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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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03월]교회의 사명 - 배재기

2017.03.07 09:05

편집실 조회 수:93

2월 월차제 신전강화

 

교회의 사명

 

배재기(광일교회장)

 

오늘 2월 월차제에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시고, 또 즐거운 근행을 올릴 수 있게 돼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석에서 상급회장님께서 감화말씀을 40분이나 하셔서 제가 주눅이 많이 들었습니다.

상급회장님 말씀보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잠시 귀 기울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4박)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제 생각보다는 지난 정월 26일, 춘계대제에 진주님께서 천리교가 생길 때 입교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강화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미에 용재의 마음가짐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잠시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몇 가지 준비해왔습니다. 제가 나름 준비는 했지만, 번역 상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다음 달 도우지에 정식으로 실릴 내용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 가셔서 강화말씀을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되새겨 보자는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니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의 역할

 

우리가 신한줄기, 구제한줄기 등 ‘한줄기’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으뜸인 리, 십전수호의 리에 보면 한줄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줄기 마음인 것을 살피신 다음 복어를 불러들이셨다.’라는 식으로도 나옵니다. 천리교에서는 이 ‘한줄기’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한줄기’라는 말은 잘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이 길에서의 ‘신한줄기’, ‘구제한줄기’와 같은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줄기, 세 줄기 하는 것은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한줄기가 중요합니다.

신한줄기라 하면 여러분들이 각자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진주님께서 그에 대해 확실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신한줄기란 어떤 일에도, 어떤 때에도, 언제까지라도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르침의 리를 구하고 연구하여 구도의 정신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어버이신님의 의도는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주신 분인 교조님의 가르침의 방법과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신 50년 모본의 길이다. 어버이신님의 마음에 첫째는, 입교시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계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이다. 그것은 인간을 만들어서 그들이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친필 말씀에도

월일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에 14-25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즐거운 삶의 실현을 향해서 세계구제에 힘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구제한줄기의 도장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 지역의 즐거운 삶의 본보기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한줄기의 도장이기 때문에 신상과 사정을 기원하는 장소이다. 매일 매일 수호에 대한 감사함에 발걸음으로 다가가 보답하는 곳이기도 하다.

공을 들이고 참배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 은혜보답하러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믿는 사람들이 성인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장소이며 수호받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구제를 향한 발판이 되는 거점이 되는 것이다. 또 어버이신님께서 바라시는 즐거운 삶은, 어버이신님을 어버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식인 인간이 서로 형제자매로서 사이좋게 지내는 가족 단란의 세계이다. 이것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이 길의 교회는 교회장을 시작으로 용재, 신자가 한 가족처럼 화목한 분위기를 나타낼 때 그 지역의 즐거운 삶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내 집처럼 드나들며 마음이 가라앉거나 침울해져 있을 때 교회에 가면 기분이 맑아지고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교회에 이어지는 용재, 신자 모두가 가능한 한 교회에 발을 내디뎌서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마음을 이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먼저 가족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신앙을 전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방법을 실천하여 지역사회에 즐거운 삶의 본보기로 보일 수 있도록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주님께서 우리 용재들에게 확고한 마음가짐과 활동 방향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한줄기의 정신으로 창조의 목적인 세계구제와 즐거운 삶을 만들어가는 교조님의 모본의 도구로서의 활동입니다. 우리 용재는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시겠다는 어버이신님의 의도와, 세계를 평탄한 땅으로 밟아 고르시겠다는 교조님의 원대한 포부를 우리가 실현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과, 원대한 뜻에 쓰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꺾이거나 불안이 없이 한줄기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용재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들 용재의 나날의 즐거움에는 각자가 진실과 정성을 기울여서 도와져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 용재의 마음, 태도입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시겠다.’ 교조님께서는 은신하실 때 ‘세계를 평탄한 땅으로 밟아 고르시겠다.’라고 하신 것도 모두 즐겁게 사는 모습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교조님의 마음이십니다. 이런 말씀들이 전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용재는 사업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해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일상의 즐거움을 다른 데서 찾는 것과는 즐거움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쓰여지는 감사함과 히노끼싱에 용솟음치는 용재의 일상이야말로 어버이신님께서 바라시는 즐거운 삶의 세계를 앞당길 수 있는 토대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턱없이 못 미치지만 제가 가야 할 목표는 이러한 활동이라는 신념을 굳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용재로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활동하고 계십니까?

활동하시는 분들은 열심히 활동하시겠죠.

저 같은 경우는 올바른 구제를 제대로 못 하고 있으므로 즐거움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고 시키지는 않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엄청나게 괴롭습니다.

구제를 잘하는 사람은 구제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가는 것이 용재의 마음가짐이고 용재의 즐거움입니다.

또한, 우리들 용재가 주지해야 할 것은 마디를 넘기는 마음입니다.

지도말씀에

괴로운 것이 마디, 마디에서 싹이 튼다. 이거 마디야, 마디야, 낙이야 하고 큰 마음을 가져다오.(1894. 3.5.)

친필에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신한줄기로서 이것은 자신의 일이야 1-50

이 길을 걸어가는 우리 용재들은 이 길이 교조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용재들이 그런 길을 걸어야 본 길을 걷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들입니다.

또,

나날이 용재에게는 손질을 한다

어디가 나쁘다고 전혀 생각 말라 3-131

우리가 용재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가운데 수호가 나지 않을 때는 마음이 떨어지고 우울해질 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나날이 용재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들이 전부 우연이 아니라 자기의 인연에 맞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재가 신님 일을 보고 열심히 나아갈 때 하나하나의 마음가짐이나 발걸음들이 전부 교조님께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경험을 많이 해보셨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는 것들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교조님께서 하고 계신 것이다.’라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교조님께서 활동하신다. 어버이신님의 수호로 내가 살리어지고 있다.’라는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성교회 초대회장님

 

잠시 선배 선생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고성교회 초대회장님의 이야기입니다. 1972년 당시 도우사에서 기자가 인터뷰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972년이면 초대회장님께서 포교하신 지 20년쯤 되는 해였습니다. “회장님, 최고 즐거웠던 적이 언제입니까?”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신자들이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았을 때, 도와진 후에 감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원을 해올 때 언제나 기뻤다. 그것을 낙으로 포교생활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것을 다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에게 수훈을 전하러 갔을 때 “회장님 이제 수훈 받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먹는 약도 다 버렸습니다. 이제 제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렸을 때 고성교회에 와서 이런 초대회장님의 말씀을 한두 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초대회장님께서 이런 얘기를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기원을 드리러 오면 같이 기원을 드리고 신전에서 그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초대회장님께서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최고 괴로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급에 대해 부족이 나와서, 돌아왔을 때가 최고 괴로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성교회 초대회장님이라고 하면 천리교에서는 알아주는 교회장님이셨습니다. 이런 분이 이렇게 가장 기뻤을 때와 가장 괴로울 때의 이야기를 했던 것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대회장님은 1952년에 포교를 시작해서, 1972년 당시 교회 14개소, 포교소 100개소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수호가 났던 것입니다. 그 4년 후인 66세에 출직하셨습니다. 입신해서 포교하고 출직하실 때까지 24년의 세월입니다. 그 24년간 고성교회의 발판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정성입니다. 우리 용재들이 깊이 마음에 새기고 가야겠습니다.

 

사람을 살려내는 정성

 

또, 다른 분은 동봉대교회 초대회장님이신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님입니다. 이 분은 22세에 입신해서 54세에 출직하셨습니다. 불과 32년간 천리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얘기를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대단한 분입니다.

대표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숨이 끊어져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내겠습니까?

또, 둘째 아이를 가졌는데 남을 돕고 수훈을 전하러 다니고, 실천을 하면서 출산을 하면 그 사람을 구제하기 힘들어지니, 어버이신님께 “지금 사람을 돕고 있으니까 출산을 연기해주십시오.” 하고 네 번, 다섯 번 출산 연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11, 12개월 중간쯤에 출산했다고 합니다. “이 기원이 끝나면 출산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원을 했는데 또, 급한 사람이 생기니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 기원해서 출산을 연기하고 했던 것입니다.

또 며느리가 처음 시집왔을 때 며느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인연이 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인연이 중한 것이 고마운 거야.”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왜 요시에 선생이 인연이 중한 것이 좋다고 했는가? “인연이 중한 것이 좋은 거야. 인연이 얕은 사람은 곁눈질하거나, 잡초가 무성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단다. 그러나 나처럼 인연이 중한 사람은 눈 가장자리를 가리고 짐을 끄는 우마와 같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한줄기 길만 생각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열심히 묵묵히 달릴 수밖에 없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연이 중한 편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른단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연이 얕은 것이 인연이 깊은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 특히 한줄기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인연이 중한 편이 모든 것을 걸고 길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걷는 자는 정신이 강해지고 같은 고난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에 떨어져 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라고 교조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인연이 중하다고 자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신앙적 성장이 확실히 빠릅니다. 실제로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님은 인연이 중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초대회장님과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님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초대회장님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중 신상 때문에 천리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셔서 포교하는데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처럼 고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님은 입신하기 전부터 집안이 갑자기 망해서 어려서부터 남의 집살이도 했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이 몸에 밸 정도로 많이 해서 인연이 중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의 전기를 보면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출산을 연기하며 아기를 제때 낳지 않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디서 사람이 죽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는 얘기가 “천리교 믿는 저 사람에게 얘기하면 어떻게 안 되겠느냐? 천리교에 한번 정성을 써보면 어떻겠냐?”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서 “그럼 한번 살려봐라.” 해서 그 사람을 살리려고 기원하기를 “교조님 제가 죽든지 그 사람이 살든지 하겠습니다.” 하고 얼음물에 들어갔답니다. 얼음물에 들어가서 얼마를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얼음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수훈을 전하고 또 들어갔다가 나와서 수훈을 전하기를 여덟 번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안 깨어나서 결국에는 자신의 아이를 안고 얼음물에 들어가서 안 나왔다고 합니다. 얼음물에 들어가서 물과 같이 얼어가고 있고 아이는 처음에는 울다가 아무런 소리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아이도 죽는 지경이 됐던 겁니다. ‘교조님 나는 죽습니다.’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던 차에 물 밖에서 “사람이 살아났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얼음물 속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요시에 선생을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살려냈던 겁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동봉대교회의 교세가 산하 교회가 513개소라고 합니다. 최고 많은 수치입니다. 포교소는 475개소입니다.

 

저는 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만 전하게 되는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용재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도 지금 이렇게 가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죽기 전에라도 그 비슷하게라도 해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나이도 어느 정도 먹어서 잘 안 됩니다. 얼마나 되려나는 몰라도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까가와 요시에 선생님에게 주위에서 “참으로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조금도 고생을 한 적이 없답니다. 고생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교조님께서는 조금도 고생을 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제가 수훈을 전하기만 하면 교조님께서 구제해 주셨으니까요. 그러니까 교조님께서 고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동봉초대의 모든 신앙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순직한 마음을 가지고 이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길의 유명하신 선배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교조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제하니까 교조님께서 기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소속 상급 교회장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을 참고하셔서, 요즘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옛날처럼 되지는 않지만 그런 정신으로 가야 되겠다고 가다듬어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 포교소에 어버이신님의 수호와 교조님께서 보살펴주시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저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4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