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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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65

 

한 끗 차이

 

박지수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 지옥과 천국은 한 끗 차이!

얼마 전 어떤 분의 상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위에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생각, 마음하나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는구나, 과연 행, 불행이 내 마음자리, 한 끗 차이밖에 나지 않는구나!’ 하고 마음에 팍 꽂혔다.

 

상담 내용은 이랬다.

어느 아가씨가 결혼을 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재혼을 하셨는데 어머니 자리에 친어머니가 앉느냐, 새어머니가 앉느냐 하는 문제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친어머니가 앉겠지만 이 집은 좀 경우가 다르다고 한다. 친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딸이니 당연히 자신이 어머니로서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새어머니는 내 자식도 낳지 않고, 이 딸한테 온갖 애정과 정성을 쏟아 길렀으니 내가 어머니로서 그 자리에 앉고 싶다는 것이다. 두 쪽에서 팽팽히 맞서니 아가씨는 고민하다가 어떻게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지혜를 얻고자 상담을 해 온 것이다.

 

듣고 보니 난감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 이 아가씨가 참 복이 많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정말로 골치 아프다. 친어머니를 맞추자니 새어머니가 서운해 하시고, 새어머니를 맞추자니 친어머니가 화를 낸다. 우리 부모님은 괜히 이혼하셔서 이런 골치를 만드시고, 힘들게 한다.”고 언뜻 지나치는 말로 불평을 했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간 후 결론은 이 아가씨가 결혼식을 두 번 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번은 결혼식장에서 일반적인 모습으로 친어머니를 모시고 하고, 또 한 번은 천주교신자인 새어머니에 맞춰서 성당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치르기로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분 어머니를 만족시켜 드리면서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상담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고, 이길의 가르침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다.

주변에서 듣고 보는 보통의 경우는 새어머니가 친어머니보다 잘 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집안사람들은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새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고, 전처의 자식을 정성을 다해 키웠다는 게 참으로 드문 경우가 아닌가. 그렇게 엄마의 빈자리를 새어머니가 채워주고, 큰 사랑으로 보살폈으니 아무런 불편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부모의 이혼은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 상처를 감싸며 애정을 기울인 새어머니가 계시니 복 많은 아가씨임에 틀림없다. 결혼식장에서 어머니 자리에 두 사람이 서로 자기가 앉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자랄 때도 어머니가 두 사람이라서 더 많은 애정과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았던 것이리라. 그것은 분명히 행복하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좋았고 행복했던 마음이 결혼식에서 두 어머니의 자리다툼으로 이어지자 힘들어졌다. 그래서 불평불만의 마음이 생기게 되고 나는 불행하다는 쪽으로 변해 버렸다. ‘부모님이 이혼해서 엄마가 둘이 되니 골치 아프고 너무 힘들다.’ 오히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생기지 않았을까. 심정적으로야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그건 좀 지나친 생각, 순간적인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이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삶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나 반면에 두 분의 어머니가 계셔서 이제껏 양쪽에서 사랑을 듬뿍 받아왔으니 참 고맙고, 정말 행복하구나.’ 할 수도 있다. 그러면 행복한 감정을 유지하면서 두 분 어머니께 감사드리고 만족시켜드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가 있게 된다.

생각 한 끗 차이로 긍정 혹은 부정적인 태도로 나뉘고, 밝은 마음 혹은 어두운 마음으로 바뀌고, 행복 혹은 불행으로 나눠지는 것이다.

 

상담하는 이 아가씨는 혹시 두 번 결혼해야 할 운명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마음하나 돌이켜 두 분 어머니를 만족시키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운명을, 형식상 두 번의 결혼식으로 액땜을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전 제7 가르치고 있는

<사람의 행복은 그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의 고락은 그 외양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말씀 역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났고, ‘참으로 맞는 말씀이야, 정말 그렇구나!’ 싶었다. 마음하나에서 행복도 불행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괴롭고 힘든 상황에 부닥치면 마음 하나 쉽게 돌이키지 못해 힘들어할 때가 많다. 마음 하나 제대로 바꾸면 모든 것이 감사요, 축복으로 느껴지지만 마음 하나 잘못하여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행복 혹은 불행으로 만드는 마음 하나가 바로 한 끗 차이. 그래서 천리교 신앙은 마음의 티끌을 털고, 마음을 바꾸어 새 운명을 여는 종교라고 늘 외치고 다닌다.

언젠가 시장에서 그 노방강연 소리를 들은 상인이 마음만 바꾸면 지금 내게 돈이 생기나? 돈이 있어야 행복하지!”하며 딴지를 걸었던 일이 있다.

잠시 노방강연을 멈추고 그 분에게 따뜻한 눈빛으로 다가서며 말을 건넨다.

사장님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는 군요? 그렇지요. 행복해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행복은 아니랍니다. 가족들이 건강하지 못하면 돈이 무슨 소용 있어요? 이내 불행해지는데. 또 돈이 많아서 싸우는 재벌 2세들 많이 보시잖아요? 그건 돈이 불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마음 하나에 행복이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행복이라면 가장 먼저 마음이 편안한 것이 첫째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가족이 건강한 것이 행복이구요. 이렇게 장사를 하고 계시는데 마음이 편안하면 사장님 얼굴에 웃음이 돌고, 그러면 손님이 한 사람이라도 더 오지 않겠어요? 찡그리고 짜증내고 있는데 어느 손님이 들어오고 싶겠어요? 도망가고 싶죠... 마음이 편안해서 사장님한테서 기분 좋은 기운이 나오면 손님은 저절로 그 기운에 끌려오게 되고, 화내고, 짜증내면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니, 어찌 마음하나에 행복도 불행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손님이 오면 올수록 돈은 벌리는 것이구요.” 차근차근 말하니 어느새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마음의 방향만 바뀌면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게 느껴지고,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조님은 모든 상황을 감사로 바꾸는 긍정의 달인이셨던 것 같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세상에는 머리맡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이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고 격려하셨다.

몇 번이고 감옥에 들어가게 될 때도 마디에서 싹이 난다. 크게 된다.”고 하시며 측근들을 위로하시고 본인은 기쁘게 경관을 따라 나셨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 딸을 잃은 우메타니 시로베에게 그것은 고마운 일이구나, 큰애가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하셨던 교조님이시다!

야마나카 추시치 선생의 논밭이 홍수에 떠내려갔을 때도 자아 자아, 좋아, 좋아. 바다 밑바닥까지 떠내려갔으니 장차는 좋을 거야. 신앙을 하고 있는데 왜 전답도 산도 떠내려가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단노하라, 단노하라. 장차는 두고두고 좋을 거야.”하셨다.

모로이 구니사브로선생의 넷째딸을 세 살에 잃었을 때도

자아 자아, 어린아이, 세 살도 한평생, 평생 세 살 아이와 같은 마음.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여라.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면 사방으로 뿌리가 뻗는다. 사방에 뿌리가 뻗으면 한 쪽이 떠내려가도 세 쪽이 남는다. 두 쪽이 떠내려가도 두 쪽이 남는다. 굵은 싹이 트는 거야.” 그렇게 깨우쳐 주셨다.

이길에서 흔히 마디에서 싹이 튼다’, ‘신상과 사정은 이치의 꽃이라 한다. 흔히 불행의 탈을 쓴 행복이라고도 표현한다. 그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불행으로 보여지는 신상, 사정이라도 결국은 신님께서 행복으로 이끄시는 손질이며, 크나큰 어버이마음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을 알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마음 한 끗에 달려있지 않는가.

 

이길의 신앙은 이런 교조님을 닮아서 점점 긍정의 달인, 단노의 달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어버이신님이 바라시는 마음성인의 길도 바로 이 마음 한 끗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