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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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하나 70

 

천리교 가르침의 뿌리, 으뜸인 리 10

 

이 시 중

 

인간창조의 목적, 즐거운 삶

 

1. 인생에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은 왜 태어났으며, 지금 주어진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절실하고 근원적인 질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질문에 맞닥뜨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이런 의문이 일어날 때면,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고, 잠을 자려니 잠도 오지 않습니다. 술을 진탕 먹으며 고뇌하고, 친구들과 밤새 토론하기도 하고, 수많은 책을 읽어보지만, 의문은 의문대로 남을 뿐이지 결코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뒤늦게야 겨우 눈치를 채는 일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뛰어난 철학자, 위대한 사상가나 선각자가 있었지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바르게 내릴 수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진리를 설파하고 뭐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온전한 답이 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신도 아니고, 생명을 불어넣고, 섭리하는 진실한 신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르게 내리지 못한다면 진정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절대 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안개 속을 더듬듯이 사는 것 같고, 두 눈 감고 길을 걷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교조님께서는 으뜸인 리를 통해서 깔끔하고 완벽하고 군더더기 없이 아주 명확하게 답을 밝혀주셨습니다. ‘즐거운 삶’이라고. 두 마디 세 마디도 아닙니다. 단 한마디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즐거운 삶이라고 밝혀주셨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아주 명쾌합니다. 진리란 본래 단순 명쾌합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생각, 잔꾀가 들어서 복잡하게 만들 뿐이지요.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것이 창조된 이유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ㅣㅣㅣㅣㅣㅣㅣㅣㅐ

이점을 친필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月日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에 14-25

 

인간창조의 목적이 즐거운 삶이라면, 그 이후 인간 창조에 관한 여러 과정과 이야기들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즐거운 삶에 이르게 하는 원리’ 즉 ‘구제하고 구제받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창조의 이야기를 ‘으뜸인 리’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즐거운 삶(陽氣生活, よふきくらし)이란

즐거운 삶은 친필에서 즐거운 놀이(よふきゆさん, 陽氣遊山), 지도말씀에서도 즐거운 놀이(陽氣遊ぶ, よふきあそぶ)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놀이란 단순히 놀고먹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해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사실 일을 하지 않으면 즐거움은 없습니다.

삶이란 모두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상담하거나 공부하는 것도 다 일입니다. 일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조님께서는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셨고, ‘일하지 않는 손은 필요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고역이나 괴로움으로 여기는 것은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모르거나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조님께서 일러주신 일의 의미는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 용솟음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행복을 위해 기원을 하고, 남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남의 괴로움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 모두 일입니다. 일함으로써 남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기 자신도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생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을 한다, 벌어 먹고살기 위해서 마지못해서 일한다, 어쩔 수 없이 일한다, 해야하기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은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 스스로 목에 줄을 매달아 놓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부자유하게 살아가는 꼴입니다. 여기에는 삶의 기쁨도 즐거운 삶도 없습니다.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즐거움이란 나만의 즐거움도 아니요, 너만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나는 즐겁고 너는 괴로운 식이 아니며, 거꾸로 나는 괴로운데 상대만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만 좋다는 식의 순간적인 찰나의 즐거움, 쾌락도 아니며, 일방적이고 편협하고 반쪽짜리 즐거움도 아닙니다. 너도 즐겁고, 나도 즐겁고, 어버이신님도 함께 용솟음쳐주시는 신인화락(神人和樂)의 즐거움, 영원한 즐거움, 온전한 즐거움입니다.

지도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들을 용솟음치게 해야만 참된 즐거움이라 한다. 제 혼자만 즐기고 남을 괴롭혀서는 참된 즐거움이라 할 수 없다. 신이 데리고 가는 즐거움과 각자 멋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멋대로의 즐거움은 지내려 해도 지내지 못한다. 즐거움이란 모두가 용솟음침으로써 참된 즐거움이라 한다. 각자 각자 즐기고, 뒤에 남은 자가 괴로운 식이어서는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없다. (1897. 12. 11)

각자 멋대로 즐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신이 데리고 가는 즐거움, 신이 함께 해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며, 인간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으뜸인 리에서 밝힌 “함께 즐기려고…” 하셨다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어버이신님은 뒷짐 지고 있거나 거리를 두고 먼발치에서 조종하는 신이 아닙니다.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를 존중하고 살리는 바탕 위에서 함께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살아보라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창세기에 나오듯 동물과 자연을 통제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버이신이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고, 경배받고, 우러름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도와 모두가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어버이신님도 함께 덩달아 즐겁게 용솟음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더 나아가 신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차별 없이, 누구나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신인화락(神人和樂)의 즐거운 감로대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이 어버이신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유일무이한 이유입니다.

함께 하지 않는 즐거움이란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나만의 즐거움도 너만의 즐거움도 불완전합니다. 우리만의 즐거움도 어버이신님만의 즐거움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너와 나 우리 그리고 어버이신님도 함께 해주시는 즐거움이야말로 온전한 즐거움입니다. 신과 인간이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서 얻는 즐거움이야말로 인간 창조의 이유이며,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궁극목표입니다.

 

3.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얻는 최고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얻는 최고의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녀들의 즐거움과 행복입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부모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돈, 지위, 권력, 학력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이 방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바람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 도와 사이좋게 지내며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유일무이한 바람이고 희망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도와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바른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어떠한 훈계도 마다치 않으며, 회초리도 들게 되는 것이 부모입니다.

만물의 어버이신 천리왕님도 우리 인간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와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어버이신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어버이신님은 자녀들의 즐거운 삶만을 바라시는 부모 중의 부모, 으뜸인 어버이십니다. 이런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어버이신님이 섭리하시는 수호의 세계, 천연자연의 근본 법칙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4. 창조의 목적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곧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현재 내 앞에 주어진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길입니다. 인생의 참 나침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삶을 방황하지 않고, 허비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안개 속을 더듬으면서 살아가는 꼴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넘어지고 깨지고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자기 앞에 닥친 어떠한 문제도 전혀 풀어갈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 나침반 없이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가도 절망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좌절하고, 삶을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요행을 바라거나 누군가 대신 내 문제를 풀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책임을 떠넘깁니다. 의사나 약사에게, 점쟁이나 역술가에게, 법이나 해결사에게, 아니면 상담사나 종교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즐거운 삶입니다.

누구나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고, 또 즐겁게 살아가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 태초의 약속입니다. 지금 어떤 조건이나 환경 속에 사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즐거운 삶을 누릴 자격이 있고, 또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미국 사람 예외가 없습니다.

천리교 신앙인, 불교 신앙인, 기독교 신앙인, 이슬람 신앙인 예외가 없습니다.

신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무신론자든 예외가 없습니다.

정치지도자, 학자, 농부, 기술자, 강도, 살인자까지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으뜸인 리에는 그 어디에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경쟁, 억압, 소외, 지배하는 논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으뜸인 리에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참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5. 인생이란 놀이고 축제다.

인간의 창조 목적이 이러하다면 인생을 엄숙하게 진지하게 무겁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쾌활하고 밝고 가볍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까불거림이고, 기쁨이고,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입니다. 이런 모습이 근행에 고스란히 녹아있지 않습니까? 근행에는 노래하고, 악기치고, 춤추는 다이내믹한 즐거운 삶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걱정도 없습니다. 쓸쓸함, 침울, 억울함, 비아냥거림이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긴장, 경계, 투쟁, 경쟁도 더더구나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밝고, 언제나 즐겁고, 언제나 용솟음치는 감동의 물결이 넘실거릴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려움 걱정 쓸쓸함 침울 억울함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거나, 긴장 경계 투쟁 경쟁심으로 살아간다면 즐거운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즐거운 삶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어버이신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것은 뭔가 잘못 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는 때때로 고통스럽고, 괴롭고, 어려움이 밀려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아이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디딤돌입니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커가지 않습니까? 자기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떤 계기나 마디가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마음의 그릇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래야 나 혼자만의 즐거움에서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나아가고, 두 사람 세 사람이 추구하는 즐거움에서 열 사람, 백 사람, 만 사람이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6. 모든 생각, 판단, 행동의 기준은?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생각, 모든 판단, 모든 행동의 기준은 즐거운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즐거움은 나만의 즐거움도 아니고, 너만의 즐거움도 아니고, 우리만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만의 즐거움이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도 즐겁고, 너도 즐겁고, 우리나라도 즐겁고, 이웃 나라도 즐겁고, 어버이신님, 교조님도 함께 해주시는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이 우리들의 모든 생각, 모든 판단,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거나 잊고 지낼 때는 우리는 다른 것에서 삶의 기준을 찾게 됩니다. 싫으냐 좋으냐, 이익이냐 손해냐, 인정받느냐 무시당하느냐, 주도권을 잡느냐 놓치느냐, 원하는 것을 얻느냐 잃느냐, 내 주장을 관철하느냐 포기하느냐, 기득권을 유지하느냐 빼앗느냐 따위로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즐거운 삶을 멀게 하고, 온갖 시기 질투 분쟁 싸움 전쟁을 불러들이고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와 함께 하는 즐거운 삶이 내 삶의 기준이 될 때는 싫어도 하고, 손해를 봐도 하고, 무시당해도 하고, 주도권을 잃어도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하고, 자기주장을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으며, 기득권에 연연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자재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아닐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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