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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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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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대제 신전강화

 

이것이 천리야

 

이상봉(교회장)

 

여러분 오늘 고성교회 추계대제에 참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즐겁게 근행도 올리고 상급회장님께서 좋은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잠시 한 말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이것이 천리야

 

추계대제는 179년 전 천리교가 시작된 날을 기념해서 올리는 근행입니다. 교조님이 어버이신님의 계시를 받고 살아가신 생애를 길을 걸어간다.’라고 표현하고 그 길을 배워왔습니다. 천리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교조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크건 작건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조님 재세시에는 이렇게 길을 걸어간다.’라고 표현했고, ‘천리교라는 말은 나중에 나온 것입니다.

천리교가 정부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 명칭이 필요했는데 당시 정부에서 종교의 명칭을 물어봤을 때까지 종교라는 생각이 없이 교조님을 따라온 것이었기 때문에 따로 회의해서 정한 결과 여기는 하늘의 리를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에 천리교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하늘의 리를 가르치는 곳이다.’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법칙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름달이 뜨면 달이 제일 크게 보이지만, 그믐이 되면 달이 작게 보이듯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런 걸 놓고 보면 사람도 차고 기우는 것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항상 차 있는 상태로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이 사람의 몸이나 마음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마음을 쓰고 몸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천리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동물을 의인화해서 많은 이야기를 지어낸 이솝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이솝우화 중에 어떤 사람이 두꺼운 외투를 입고 길을 가고 있었는데, 해와 바람이 그것을 보고 내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먼저 센 바람을 부니까 그 사람이 추워서 외투를 더 여미게 되어서 벗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는 따가운 햇볕을 계속 보내니까 그 사람이 더워서 옷을 스스로 벗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데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우리의 몸이나 주변 상황에 나타나는 것이 천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조님께서도 직접 천리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긴 합니다. 교조전일화편 75, ‘이것이 천리야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1879년 가을, 오사카 혼덴(本田)에 사는 나카가와 분키치(中川文吉)는 갑자기 눈병에 걸려 실명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이즈쓰 우메지로가 즉시 구제하러 가서 33야의 기원으로 선명한 수호를 받았다. 이듬해인 1880년의 어느 날, 나카가와 분키치는 사례참배를 하러 집터에 돌아왔다.

교조님께서는 나카가와를 만나 보시고,

본고장을 찾아 잘 돌아왔구나. 나와 팔을 잡고 한 번 힘겨루기를 해 볼까?”

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힘자랑을 하며 동네 씨름도 해 왔던 나카가와는 그 말씀에 순간 쓴웃음을 금치 못했으나, 거절할 수도 없어서 늠름한 양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가만히 나카가와의 왼쪽 손목을 잡으시고, 나카가와에게는 오른손으로 당신의 왼쪽 손목을 힘껏 잡아 죄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카가와는 말씀대로 힘껏 교조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반대로 자기 왼쪽 손목이 부러질 것같이 아팠으므로, 엉겁결에 ! 그만하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때 교조님께서는

조금도 놀랄 것은 없어. 자녀 쪽에서 힘을 주면 어버이도 힘을 주게 되는 거야. 이것이 천리야. 알겠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항상 어버이신님의 수호에 대해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자녀가 힘을 내면 어버이는 갑절의 힘을 내주는 것이 천리야. 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교조님께서 직접 천리라는 말을 해주신 부분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 새에게 나는 것을 보여주지 날개를 이렇게 저어라. 저렇게 저으라고 하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모습만 보여주면 새끼 새가 그것을 보고 따라서 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연입니다.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하는 것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도말씀에도

이 길은 마치 분재를 하는 것과 같은 거야. 빨리 멋진 것을 만들고자 서둘러서 하면 오히려 말라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보다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서 가지를 펴고 낙엽이나 벌레를 잡아가면서 느긋하게 연한을 들여 할 때 자연히 형체도 갖추어지고 훌륭한 것이 되어 가는 거야. 이 길도 마찬가지야. 나날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걸어간다면 자연이 크게 되는 거야. 천연자연의 리에 따르면 아무런 걱정도 필요 없어.

그래서 천연자연의 리라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마음을 쓰고 어떻게 주변에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잘 관찰해보면 여러 가지가 보이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이것이 내가 인위적으로, 무리한 욕심으로 천연 자연적이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결국, 천리라는 법칙은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생각, 가치관, 행동, 습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바라봐온 세상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교조님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벗어나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자기의 좋지 않은 버릇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항상 유순한 마음을 갖게, 남을 돕게, 나쁜 성품을 없애게 하는 세 가지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런 마음으로 바꾸려고 해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신님의 힘을 빌려서 이런 성품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가르쳐주신 것이 근행입니다. 근행을 통해서 바꾸기 힘든 자신을 바꿔서 좋은 성품을 갖게 하려고 신님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근행에는 깊은 의미가 많이 있습니다. 근행을 소중하게 올려서 우리의 마음과 신님의 수호의 이음새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매일매일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위험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행을 잘 올리게 되면 신님이 지켜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근행을 보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조님께서 숫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해 주셨다. 1부터 31까지 그 날짜에 부합하는 숫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안 좋은 날이 하나도 없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길일이니 흉일이니 따지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1365일 안 좋은 날이 없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중에서 보면 10이라는 숫자에 대해 충분하다. 꽉 찼다.’라고 하셨습니다. 21충분하고 충분하고 꽉 차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근행 1절을 21번 올리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껍질을 벗기는 것, 자신을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충분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도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충분히 정성을 들이고 어버이신님도 바꿔주시는 수호를 충분히 주시면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라는 의미입니다.

혼자 힘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기 위해 그 가운데 있는 것이 근행입니다. 근행을 통해서 어버이신님이 새로운 것이 시작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병아리가 달걀에서 나올 때 자신의 부리로 안에서 달걀의 껍데기를 깨지만 밖에서도 어미 닭이 같이 껍질을 쪼아줍니다. 병아리 혼자의 힘만으로는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근행을 올리기도 하고 신님의 일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아침마다 신찬을 올리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신찬을 바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도 같이 바치고 있습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을 바치는데 어떤 마음을 바치는가? 예를 들어

일손이 필요한데 히노끼싱 좀 하러 가 주세요.”라고 했을 때

가고는 싶은데 농사일이 바빠서 못 갑니다.” ,

어디에 수훈 전하러 좀 가 주세요.” 했을 때,

다른 일이 있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가고는 싶은데 못 간다.’ ‘하고 싶은데 못 한다.’ 이렇게 해서 그런데, 그런데하는 것은 그런데를 바치는 셈입니다. ‘그런데를 신님께 바치면 그다음에는 자신이 신상이나 사정으로 부탁하면 도와주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신님께 부탁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신상이나 사정이 있어서 신님께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원했을 때, 신님 쪽에서 도와주고 싶은데...’ 하는 대답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를 올렸는데 그것이 돔이 되어 내려오지는 않지 않습니까? 당근을 올리면 당근이, 사과를 올리면 사과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나날이 바친 마음이, 나날의 마음 나름의 리가 나타나는 것이 천리입니다. 그걸 깨닫지 못해서는 천리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님은

아픈 날에 아프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려움이 있는 날에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날이 다달이 해마다 써온 마음의 리가 시순이 와서 나타나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흘려듣거나 못 본척하지 말고 그런데... 그런데...’ 하는 신앙을 버리고 순직하게 어버이의 말에 따라 시순의 리를 따라서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신님이 안 계시다고 느껴질 때는 힘을 쏟아서 신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신님이 다른 데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근행을 올리고 히노끼싱을 하고 전도를 하는 것들이 신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마음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신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마음속에 신님이 들어와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날이 나르는 것이 낙이야

 

야마나카 주시치라는 유명한 교조님의 제자분이 있으셨습니다. 이 분은 초창기부터 입신해서 신앙을 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집안이 굉장한 부자였다고 합니다만 결핵성 치질로 고생하던 부인이 교조님께 도움을 받고 나서 매일 집터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당시의 사례였습니다. 허리춤에 도시락을 차고 다녔다고 하는데 당시의 교조님 생활은 너무 소박해서 교조님의 앞에 자기 도시락을 꺼내기가 미안해서 도시락 뚜껑을 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도시락은 교조님의 그것에 비해서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도시락 대신에 빨간 보자기에 한 되의 백미를 넣어서 그것을 집터로 나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나르기의 시초입니다.

그래서 주시치 선생이 집터로 올 때마다 교조님 막내딸 고칸이 멀리 까지 마중 나가서 기다렸다가 선생이 오면

오늘은 안 굶겠구나.”

라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주시치 선생이 자기 집에서 딸 고이소에게 이야기하자 딸이 그렇게 좋아한다면 차라리 한꺼번에 다섯 말 정도 집터에 나르는 게 어떻겠냐고 아버지에게 말해서 그 말대로 교조님께 여쭈니

매일매일 이렇게 나르는 것이 낙이야.”

하셨습니다. 얼마가 되든 매일매일 나르는 것이 낙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다음 날부터 허리에 항상 한 되의 쌀을 차고 집터로 날랐다고 합니다.

우리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교회에 나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매일매일 나르는 것이 교조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이 되고 그렇게 매일 하는 것이 우리의 좋지 않은 성품을 닦아나가는 길이 됩니다. 어쩌다 갑자기 하는 것보다는 매일 나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보늬나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서 마음속의 좋은 맛을 내는 것만큼 감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마음을 두는 것이라서 때로는 무신론자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생각하고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디 의지할 데가 없어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데를 신앙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요즘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만 이야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는 눈에 안 보인다고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인간이란 곧잘 보이는 물체나 형태에 집착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이라든가 신뢰, 애정이나 남의 은혜, 배려하는 마음이나 서로 돕는 마음이 받쳐주는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풀이나 나무가 보이지 않는 뿌리가 지탱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믿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님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혼에 덕을 쌓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바꿔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운명을 바꿔가는 길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신님의 의도에 맞게 성인한다는 것은 교회에 와서 신님께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일을 빌기보다는 교조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남을 위해 기원해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빌어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 신님의 입장에서 많이 성인했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는 것입니다. 내 몸, 내 자녀, 내 집안을 떠나서 남을 위해 기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기원하는 마음에 의해서 자신이 도움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서 남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의 성인이 필요합니다. 연제의 해인 올 한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남은 기간 신님의 일에 정성을 쏟아 나르기 다하기에 힘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조전일화편에 나온 자녀 쪽에서 힘을 주면 어버이도 힘을 주게 되는 거야. 이것이 천리야.”라는 교조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