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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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72

 

 

거꾸로 가는 세상

 

박지수

 

쉬운 말로 전해주신 이 길의 가르침

최근에 기초교리 강의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이번 강의에 들으러 온 용재의 숫자는 강의실에 준비된 책상의 절반 정도, 스무 명 남짓이었다. 참가자가 좀 적었다. 적은 숫자가 참가하였던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주제에 대한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날의 주제는 ‘서로돕기’였다.

이 길의 훌륭함 중 하나는 아주 쉬운 말로, 우리가 일상으로 많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여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아는 쉬운 말,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널리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길의 가르침을 ‘가나(일본 문자의 이름)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신악가, 친필은 모두 어려운 한자를 피해 일본의 보통 대중이 사용하는 표음문자 ‘가나’로 쓰여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나’라는 말은 ‘쉽다’는 뜻이 있는데, 즉 깊은 교리를 알기 쉽고 쉬운 글자로 깨우쳐 주셨다는 의미이다. 교조님께서는 “어려운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하시려는 어버이마음으로 적으셨는데 “글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세 명만 모이면 읽을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미치노다이 제3호에서 발췌)

 

메타인지능력

심리학에는 아주 흥미로운 메타인지에 대한 이론들이 최근에 많이 나온다. 정말 재밌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이론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메타인지능력’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그 안다, 모른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것과 얼마나 친숙하냐는 것이란다. 얼마나 자주 들었느냐. 보았느냐는 것이 ‘안다, 모른다’고 하는 판단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더라도 자주 보거나, 자주 들은 것, 즉 친숙한 것이라면 그냥 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험을 한 결과인데, 자기 차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남성의 경우, 자기 차가 고장 났을 때 첫 반응으로 내려서 차 앞쪽의 보닛(본네트)을 연다고 한다. 마치 뭔가를 아는 듯이....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이다. 여러 해 타고 다닌 자기 승용차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차의 정비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 자기 차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고장이 나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한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용어나 현상들을 실제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더듬거리며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 길의 가르침은 너무나 평범한 용어들을 끌어와서 설명하기에 그런 메타인지에 속기 십상인 것들이 많다.

이번 강의 제목 ‘서로돕기’도 너무나 평범한 말이다. 누구나 하는 말이고, 누구나 안다고 착각하는 말일 것이다. ‘서로돕기? 아~ 그거!! 많이 들은 거야, 아주 익숙한 말이네. 그러니까, 다 아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워낙 많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들이 메타인지에 속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돕기’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안다고 착각하는 가르침

이런 쉬운 말로 된 가르침을 펼쳐주신 고마운 어버이신님의 의도와 달리 우리들의 메타인지능력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쉬운 말이기에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수박

겉핥기로 그치고 마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수박 겉핥기로는 수박의 참맛은 전혀 짐작도 못 하듯, 이 길의 가르침 역시 깊이 공부하고 깊이 깨닫지 않으면 그 참뜻을 놓치거나, 아주 폭 좁고, 별 볼 일 없는 가르침으로 일소해 버리기에 십상이다.

교조님께서는 쉬운 말을 써서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시면서도 거기에 엄청난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새로운 의미까지도 더해 주셨다. 그래서 이 길의 가르침은 대충 듣거나 읽고 말해서는 가르침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본부가 교조 120년제 3년 천일을 앞두고 내세운 표어 [감사, 겸허, 서로돕기]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쉽게 말하고 듣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 않은가. 전도할 때 쓰는 어깨띠와 깃발에도 늘 ‘감사 겸허 서로돕기’를 내세운다. 어느 날 문득 이 세 가지 단어에 대해서 어버이신님께서 뭐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것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가 설명해보라고 하면 “신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일상생활에서 늘 삼가고 절제하며 살고, 서로도우며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천리교! 라는 의미입니다.” 정도로 말하면서, 이것만이 아닐 건데.... 뭘까? 알고픈 갈증을 느꼈다. 감사에 대해, 삼가(겸허)에 대해, 서로돕기에 대해서 교조님, 어버이신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싶어 기초교리강좌의 강의 주제로 삼아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공부를 해보니 나 역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으면서 잘 안다고 착각해 왔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훌륭한 가르침을 겉핥기로만 알고 있었다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메타인지에 속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주제를 가지고 한 시간씩 세 번에 나누어 강의하게 되었다.

이번 강의 주제를 공부하면서 서로돕기야말로 어버이신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서로돕기를 통해 한마음 한뜻이 되고, 즐거운 삶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은 정반대로 돌아간다. 서로돕기를 빙자한 거래들이 넘친다. 서로 이권을 사이에 두고 담합을 하고, 권력을 사이에 두고 야합을 하고 있다. 사랑을 사이에 두고 결혼이라는 거래를 하고 있다.

 

남녀의 행복도 조사

얼마 전에 발표된 자살확률 연구결과를 보면 여성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보다 미혼일 때 자살확률이 25%가 낮고, 이혼이나 별거, 사별한 뒤에는 34%로 낮아진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는 결혼생활이 혼자 살 때보다 자살확률을 30% 정도 올린다는 것이다.

반대로 남성은 결혼생활과 비교해 볼 때 미혼일 때는 32% 자살확률이 높아지고, 이혼, 별거, 사별로 혼자 살 때 자살확률이 107%로 올라간다고 한다. (2016.11. 대한의학회지 최근호) 그러니까 여자에게 결혼이란 최악의 선택인 셈이고, 남자는 아내 없이 사는 게 지옥이란 의미이다. 아내는 남편한테서 도움을 잘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한테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리라. 결국, 부부인 남녀가 서로돕기가 안 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조사는 최근 직장인들의 행복도 조사연구결과이다. 이 조사에서는 기혼의 직장인보다 미혼의 직장인이 더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작년까지는 근소한 차이로 기혼자가 더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데, 올해는 역전됐다고 한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 혼자 살 때보다도 더 행복하고자 꾸리는 사랑공동체인데, 그것보다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조사결과이다. 이 조사 역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결혼하여 부부간에 서로돕기를 하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누구나 믿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부부가 ‘서로돕기’가 안 되기 때문에 반대의 결과들이 나오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구조사결과를 보면 어버이신님께서 바라시는 즐거운 삶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 같다. 부부 사이에도, 가족 사이에도 서로돕기보다는 내 편안함과 욕심이 앞선다. 서로 도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부부의 의무이거늘, 사회를 이루는 가장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조차 서로돕기가 안 된다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를 내세우는 교육을 받으며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하면, 이런 결과로 치닫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결혼이란 서로 돕지 않으면 유지가 힘든 것임이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거의 경험해 보지 않았던 남과 마음을 맞춰서 행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제아무리 사랑으로 무장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맞추고 돕는 일도 성가시고, 힘들어서 혼자 사는 것이 더 편안한 것이리라. 세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그런 현상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서로돕기 - 세상과 거꾸로 살기
이 길의 가르침을 따라 걷다 보면 현재 세상의 가치와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 알다시피 ‘3장 일곱에 신님을 의지하여 따라가리라’의 손춤 동작처럼 말이다. 이 동작은 한 바퀴 도는 동작인데 보통의 경우는 오른쪽으로 돌지만, 여기서는 왼쪽으로 거꾸로 돈다. 그 모습에서 깨닫듯이, 지금 현재의 무한경쟁시대에 거꾸로 간다. 서로 도와서 다 함께 즐거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분명 현 세태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태초에 어버이신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는 모두가 서로 도와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버이신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마음의 자유를 사용하여 세상을 거꾸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요즘 세상의 모습은 내 것 하나라도 더 챙기고, 더 앞서려고 혈안이 되어 다툰다. 서로 도와 다 함께 즐거운 삶이 아니라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즐거운 삶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께서 자주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교조님한테 너 혼자 열심히 해서 일등으로 달려가면 뭐라고 하시는 줄 아느냐.

‘어찌 너 혼자만 빨리 왔느냐, 돌아가서 뒤처진 사람들의 손을 잡고 다 같이 함께 오라’고 돌려보내신다.”

우리가 포교 시작하던 때부터 듣던 말씀이었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갈수록 새록새록 솟아난다. 이 세상은 나눠야 한다는 것을, 특히나 이 길은 서로 돕고 나누는 길임을 일러주신 말씀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새겨져 삶의 지침으로서 남아 있다.

이 길에서 말하는 서로돕기는 진실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중심에 신인화락(神人和樂) ‘즐거운 삶’이라는 가르침을 둬야만 진정한 서로돕기가 된다. 그리고 그 서로돕기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혹은 만 가지를 서로 도와 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든지 서로 돕는 것이고, 마음 내킬 때 잠시 하는 서로돕기가 아니라, 한결같이 꾸준히 서로 돕는 것이며,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돕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서로돕기라고 일러주시고 계신다.

만약 서로돕기를 신인화락의 즐거운 삶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기 이익, 돈 같은 것을 중심에 두고 서로돕기를 한다면 담합이 되고, 세상을 혼란케 만드는 야합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일, 악한 일이 되며, 엄청난 티끌과 인연을 짓는 일이 된다.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아무거나 서로돕기해서는 모두를 즐거운 삶으로 이끌 수가 없다. 당장은 좋고 우리끼리는 좋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혹은 장기간으로 볼 때는 오히려 더 큰 어려움과 불행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 길의 가르침에 맞는 서로돕기를 할 때 이 세상은 신과 인간 모두가 함께 행복한 신인화락(神人和樂)의 즐거운 삶이 열리게 된다.

 

용재로서 내 삶을 사랑하며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면서 경쟁이 아닌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경쟁에서 벗어나 있기에 스트레스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고 지킬 수 있음이 감사하다. 물론 이 길 속에서도 세태에 휘말려 경쟁을 하게 부추기는 일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일반사회보다는 적고, 또 스스로 그런 스트레스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옆, 뒤도 살피며, 함께 손잡고 가길 꿈꾸며, 나날이 한 걸음씩 내딛는 삶, 하늘과 바다를 보고, 숲과 나무와 꽃을 보면서, 어버이신님의 몸인 이 세상을 기뻐하며 행복을 누리는 삶, 느리게, 천천히 가는 삶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이 길, 눈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보다는 마음성인을 목표로 하는 삶, 어버이신님의 도구, 교조님의 손과 발, 용재로서 내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마음의 중심이 되고 나침반이 되어주는 이 길의 가르침과 함께 해서 진정 행복하고 기쁘다.  

 

서로 돕기라고 입으로 말만 해서는 서로 돕기라 할 수 없겠지.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돕는 것은 단번에 받아들인다(1894.2.4)

차물의 리 깨달으면 서로 돕기의 마음 생겨난다, 생겨난다(1900.3.22)

무거운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도록, 무거운 짐 각자 각자 지고서 서로돕기, 이 리 듣고 흘려버려서는 안돼,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지 않도록, 무거운 짐 각자 각자 지는 것, 이것 신의 소망이다.(1900.10.26)

 

이제부터는 월일 부탁이야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바꿔 넣어 다오 12-91

이 마음 어떤 것으로 바꾸는가 하면 세계를 구제할 한결같은 마음으로 12-92

앞으로 온 세상이 한결같이 만 가지를 서로 도와간다면 12-93

월일도 그 마음을 받아들여서 어떤 구제도 할 것이라 생각하라 12-94

이 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만가지를 서로 도와갈 뿐이다 13-37

온 세상이 서로 도와나가면 월일도 그 마음을 모두 받아들인다 13-38

월일이 마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든 섭리하리라 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