려도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4박)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얼마전 전도청 포교소장연성회에서 으뜸 하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도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에 앞서

한마디의 말씀도 히노끼싱

가르침 만이라도 전하여두자 (신악가 제7장 하나에)

어버이신님의 깊으신 의도를 스스로 안으로 다스려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한 마디의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들려줬으면 합니다. “이 길의 말씀은 듣고 또 들으며, 일러주어도 또 일러주어라.”라는 말은 선인들께서 자주 말씀하신 깨우침입니다. 격식을 차린 자리에서 시간을 들여 가르침을 전할 때도 있지만, 한 마디의 교화라는 가르침의 리도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여 성인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의 인연, 신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집안의 인연에 말씀 드리고 제가 포교를 하게 된 데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집안 신앙의 시작

 

우리 집에는 한 집에 다릿병 환자가 세 명이 날 정도로 인연이 지중했습니다. 이미 출직을 해서 없지만 저의 어머니의 첫 아들이 소아마비에 걸려서 백방으로 병에 대해 수소문을 해도 백약이 무효하여 결국 낫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됐답니다. 그게 4살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언니가 태어났고 오빠 둘이 태어난 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제가 걸음걸이를 막 떼려고 할 때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제가 소아마비에 걸렸을 때, 죽어서 보이지 않게 됐지만 엄마 마음에 또 아이 하나가 다리가 아프니까 사무쳤을 겁니다. 병원, 한약, 침으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여기저기 다녔는지 제가 그 어린 나이였음에도 아직까지 기억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국 다리를 못 쓰게 되어 기어 다니게 됐습니다. 발은 제 신을 신고, 손에는 엄마, 아버지 운동화나 고무신 같은 것을 끼고 기어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기어서 온 동네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아파 누워있을 때 천리교 전도하러 많이 왔다고 합니다. 엄마 마음에 천리교 전도를 하는 것을 보고, ‘참 저급하게 전도를 한다.’ 하고 생각했답니다. 전도를 한다면 천당을 간다든지,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고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천리교 신앙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하니 말이죠. ‘약을 먹고 병원에 가야 병이 낫지.’라고 생각했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 때부터 천주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는 생각에 ‘천주교 같은 큰 종교를 믿지, 무슨 천리교 같은 사이비를 믿느냐.’라고 생각했답니다. 지금도 제가 전도를 다니면 천리교를 사이비종교로 알고 계신 분들이 간혹 있는데 그때는 50년 전이니 지금보다 더 했을 겁니다.

그렇게 천리교 전도하러 오는데 데여서, 천리교 선생이 저 만큼 오는 게 보이면 엄마가 도망을 가기도 하고, 오히려 천리교 선생들에게 “천주교를 다녀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고 역전도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걷지 못하게 됐습니다. 제가 8살이 돼서 초등학교 입학하라고 취학통지서가 날라 왔는데 - 저는 기억도 못하는데 - 제가 학교에 보내달라고 막 떼를 썼답니다. 하지만 혼자 걷지를 못하고, 엄마 아빠가 너무 바빠서 저를 학교에 업어서 데려다주고, 데려올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학교에 보낼 엄두를 못 냈던 겁니다. 제가 자꾸 떼를 쓰니까 집 앞에 목공소에서 목발을 맞췄습니다. 그때는 어른 목발은 간혹 있었어도 애들 쓰는 목발은 없었습니다. 1년 동안 목발 짚는 연습을 열심히 해서 9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병이 나서 자라면서 제 밑으로 여동생,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저의 형제는 3남3녀 육남매입니다. 당시 저는 4학년, 바로 밑에 동생이 2학년 막내 동생이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저희 육남매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1968년 10월경에, 막내 동생이 운동회를 한다고 9월부터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집에서 밥을 하고 있는데 막내 동생이 학교에 갔다 와서

“엄마 나는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1등을 못하고, 달려지지가 않는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에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그냥 열심히 달려봐라.”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러고 며칠 안 지나서 또 동생이

“엄마 이상하게 달리기를 하면 1등도 못하고, 한쪽 다리가 아프다.”

하는 겁니다. 왼쪽다리가 말이죠. 그 말에 엄마는 또

“네가 운동회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한다고 다리가 아픈가보다.”

하고 무시하고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학교에 다녀온 동생이 부엌에 있는 엄마 등에 엎어지면서

“엄마 이상하다, 다리가 아프다.”

하는 말에 저도 목발을 짚고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동생이 그러니까 그때 엄마 마음이 철렁하더랍니다. 이미 한 아이는 죽어서 안 보이지만, 저는 목발을 짚고 다니고 있으니까 엄마 마음에 다리가 아픈 게 며칠이 지나서 이제 나을 때가 됐을 텐데 이상하다 싶어서 바지를 내려서 보니까, 이미 다리에 이상이 생긴 게 보였습니다. 건강한 다리가 엄지손가락 만하면 아픈 다리는 새끼손가락 만하게 가늘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엄마 마음에 하늘이 노래지더랍니다.

그런데 저도 그날이 기억나는데 그날도 엄마와 아빠는 싸움을 했던 터였습니다. 부부싸움 때문에 집안은 항상 전쟁터였습니다. 그날은 엄마가 아빠한테 이혼해달라고 해서 시청에 이혼서류를 접수해놓고 온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동생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혼이고 뭐고 간에 엄마가 아빠에게

“아가(애가) 이리 아프다는데 이거 어떡하면 좋것노?”

하고 말이죠.

그날 바로 진해에서 제일 큰 외과병원에 갔습니다. 바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 오른쪽 다리는 정상인데, 왼쪽 다리는 고관절뼈가 이미 반이 없어져서 형체가 없어져있었습니다. 지금 집에 그 엑스레이 사진이 있어서 증명을 할 수 있지, 이미 다 나아서 몸의 상태로는 증명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의사가 지금 이 정도의 상태면 많이 아플 텐데 이상하다는 겁니다. 동생은 걸을 때는 괜찮고 달릴 때만 아프다고 했습니다.

마산에 뼈 전문 병원에 가서 다시 알아보라고 해서 마산으로 갔더니 그 의사가 의학서적을 보이면서 미국에서 최초로 이런 병이 발병을 했는데, 병명도 없고 원인도 없는 희귀병이라고 하더랍니다. 원인은 모르는데 3년 정도가 지나면 뼈가 녹아서 없어진답니다. 대신 가만히 있으면 천천히 녹아 없어지고, 많이 움직이면 빨리 녹아 없어진답니다. 깁스를 해서 가만히 두면 그 속도를 많이 늦출 수는 있는데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치료법도 없답니다.

그렇게 동생은 한쪽 다리에 허리까지 깁스를 해서 집에 왔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천리교에서 전도를 많이 왔습니다.

저희 외삼촌이 전에 나병으로 천리교에서 수호를 받았었습니다. 외삼촌이 집에 한 번씩 오시면

“너희 집안은 천리교 신앙을 해야 한다. 천리교 신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면서 자신도 천리교 신앙을 해서 나병이 나았다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외삼촌은 총각 때부터 나병이 걸린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로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에 나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고 진해교회에서 천리교를 신앙하면서 나병을 수호 받았습니다. 그 말에 엄마는

“아이고, 오빠는 옛날에 먹었던 약이 효과가 나중에 나타나서 이제 병이 나은 거지 무슨 신앙을 해서 병이 나았느냐.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 그런 말 하지마라.”

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고 동생이 그렇게 되고 나니까 외삼촌이 천리교 선생을 데리고 전도한다고 왔습니다.

당시 엄마와 아빠는 한 집안에 둘씩이나 다리를 절며 살게 되니 세상이 부끄러워져서 살기가 싫더랍니다. 그래서 아빠가 세상도 다 싫고 우리 다 같이 죽자.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외삼촌이 작심을 하고 우리 집에 와서

“너희는 조상에 대한 불효인연이 심하니 영제부터 지내라.”

하면서 엄마한테 돈 내놓으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오빠가 와서 그런 얘기를 하고 하니까 엄마 마음에 천리교 가서 병이 낫는다고는 생각지 않고, 우리 마음이 괴로우니까 그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그러나보다 말이라도 한번 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엄마가 아빠랑 싸운다고 원래 다니던 천주교에 차츰 안 가고는 있었지만, 한번은 가서 신부님을 보고

“신부님, 천리교 신앙을 하면 애 병이 낫는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니까. 신부님이

“그런 데 가서 나을 거 같으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더 잘 낫게 해주지 않겠느냐. 그런 데 가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성당을 더 열심히 다녀봐라.”

라고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외삼촌이 작심을 하고 집에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마침 집에 곗돈 찾아놓은 게 있는 데 이거라도 좋겠느냐니까 그거라도 내놓아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영제 모실 준비를 해놓았으니 와서 영제를 모셔라고 해서 영제를 모신 날이 1968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마침 괴로웠을 엄마 아빠가 그럼 가서 한번 얘기나 들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천리교 진해교회에 갔습니다. 그렇게 위령제를 다 지내고 나서 진해교회 초대회장님께 막내 다리가 그렇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초대회장님이

“엄마는 땅의 이치이고 아빠는 하늘의 이치인데 하늘과 땅이 뇌성벽력을 하면 그 사이에서 자라는 것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다 타고 찌그러지고 엉망이 될 것 아닌가? 부부사이에 그렇게 싸우고 비비니까 아이들이 타서 없어지는 이치 아닌가.”

하면서 아버지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다른 여자를 보고 바람을 피우고 집안에 분탕을 일으키느냐. 아이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의 열다섯 살까지는 부모의 마음 씀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신님의 뜻에 맞게 마음을 바꿔먹고 참회를 하고 실천하면 자연적으로 낫게 되어있다. 천리교 선생이 약을 주고, 비방을 해서 병이 낫는 게 아니고, 천리이치를 알려주고 당신들이 마음을 바꿔먹고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아이의 병이 낫고 안 낫는 것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고집이 워낙 세서 아무리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일체 안 하시는 분입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사주를 보니까 명이 50밖에 안 된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50살 밖에 못 사는데 나 하고 싶은 것 다해 보고 죽을 거다. 이 짧은 인생에 뭐한다고 애착을 가지고 살겠느냐면서 말이죠. 그 덕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50이 되어 천리교 신앙을 시작한 겁니다. 그때 출직하실 운명이었던 것이 신앙 덕택에 87살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출직하셨습니다.

그 때 그런 아버지가 초대회장님의 그 얘기를 듣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다른 여자를 보고 바람을 안 피울 테니 용서해주십시오.”

하면서 꿇어앉아 빌었습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천리교 선생은 우리 집안을 처음 접하시는 분인데, 우리 집안에 대해 어찌 그리 거울 들여다보듯이 속속들이 아는가 싶어서 놀래서 간이 뜨끔뜨끔 하더랍니다. 무당도 아닌 것 같은데 어찌 그리 환하게 알아보시는가 해서 말이죠. 엄마가 그걸 옆에서 보고 있노라니 ‘오늘 이렇게 하고 집에 가면 죽었다.’ 싶더랍니다. 천리교 선생에게 우리 집안 이야기를 다 일러바쳐서 그 얘기를 듣고 천리교 선생이 그 얘기를 하는 것 아닌가고 아버지가 따지면 어쩌나 해서 말이죠. 그런 걱정을 하던 차에 아버지가 그렇게 꿇어앉아 빌었던 겁니다.

그 날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크게 깨달았습니다. 성당에 가도 부부간에 잘 지내라는 이야기까지만 해줬지. 우리가 나쁜 마음을 쓰면 어떻게 된다는 것, 질병이 온다는 것은 안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초대회장님이 그 날부터 아침, 저녁으로 냉수목욕을 하고, 근행을 보러오라고 작정을 시켰습니다. 친정에서 진해교회까지 약 15리 정도 됩니다. 그렇게 크게 깨닫고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근행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1주일 정도 다니다보니 초대회장님이

“여기까지는 좀 머니 이제 막 그 근방으로 포교를 나간 덕산포교소(현재, 덕산교회)가 있으니, 가깝게 그리 근행을 보러 가라.”

라고 하셔서 그곳으로 근행을 보러 다니게 됐습니다. 가서 보니 새로 수리를 해서 잘 차려놨습니다.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잘 차려서 해 놓으려면 돈이 많이 들었겠습니다.”

하고 물으니 덕산포교소장님께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집수리를 하는데 집값보다 수리비가 배로 더 들었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집수리를 한다고 포교소 옆에 재료상에 외상을 많이 져서, 미안해서 그 집 앞으로 못 다니고 다른 데로 빙 돌아서 온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가

“아이고 선생님, 그럼 당장 내일부터는 그 집 앞으로 떳떳이 다니소. 내 그 빚을 다 갚아줄 테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참 지난 후에 제가 다 자라고 나서 포교를 나간 후에 덕산소장님께서 해줘서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교회 살림을 어머니, 아버지가 다 하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신앙을 했습니다. 그 후로 다리가 아팠던 동생은 병원에서 했던 깁스를 집에서 다 잘라버리고 휴학하려고 했던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됐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