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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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63

 

 

어버이신님이냐? 남편이냐?

 

박지수

 

인간은 서로 돕고, 서로 맞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신의 뜻에 맞는 것이란 사실을 이 길의 용재, 신자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래서 어쨌거나 상대를 맞추려고 무진 애를 쓰며 실천하려고 노력을 한다. 특히나 주변에서 만나는 여성 용재인 경우에는 남편, 시부모, 며느리나 아들, 딸을 맞춘다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만난 어느 용재는 남편을 맞춰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노력하는 데, 헷갈릴 때가 많다고 고백했다. 남편을 맞추자니 신님 일을 못하겠고, 신님 일을 하자니 남편이 싫어하여 가정의 분란이 일어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 한다.

의논의 바탕이 되는 신의 뜻

 

흔히 우리는 서로 맞춘다는 뜻을 오해하거나 서로 마음 맞춰 의논, 의논.... 하며 모든 것을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논할 내용이 있고, 의논할 내용이 아닌 의논의 바탕이 되는 대전제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거나 잊는다.

으뜸인 리를 읽어보면 어버이신님께서는 태초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창조할까? 말까?’는 의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는 목적을 무엇으로 할까?’ 이것은 의논하지 않으셨다. ‘인간 창조, 즐거운 삶을 대전제로 해서 어버이신님은 도구들을 불러서 납득시키고 먹어서 맛을 보고 그 특성을 잘 살펴서 온갖 도구로 쓰셨다. 움직일 수 없는 대전제를 중심에 두고 도구들과 의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신님께서는 1838년 시순이 도래함에 따라 세계인류를 구제하시겠다고 하강하시고, 미키님을 현신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때 세계인류를 구제 할까? 말까를 의논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미키를 현신으로 삼을까? 말까?’를 전혀 의논하시지 않으셨다. ‘세계구제, 미키를 현신으로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주변 사람들과 3일주야로 이해시키고 납득을 시키면서 비로소 이 길을 여시게 되었다. 바뀔 수 없는 대전제를 중심에 두고 어버이신님은 인간들과 의논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의논을 하기 위해서 자주 모이지만, 의논의 중심 대전제를 모르거나 무시하고서 의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럴 때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일은 더 꼬이고 결론은 나지 않고 시간만 허비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의논할 내용과 그 전에 분명히 새겨야 할 의논을 위한 기본 전제가 있다는 것을 잘 잊는다. 잊기 때문에 의논이 맞지 않는다. ‘신의 뜻이라야 마음을 모을 수가 있다는 지도말씀은 그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뜻이 없는 곳에는 아무리 의논을 해도 마음을 모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논은 하나마나한 것이라는 말일 거다.

흔히 이 길에서 남편을 맞추라고 하는 것은 왜 일까?

어버이신님께서는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라고 하신 것은 서로 맞춰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뜻이다. 맞추기 위한 대전제는 서로 도와서 함께 즐거운 삶이다. 나도 즐겁고, 너도 즐겁고, 우리 모두 즐거울 뿐만 아니라, 신도 즐거워하는 참된 즐거운 세상 만들기다. 그 즐거움에 당신이 빠질 수 없고, 내가 빠질 수도 없고, 어버이신님도 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큰 바탕이 되는 조건,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인 즐거운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대전제를 맞춘 뒤, 남편을 맞춘다고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남편을 먼저 맞춘다는 것은 결국 남편이 가진 인연에 끌려가서 더 불행한 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선 자리가 바른가

 

어느 날 우리 포교소에서 저녁근행을 보던 중이었다. 손춤 출 때 내가서는 곳은 주로 교조전 앞이다. 교조전 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상단을 바라보니 방석이 조금씩 비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근행이 끝나고 올라가서 바르게 고쳐 놓고, 내려와서 중앙에서 보니 다시 비뚤어져 있었다. 이상하다. 그래서 아까 자리, 교조전 쪽에서 다시 보고, 중앙에 서서 또다시 보니 선 자리마다 방석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머리로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방석이 비뚤어 졌다 싶으면 먼저, 내가 바라보고 선 자리가 바른가를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선 자리가 정중앙이 아니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조금씩 사물들이 비뚤어져 보이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계속 착각을 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보면, 방석들 간격이 일정치 않거나, 혹은 각 악기 팔족상이 제자리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제단 위에 제물을 올리는 삼보들도 그렇게 보일 때가 많다. 한 두 해가 아니고 이십 년이 되어도 그런 느낌이 있다. 지금도 착각을 순간적으로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것이 착각임을 알고 내가 선 자리를 먼저 살펴보지, 방석을 바로 놓으려고 행동을 먼저 취하지는 않는다

 

그 경험에 비춰서 누구에게 맞춰야 하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구나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본 관점을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조금만 지나쳐도 강요가 되어버리고 만다.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가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유지하기란 몹시도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신의 자리에서 본 관점에 맞추라는 것은 치우친 관점에 맞추라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어디에 맞춰야 할까? 신전의 정중앙, 즉 어버이신님전을 중심에 두고 한 가운데를 맞춰야 한다. 그것은 신의 눈으로, 하늘의 자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가 하늘의 자에 맞추어야 맞추어지는 것이지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에 맞추다가는 영영 맞추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하늘의 자에 맞추어야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화편에 나오는 교조님 말씀처럼

[모두가 바르다고 생각하지만 하늘의 자에 대면 모두가 조금씩 어긋나 있는 거야]

라고 하신 것이겠지.

 

신님에 맞추느냐? 남편에 맞추느냐?

그리 생각하면 이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어버이신님과 남편은 동등한 개념이 될 수 없다. 남편을 맞추는 이유는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을 맞추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냐 하는 것은 어버이신님의 뜻에 맞느냐, 아니냐로 판명나기 마련이다. 남편에 맞추는 것이 남편 자리에서 방석을 보듯이 비뚤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살짝 비뚤어진 인연에 맞추다 보면 처음에는 작게 어긋나지만 갈수록 행복한 길에서 크게 어긋나게 되고 결국 불행해진다.

어버이신님께 맞춘다면 태초 인간을 창조한 목적인 서로 도와 즐겁게 사는 삶을 실현하는 길을 가게 되지만, 남편만을 맞춘다는 것은 신님께 어긋나는 불행한 길로 가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물론 내가 남편을 맞추다보면 남편이 변화되어, 신앙의 길로 이끌려 들어와, 신님의 의도에 맞출 수 있게 수호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희박한 경우이지 않을까? 또 남편이 너무나 훌륭한 마음성인이어서 그 뜻대로 따르는 것이 신의 뜻에 맞는 것이 돼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상당히 드문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성인이 더디고 미숙한 인간이니까.

어버이신님과 남편은 동급으로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다. 행복하기 위해선 먼저 어버이신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그러니 남편에 맞추는 것이 어버이신님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면 명백히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님에 맞추느냐, 남편에 맞추느냐이런 질문으로 헷갈려 하며 길을 잘못 드는 용재들이 불행히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어버이신님을 맞추고 어버이신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둔다는 것은 모든 용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임에는 말할 나위 없다. 결국은 그런 자세가 행복해지는 길, 운명을 바꾸는 길이 된다. 나아가 남편에게도 잘 맞춘 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 무엇에 맞출 것인가의 답은 신님께 맞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버이신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신 목적에 맞춘다는 것이다. 근원과 부차적인 것, 중심과 주변, 그리고 우선순위를 분간하지 못하면 그렇게 헷갈리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어버이신님께 잘 맞춘 결과로 마음이 즐거워지고 저절로 용솟음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버이의 눈에 맞는 자는 나날이 차츰차츰 마음 용솟음칠 뿐이야 15-66