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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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05월]만족 - 이상봉

2017.05.11 09:28

편집실 조회 수:59

교조탄생의 달 월차제 신전강화

 

만족

 

이상봉(교회장)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교조탄생의 달 월차제를 올리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참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달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월일의 현신이고, 모본의 어버이이고, 존명한 리로써 지금도 활동해 주시는 천리교 교조님, 나카야마 미키 님이 탄생하신 달입니다.

이틀 전인 4월 18일에는 터전에서 교조님의 219번째 탄생일을 축하하는 교조탄생제를 올렸습니다.

오늘은 교조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는 의미로 한 말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박)

 

행복의 조건

 

전석에도 상급회장님께서 ‘단노는 전생인연을 참회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교조님은 41세에 월일의 현신이 되신 이후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를 몸으로써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월일의 현신이 되신, 1838년 10월 26일부터 은신하시기까지 50년간의 길을 모본의 길이라고 합니다. ‘교조님께서 걸어가신 모본의 길은 천리교 신앙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걷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조님의 모본에서, 처음에는 재산을 베푸시고 가난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재산을 다 없애고 난 후 그 고생을 25년까지 하셨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다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지내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지주의 삶에서 재산을 전부 베풀어버리고 난 후 물질적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물질적인 것이 없어도 사람은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만족하고 있는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 경우라도 지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즐거운 삶이 아니라고 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내 욕심에서 오는 만족을 참다운 만족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 어렵고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가운데서는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상당한 불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에 사는 것을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하니까 불만족스러운 점도 나오겠지만, 반대로 만족스러운 점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의료보험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므로, 아무 때나 병원에 가면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미국의 예를 보면, 전 국민의 30% 정도가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원에 가게 되면 치료비 전액을 자기의 돈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임신을 해서 예정일보다 빨리 아기를 낳게 됐습니다. 그것도 쌍둥이에 제왕절개를 해서 낳았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쌍둥이 둘이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나중에 치료비가 4억 원 정도가 청구됐습니다. 미국에서 이렇게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치료비가 나오는 겁니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은 아기를 낳는 데만도 많은 재산을 팔아야 할 정도의 부담을 지게 되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감기몸살로 병원에 가서 예약하려고 하면, 석 달 후에 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석 달 지나고 나면 감기몸살이 다 낫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상황에도 당일에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의료보험이 굉장히 잘 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도 상위 몇 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잘 돼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더 잘 돼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 나라의 경우는 치료비 상한제가 있어서 치료비가 아무리 많이 나오더라도 불과 몇십만 원의 상한가 이상은 환자에게 부담시키지 않는 체계입니다. 북유럽의 최고 선진국의 경우들이 주로 그렇습니다. 그런 진료비 부담금은 세금에서 충당합니다. 잘사는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세금을 거둬갑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정도의 의료보험을 유지하려면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야 합니다.

또, 우리나라가 좋은 것은 치안입니다. 제가 재작년에 미국 LA에 있는 포교소와 미주전도청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보니까 밤에 절대로 걸어 다니면 안 되는 지역이 있습니다. 밤에 걸어 다닐 수 있는 지역은 도심의 한가운데에 극히 좁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밤에 걸어 다녔다가는 바로 총 든 강도를 만나기에 십상입니다. 특히, 밤에 걸어서 돌아다니는데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 그런 피해를 많이 본다고 합니다. 기독교 교회가 많은데, 교회에 다니는 한국의 아줌마들이 강도를 부지기수로 많이 만난다고 합니다. 여자가 안전하게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아주 잘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이라는 것이 어느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만족이라고 하면 끝이 없게 됩니다. 교조님께서 모본의 길에 보여주신 만족이라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먹는 것을 보면, 우리의 경우는 반찬이 맛이 있다든지, 밥이 잘 됐더라. 나는 진밥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나왔더라. 하는 식으로 자신의 먹는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을 두고 만족에 평가합니다. 내 입맛에 맞는지 아닌지를 만족의 잣대로 정합니다. 하지만 교조님께서 보여주신, 먹는 것에 대한 만족은 어떻습니까? 고깐님이

“내일 먹을 쌀이 떨어졌습니다.”

라고 했을 때, 교조님께서는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께서 고맙게 보살펴주고 있는 증거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살리어지고 있다는 자체,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에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사는 현대의 우리가 만족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만족을 하는 것이다.’라고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옷에 대한 것은 특히 여성분들이 더 까다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이 중에도 옷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은 딸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옷을 사고 싶다고 해서 제가

“그럼, 고성 장날에 가서 옷을 사 입자.”

라고 하면 절대 거기는 안 가려고 합니다. 장에서 파는 옷은 촌스러워서 입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저의 경우는 옷에 대해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든지 거리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남들은 옷을 좀 제대로 입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편입니다. 그런 것도 보면 사람마다 만족의 기준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금에 만족하는 것이 행복의 가장 큰 조건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부족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만족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을 얘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족을 느끼는 것은 갖추어진 것에 더하여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 자꾸 마음을 쫓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남을 도우면 내 몸이 도움받는다

 

특히 이 길에서 말하는 교조님의 신앙은

“절하고 비는 것도 아니고, 물어보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남을 도와주면 내 몸이 도움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2대 진주님께서 써주신 ‘정문유훈’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모든 만 가지를 돕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한 가지뿐이 아니다. 수백 가지 수천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는 돈이나 물질로 도와주는 것도 있다. 또 천리교 용재라면 말씀의 리를 전해서 신상이나 사정에 빠진 사람을 인도해주는 것도 돕는 것이다. 또 그 사람이 어렵고 곤란한 경우를 당하고 있는데 내 시간을 내고 몸을 내서 도와주는 것도 돕는 것이다.

‘돕는다’라고 생각해보면 말 한마디로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로 도울 수도, 화를 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뭇잎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람을 소홀히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 마음과 안 맞는다든지, ‘저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나.’ 라든지, ‘저렇게 모자라는 짓을 하는 사람이 있나.’ 라거나, ‘저건 말해도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더 해주느냐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모자란 사람에게 보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을 느낀다는 것은 모자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고3인데 ‘시험을 잘 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 실력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무리를 하고, 그 학교에 안 되면 실망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실력도 안 되는 대학에 되게 해준다든지 하는 식의 일은 돕는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모자란 사람, 가령 먹을 게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이라든지, 옷이 없어서 추위를 막을 옷조차 모자란 사람 같은 경우를 돕는 경우는 위의 예와 다릅니다. 자기 욕망에서 오는 마음에서 부족을 느끼는 경우는 만족한 사람의 마음이 안되기 때문에 이렇게 절대적으로 모자란 사람을 봐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안 생기는 겁니다. 내 속에서 이미 부족을 느끼고 있으므로 모자란 남에게 보태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모자란 사람에게 보태주는 것이 남을 돕는 것입니다.

전석에서 상급회장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신, 고부간의 갈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자기 마음에 차지 않는 시어머니에게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역전시켜서 보태주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족을 느끼고 모자란 것에 대해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이 매우 많아지게 됩니다. 나의 원하는 것이 그 이상 잘 되기를 바란다면 모자란 것에 대해 보태주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을 도와준다고 하는 것은 신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자란 사람에게 보태줘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신님이 진좌하시는 신전을 짓는 것과 같은 리로써 받아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만족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가야 합니다.

과연 이런 것이 교조님이 걸어가신 모본의 길에서 가르쳐주신 만족인가? 내 마음의 욕심에서 일어나는 만족인가? 부족이 나온 것인가? 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어버이신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일렬형제입니다. 이런 형제들이 서로 도와가는 것만큼 어버이신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없으므로, 마치 선진국에서 돈이 많은 부자가 대부분의 수입을 세금으로 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앞서 이 길의 리를 알고, 가르침을 깨우치고 있는 사람이면 부족을 느끼는 사람을 도와주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끌어서 현명한 짓을 하게 도와주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요즘에는 우리가 쾌락이나 안락함에 젖어 있으므로 나의 불편함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모자람이나 어려움은 잘 돌보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누구 하나라도 부족한 사람을 만족하게 만들어주면 신의 저택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람을 만족하게 해준다는 것은 들숨 날숨의 이치에서도 나올 수 있고, 혀 세 치에서도 만족을 시켜줄 수도 있고, 하는 말 한마디의 말투에서도 만족하게 해줄 수도, 성을 내게 할 수도 있게 됩니다. 모자란 사람에게 보태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정성입니다. 정성의 마음이 있으면 그 리를 모두 받아들여서 그 정성의 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사는 오늘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서로서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시어머니가 어떤 말을 하든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만족의 마음으로 바꾸면 바로 즐거워지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족이 바로 단노입니다. 서로서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교회의 주방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여서 여러 가지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도 모자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마음을 내서 히노끼싱을 하게 되면 신님의 성전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의 부족함, 모자람을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을 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물만 마셔도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교조님과 같은 마음이면 더는 바랄 나위가 없지만, 우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모자람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 것들에 서로서로 돕고자 하는 마음을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박)

 

* 신전강화 동영상은 교회보 홈페이지(www.tenrikyo.kr)와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