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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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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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76

 

어버이가 대신하여

 

박지수

 

요즘 많이 바쁘다. 어쩌면 늘 바빴던 것도 같다. 천리교 용재들은 다 바쁘다. 아니 요즘 세상 사람들은 거의 다 바쁜 것 같다. 모두 ‘빨리, 빨리, 바쁘다, 바쁘다’를 외치며 살아간다.

 

바빠서 힘들고, 바빠서 몸살이 나고 드러눕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몸살이 나는 빈도도 줄었고. 하지만 오히려 일은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수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일을 더 하니 오히려 신님이 더 힘을 보태주시는 것 같다. 아래 일화편처럼!

 

일화편 <152 갑절의 힘을>

1884년경은 경찰의 압박이 매우 심해 터전으로 돌아와도 교조님을 뵙기가 힘들었다. 그럴 즈음, 도사 우노스케는 25, 6명의 신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전갈인이 “아와에서 참배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교조님께서는

“먼 곳에서 잘도 돌아왔구먼.”

라며 위로해 주셨다. 이어서

“도사 씨, 이렇게 먼 곳에서 돌아와도 진실한 신의 힘을 잘 알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데 자신이 없을 것이므로, 오늘은 한 번 신의 힘을 시험해 봐요.”

라며, 곁의 사람에게 수건을 갖고 오게 하여 그 한 쪽 끝을 당신의 엄지와 인지로 집으시고,

“자, 이것을 당겨 봐요.”

하며 내미셨다. 도사는 “예.” 하며 힘껏 당겼으나,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자, 더 힘껏 당겨 봐요. 사양 말고.”

라고 말씀하셨다. 도사는 얼굴이 시뻘겋도록 전신의 힘을 다해 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 당겨도 그 수건은 빠지지 않았다. 도사는 원래 완력이 세고, 게다가 선원생활로 단련된 몸이라 평소 힘자랑이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수건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놀랍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이번에는 오른손을 내미시며,

“다시 한 번 시험해 봐요. 자, 이번에는 이 손목을 잡아 봐요.”

라고 하시므로, 도사는 조심조심 교조님의 손목을 잡았다. 교조님께서는

“자, 더 세게, 더 세게.”

라고 말씀하셨지만, 힘을 주면 줄수록 도사의 손이 아플 뿐이었다. 그래서 도사는 마침내 “정말 놀랍습니다.” 하며 손을 놓고 부복했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이렇게 신은 갑절의 힘을 내는 거야.”

라며 빙긋 웃으셨다.

 

이런 교조님의 일화를 읽으며 짙은 감동을 느낀다. 신앙하면 경찰에 잡혀가던 때, 탄압을 받으며 신앙을 지켜 나가기가 너무나 어려운 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도사선생에게 교조님의 이런 깊은 배려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래서 도사선생은 신님의 힘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되어 흔들림 없는 신앙심, 불굴의 신앙심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나 보다.

우리는 직접 교조님을 눈앞에 뵐 수 없는 존명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서 내가 직접 그렇게 체험을 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도록 일화편을 남겨주셔서 참 감사하다.

 

이런 일화는 교조전일화편에서 세 개가 더 나온다. 인간이 힘을 내면, 신님도 갑절의 힘을 내어 보태주시고, 인간이 힘을 빼면 신님도 힘을 빼신다고도 하시는 내용이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이 길을 신앙하는 우리는 인간이 셋의 마음을 내면 일곱을 보태서 온전한 열을 수호해 주신다고 알고 있다. 신님은 어버이시므로, 자녀인 우리 인간들을 어여삐 여겨서 우리가 조금만 노력해도 갑절로 받아들여서 수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을 듣고 있으면 참으로 든든하다. 자기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세상살이가 고달프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바쁠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즐거운 삶의 세계를 이루는 교조님의 손발이 되고자하는 열망을 가졌으며, 이 길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큰 소망을 품지 않았는가. 그러니 어찌 바쁘지 않을 것인가. 2∼30대 청년이 아니니 남은 시간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테고, 갈 길은 멀고, 모든 것이 부족하니 바쁘고 바쁠 수밖에 없다. 일상적으로 해서는 요원한 일일 테니, 지금 이런 바쁜 것이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돌아보면 세상 보통 사람들도 누구나 다 바쁘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는 다 다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소망,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루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에 바쁘게 움직이며 힘껏 노력하지 않는가.  

 

요즘 올인하고 있는 전도구제 활동인 천리향 운동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차츰차츰 조금씩 전도가 일상이 되게 하고, 일상이 전도가 되어가고 있다. 전도를 무슨 큰 의무로 여겨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밌는 놀이로 변화시키니 전도를 통해 일석이조, 일석3조, 혹은 1석4조가 되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뜻하지도 않게 두세 가지, 네댓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한 번에 하나만 할 수 있던 삶에서 한 번에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효과가 나는 일을 할 때가 있으니 때때로 얼마나 바쁠 것인가. 그리고 그 밀도는 또 얼마나 짙을 것인가.

 

10년간 진행한 ‘3일3야 기원수련회’를 할 때 경험으로 보면, 중간 중간 많은 참가자들이 힘들어하고, 주저앉고 싶어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3일3야에 올 때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 한 가지를 정해서 오라고 하는 데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온 한 가지 기원이 간단한 실천으로 쉽게 수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정말 어려운 것입니까?”

“정말, 많이 어려운 것이어서 3일3야 기원으로 수호받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수호 받으려면 지금 이렇게 사흘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야 수호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적당히 해도 수호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당연히 이런 어려운 실천을 해야 수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온 것입니다. 적당히 해서 수호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어려운 수련 안 오지요.”

하고 대답하면서 스스로 다시 마음을 굳게 다지며 수련에 임하고 이겨낸다.

어렵고 바쁘고 아무리 고단한 것이라도 커다란 희망이 있다면 다 견뎌내게 한다. 즐겁게 이겨낼 수 있게 한다. 희망은 고난을 견디기 쉽게 만들고, 오래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바빠서 몸이 고단하고 힘들 때가 있지만 희망이 있고, 간절함이 있기에 마음은 즐겁다. 몸을 덜 고단하게 하고, 나날이 나아갈 수 있도록 근육의 힘, 마음의 힘을 단련을 시키는 것 같다. 이러다 문득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작은 갈등이 생기거나, 주변의 오해로 인한 뒷담화에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게 되면 쉽게 몸살이 나거나 드러눕게 되는 일이 생긴다. 즐겁게 바쁘게 살다가 뭔가 마음에 걸렸을 때 바로 몸살, 감기, 혹은 피로로 인한 질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니까 관건은 바쁘지 않게 지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바쁜 와중에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단노하는 것이다. 단노하면 무엇을 봐도, 무엇을 들어도 즐거움뿐이고, 아플 일도, 몸살 날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간이다 보니’ 단노가 안 되어 자잘한 질병이나 몸살이 나게 되는 것이다.

 

바쁜 중에 몇 번의 몸살이 나면서 다음 이야기를 읽으며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직접 징험해보고자 나섰다.

 

<교조전일화편 162 어버이가 대신하여>

교조님께서는 평소 밖에 잘 나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가 피로할 리는 없을 터인데도, 이따금

“다리가 뻐근하다.”

든가,

“힘들구나.”

라고 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날은 반드시 이 길의 자녀 누군가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아! 고맙다. 이처럼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는데도 조금도 피로하지가 않다니….”라며 모두들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조님께서 집터에서 자녀들을 위해 피로를 대신해 주신 덕택이었던 것이다. 신한줄기의 이 집터로 돌아오는 자녀가 귀여운 나머지, 교조님께서는 어버이로서 그들을 위해 피로를 대신해 주셨던 것이다.

어느 때, 무라타 이에가 며칠 동안 집터의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매일 고된 일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팔도 허리도 아프지 않을 뿐더러,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처럼 힘든 일을 했는데도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 하겠습니다.”라고 여쭙자, 교조님께서는

“그런가. 나는 매일매일 다리가 뻐근해서 못 견디겠어. 자네가 아플 것이 모두 나한테 온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극화 교조님 이야기> ‘구제근행’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교조님께서는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 힘들다, 피곤하다 말하지만 그것은 어버이신님께서 걷게 해 주신다고 생각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어버이신님께서 걷게 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몇 리를 걸어도 피곤하지 않는 거야, 신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야.”고 말씀하시며 단식 30일째에도 40리 길을 걸어서 구제하러 가셨다. (2권 122~123쪽)

 

한편, 모두가 잘 아는 이런 일화도 있다.

교조님께서는 이부리 요시에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 아침에 남이 깨워서 일어나는 것과 남을 깨우는 것과는 크게 덕, 부덕으로 나누어지는 거야. 남이 모르게 일하는 것과 남을 칭찬하는 것은 정직,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거짓이 되는 거야. ‘좀 더, 좀 더’ 하면서 일한 다음에 더 일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진실인 거야.”

라고 들려주셨다.

 

위 두 편의 말씀은 신기하긴 하지만 납득이 되는 데, 일화편 111에서 ‘일한 다음에 조금 더 일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진실이야.’라고 하신 교조님 말씀에는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신님일을 하면 무리하게 많은 일을 하더라도 피곤하지 않다는 것인가?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몸살이 나는 것은 그럼 신님께 100% 의지하지 못한 탓인가? 무슨 일이든 신님일이라면 무한정으로 신님, 교조님이 대신하여 주시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나는 100%로 의지하는 신앙이 아닌지 때때로 몸살이 나기도 하고, 무리하여 드러눕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의지하지 못하니 신님이 대신하여 주지 않으시는 것인가? 나는 나름 의지한다고 하는데 아니었나? 반성도 해보고, 스스로 자신을 자책하여 기가 죽기도 한다. 특히나 신악가 10장 일곱에 ‘고생을 하는 것도 마음속에서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니라.’라는 구절에 이르면 그 자책은 이루 말할 수 없어진다.

그러다 바쁘지만 몸살 나지 않고 넘어가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이것이 대신해 주시는 것인가, 수호해 주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든 직접 한번 내 몸으로 직접 느껴봐야겠다고 작심했다.

 

며칠 계속 일이 많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서 상급교회 제물인 시금치를 캐는 히노끼싱을 했다. 제물뿐만 아니라 월차제 참배자들 이백 명 남짓의 점심반찬으로도 필요하니 캐야 될 양이 많았다. 혼자 그 많은 양을 캐니까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려고 아프고, 쭈그리고 앉은 다리와 허리가 아팠다. 그때, ‘좋아, 오늘이 그걸 체험해 볼 절호의 찬스야!’ 싶어 계속 ‘어버이신님, 교조님, 즐겁게 하겠습니다. 의지합니다. 피로를 대신해 주세요! 나무천리왕님!!’ 하면서 신악가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히노끼싱했다. 어버이가 대신해 주신다는 신기로움을 스스로 징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집중하니 조금 덜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분도 상당히 좋았다. 다음날 아침에 컨디션이 훨씬 낫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말끔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절반쯤은 대신해 주신 듯도 하다.

새벽근행 때 이런 내 마음과 상황을 말씀을 드리면서 왜 그런지 신님께 여쭈어보니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너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느냐. 이제는 너 스스로 몸을 조절하면 되잖아. 너희들 용재에게 내려준 수훈, 니가 잘하는 몸 추스르는 여러 가지 방법들, 다 내가 가르쳐 놓은 거 아니냐. 나한테 언제까지 ‘신님이 대신해 주세요.’ 하고 투정부릴 거냐?’

깜짝 놀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신님은 내게 아직도 너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어버이가 대신하여 준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간난 아기 때 말이지, 이제 너는 좀 컸으니 스스로 알아서 피로를 풀면 안 되냐? 너는 스스로 몸을 조절하고, 피로를 풀고 몸을 보살필 줄도 알잖니? 무엇보다도 너희들 용재에게 내려준 수훈이라는 보물, 그것이 모두 너를 어여삐 여겨 내가 네게 가르쳐 놓은 것이야. 네가 평소에 즐겨 하는 요가나 경락풀기를 통해서 몸의 고단함을 풀거나 뜸을 뜨거나, 족탕을 하거나 춤명상을 하는 것들도 네가 알아서 피로를 풀라고 지혜를 준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을 모르고 나한테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신님이 대신해 주세요.’ 하고 투정부리고 있을 거냐고 하시는 거구나.

신님께서 기막혀 하시면서 살짝 나무라는 소릴 들으니 할 말이 없다.

“죄송합니다. 신님,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죄할 수밖에...

이런 일을 통해 내린 결론은 ‘절반쯤은 신님께서 대신해 주시지만, 나머지 절반은 미리 알려준 지혜를 이용해서 스스로 풀어라’는 것이었다.

 

바쁘게 지내면서 신님의 말씀대로 절반은 신님께서 갑절의 힘을 보태서 피로를 대신해 주시고,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 추스르면서 조절하고 있다. ‘이렇게 바쁘지만 건강을 수호받고 있으니 고맙고 고마운 신님이시다.’ 하며 나날이 지낸다. 용재로서 바쁜 이유가 자신의 영달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 즐거운 삶으로 이끌려는 포교구제이므로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 일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신도 고맙고, 이길을 알게 되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참으로 복 받은 기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쁜 것조차도 몹시 고마운 일이다. 바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건강을 수호받고 있으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