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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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4

 

추운 겨울 2월 월차제를 올리면서

 

 

박 지 수

 

우리 월차제날(213) 새벽에 신전에 나오니 신전온도계는 -1.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올 들어 영도 이하로 떨어진 날은 없었는데 정말 추운 날이구나 싶었다.

이런 저런 준비가 끝나고 시간이 다 되어 갈 때 가스히터의 가스가 똑 떨어져 버렸다.

 ‘꼭 이런 날 가스가 떨어진다 말이야!’ 속으로 조금은 투덜대며 미안한 마음으로 신자분 눈치를 살핀다.

바로 가스집에 연락하니 여긴 면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바닷가 시골이라 몇 시가 될지 모르는 오후에나 올 거란다. 어떻게 빨리 오실 수는 없는지 애원조로 물어봤으나

 코스를 따라 마을을 돌기 때문에 거기 먼저 가면 하루 일이 안됩니다!”고 거절당하였다.

 하필 월차제에, 이렇게나 추운 날에 가스가 떨어지다니…….

참으로 신자분께 미안하고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전기히터나마 있으니 다행이지스스로 위로하고 할로겐 전기히터를 2대 갖다놓고 양말위에 버선 두 컬레를 겹쳐 신고 옷도 두툼하게 입고 중무장을 한 뒤 월차제를 봉상하게 되었다. 중무장을 하면서 교조님이 은신하시던 정월 26일이 떠올랐다.

 

교조전(235p)에 보면

········(전략) 그리하여 신노스케는 근행을 올릴 때, 설사 경찰의 어떠한 제지가 있더라도,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근행에 나오라고 일렀다. 일동은 굳은 결의 아래, 속옷을 껴입고, 버선을 겹쳐 신는 등 연행에 대비한 다음, 오후 1시경부터 악기까지 갖추어서 당당히 근행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략··· 근행은 감로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행해졌다. 그날 근행시각에는 참배자가 굉장히 많아 그 수가 수천명에 달했기 때문에,····후략. ····

그 때가 양력으로 218일 이었으니 지금이랑 비슷했겠다.

 이렇게 아직도 추운 겨울에 버선을 겹쳐 신고 속옷을 두 겹 껴입고 언제 연행될지 모르는 감옥행에

 대비했다고 했지. 그 때 선배선생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교조님께서 노고 하신 마지막 옥고도 생각이 났다.

그 해 겨울은 30년 만에 닥친 큰 추위였다고 교조전에 나와 있었지.

이런 저런 일들을 떠올리며 선배선생님과 교조님을 생각하면서 좌근을 올리는 데

 1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이 아프게 시렸다.

 좌근이 끝나고 손을 비비며 전반 근행을 올리는 데 팔수가 끝나자 손이 굳기 시작하면서 발이 시리기 시작했다.

 미안하고 안스러운 마음으로 옆의 신자분을 살피며 12장이 끝났다.

바깥에는 겨울바람이 할퀴듯 세차게 부는 소리가 들렸지만 겉보기에는 모두 담담했다.

 부채춤을 추는 34장에 이르니 손 시리고 발 시린 것이 극에 달하는 듯 하였다.

부채를 쥐려면 손가락 하나하나를 벌려야 하니 손이 얼음으로 변하는 듯 합장하는 손에 냉기만 흐른다.

 생각은 계속 정월 26일로 달려갔다.

 ‘그 때도 겨울인데 바깥인 감로대를 에워싸고 올리는 근행이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게다가 연행될 것을 각오하고 올리는 근행이니 얼마나 비감하고 또 조마조마하게 가슴 졸이며 불안했을까?

그래도 나는 그 때 비하면 훨씬 낫지.

 연행될 위험도 없고 그 때보다는 옷도 훨씬 따뜻하고 게다가 전기히터까지 있잖아.’ 하는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교조전일화편에서 본 이즈미따 도오끼찌 선생의 일도 떠올랐다.

······전략······ 마음이 쓰러지려 하면 도오끼찌는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냉수욕을 했다.

 엄동의 한밤중에 요도가와강에 나가 약 2시간 동안이나 물에 잠겼다가 둑에 올라가 몸을 말렸는데,

수건으로 닦아서는 효능이 없다면서 몸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물에 잠겨 있을 동안은 그다지 추운 줄을 몰랐으나 물에서 나와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몸을 말릴 때는

살을 에는 듯 아팠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서 30일 동안이나 이것을 계속했다.

, 무엇이든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덴진바시 다리의 교각에 매달려 밤새도록 강물에 잠겼다가 구제하러 다녔다.·

····후략 (일화편 64. 부드럽게 펴면)

도오끼찌 선생이 북풍에 몸을 말릴 때는 얼마나 추었을까? 이런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이 정도 추위에 벌벌 떨고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야.’싶었다.

그리고 연이어 선배선생님들이 이길의 초창기때 북해도에 이주를 가서 받은 정착금을

정성금으로 올리고 그 추운 북해도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읽었던 일도 생각났다.

그래... 그 분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요즘은 그래도 그 때보다는 춥지도 않고 여기는 그 지역보다는 훨씬 따스하고,

옷도 좋으니까 내가 아무리 춥다고 해도 그건 엄살에 불과할 거야!’

혼자 위로하고 마음으로 깨닫다 보니 마음이 밝아지면서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가 모여

우물이 되듯이 즐거움도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4장이 끝나고 5장이 시작되는 데 합장한 손에서

갑자기 훈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그토록 얼어붙을 듯한 냉기만 나오던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니 이게 무슨 일인지,

내 손이 어떻게 된 건지 싶어 손을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문득 마스이 링 선생의 일화가 떠올랐다.

·····전략····· 정월 10, 그 날은 아침부터 큰 눈이 내렸는 데,

링은 가와찌에서 집터로 돌아오려고 야마또 가도까지 왔을 때

눈을 점점 더 내려 쌓이고 나중에는 바람마저 휘몰아쳤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마침내 누까다베 마을의 높은 다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다리는 그 당시 폭이 석자 쯤 되는 난간없는 다리였으므로

링은 위험해서 눈이 쌓여있는 다리 위를 맨발로 기어갔다.

······중략······

교조님은 잘 돌아왔구나. 어버이신님이 손을 잡고 데려오신 거야.

이리 미끄러지고 저리 미끄러지면서 고생이 많았겠지. 그런 가운데서도 기뻐했구나.

자아, 자아 어버이신님이 충분히 받아들이신다. 어떤 일도 모두 받아들여 수호하시는 거야,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몹시 차가운 링의 손을 당신의 양손으로 꼭 쥐어 주셨다.

그것은 마치 화롯불 위에 손을 쬔다고 할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함을 느끼는 동시에

황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링의 가슴은 뿌듯했다.

(일화편 44 눈 오는 날)

정월 10일이면 이 맘 때쯤이겠구나 싶으면서 눈이 많이 내리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 75리를 걸어서

집터로 돌아가시는 마스이 링 선생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하고, 교조님이 손을 내밀어서 링선생의 손을

 감싸주시는 모습이 영화스크린처럼 떠오른다.

그래. 지금 내 손에 흐르는 이 온기는 그 때 마스이 링선생의 손을 감싸 주시던 화롯불같은 교조님의 손길 일거야.’ 마스이 링 선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기뻐하며 월차제를 봉상하고 있는 중이었고,

우리 정성을 받아들여서 어버이신님께서 온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인자로운 어버이의 손길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과 마음이 드니 흔감하고 즐거웠다. 그 뒤로는 그다지 손이 시렵지도 춥지도 않았다.

어버이신님 · 교조님께서 따뜻한 양손으로 나를 감싸고 계시니까!!

아직도 추운 계절 2월 월차제를 봉상하면서 뜻하지 않게

정월 26일의 선배선생님들과 훌륭하신 선인들께서 노고하신 많은 장면들을 떠올리며

어버이신님 · 교조님의 따스하신 손길을 느낄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하여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즐겁고 기쁜 마음이 사라지지가 않고, 여전히 가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